제105화. 늙은 어부의 사랑 (4)
늙은 어부는 밀물이 만드는 해류를 타고 배를 몰았다.
밤이라 육지에서 부는 바람 탓에 돛을 이용하지 못했다.
그는 주름진 팔로 노를 저어 방향을 조종했다.
조금 더 큰 배였다면 조타를 이용하여 배를 몰았겠지만, 노인의 배는 조타를 달기에는 너무나 작았다.
“끄응, 힘에 부치는구만.”
해류가 알아서 배를 밀어주니 등대 불빛만 보고 방향만 잡아주면 될 것 같지만, 이 근방의 바다에는 암초가 많아 계속해서 방향을 틀어줘야 했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다를 읽어낼 수 있는 자만이 항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두운 밤, 늙은 어부는 하늘에 수놓은 무수한 별빛을 등지고 희미한 등대와 보잘것없는 등불에 의지한 채 계속하여 노를 저었다.
늙은 어부의 배에는 노인의 몸집보다 작은 수조에 고작해야 물고기 서 너 마리만 채워져 있었다.
결코 긴 항해는 아니었으나, 생업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다른 어부였으면 빈 배에 한탄 섞인 한숨만 채웠을 터다.
하지만 배 뒤편에 놓인 먼지 낀 그물은 그가 어업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늙은 어부는 달을 올려다봤다. 희미하고 얇은 선만 남은 달이 자신의 처지와 같아 씁쓸하게 웃었다.
“그만 포기해야 할까.”
늙은 어부는 중얼거렸지만 내일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또다시 등불을 챙겨 항구로 나아가리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항구 선착장에 도착한 노인은 닻을 내리고 뱃머리를 고정대와 밧줄로 묶었다.
작은 수조와 낚싯대를 챙기고 하선(下船)하는데, 중년의 어부가 노인을 발견하고는 반겼다.
“오셨수?”
“오냐, 어딜 그리 바삐 가느냐?”
늙은 어부의 물음에 중년의 사내는 저 항구 한 켠의 주점을 가리켰다.
“어떤 행상인이란 자가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놈한테 가장 비싼 술을 한 잔 산다 하더이다! 거, 있잖수! 가게 주인 놈이 질리빌에서 공수해 온다던 그 설탕 시럽을 넣은 술 말이요!”
“그 더럽게 비싼 술?”
노인이 관심을 보이자 중년의 어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디다! 가게 주인 새끼가 맨날 너희 같은 거지 새끼들은 한 모금도 못 마실 거란 그 술!”
물론 농담이란 것은 알고 있다. 다들 막역한 사이니 서슴없이 욕을 하는 거야 일상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범한 날에 입을 대볼 만한 술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 그렇다면 나도 빠질 수 없지.”
늙은 어부는 소싯적에 음유시인 뺨을 치던 이였다.
“게다가 그 행상인이 인어 전설에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이다!”
“그러냐? 네가 내게 주절주절 떠드는 걸 보아하니 속내가 뻔히 보이는 구나.”
“어흠!”
노인의 말에 중년의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거, 술 한 잔 얻으면 한 모금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기저귀 차고 다니던 시절부터 봐왔던 털북숭이가 부탁하는 모습에 늙은 어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냐, 한번 해보마.”
그러고는 술이 그리워질 때면 이따금씩 들리던 주점으로 향했다.
주점 안에는 어부들은 물론, 평소 주점에 죽치고 살던 한량들도 비싼 술을 탐내며 줄을 서 있었다.
인어 전설을 이야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냥 웃겼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도 있었다.
행상인은 인어 전설에 관심이 있다고는 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라 했으니 문제는 없었다.
줄의 제일 앞에는 금발의 유약해 보이는 앳된 인상의 청년이 거만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평가했다.
“푸하핫! 그거 재미있네요. 하지만 조금 더럽네. 주인장, 노력상으로 맥주 한 잔 주세요.”
행상인의 말에 주점 주인은 맥주잔에 술을 따라 방금 막 이야기를 끝낸 사내에게 건넸다.
제일 비싼 술은 아니었지만 청년은 주점의 모든 이들에게 한 잔씩 술을 사고 있는 셈이었다.
“우웩! 그게 정말 재미있다고 하는 말은 아니죠? 주인장, 이분께 술 깨라고 바닷물이나 한 컵 퍼주세요.”
아니, 모두에게 술을 사는 건 아닌 듯했다.
행상인의 반응에 주점의 어부들을 박장대소를 하며 이야기꾼의 재주가 없는 사내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늙은 어부는 줄을 무시하고 행상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인어 전설이라면 이 도시에서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아네. 이 촌부에게 술 한 잔 살 준비 하게나.”
늙은 어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 *
노인의 등장에 어부들은 비싼 술을 얻어먹기에는 글렀다며 혀를 찼다.
그들의 반응에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설탕 시럽의 달콤함에 취하며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십니다. 반응들을 보아하니 노익장께서 입담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그렇지. 어흠! 그런데 이야기를 시작하기에는 목이 꺼끌꺼끌하군. 방금 전까지 바닷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노인이 은근슬쩍 근처 테이블에 놓인 빈 맥주잔을 흘겨보며 내게 눈치를 줬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나는 박수를 쳤다.
“하하하! 제가 졌습니다! 특별히 노익장께는 한 잔 드리고 시작하죠. 주인장, 맥주 한 잔 부탁드립니다.”
“한 잔 추가요~!”
내 덕분에 가게 매출이 올라가자 기분은 좋은지 주점 주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인에게 술잔을 건넸다.
술잔을 받은 노인은 나이에 맞지 않게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꽤 큰 잔이 빠르게 비워지자 주변의 어부들은 환호했다.
“아그니 영감! 아직 안 죽었구만!”
“멋지다! 영감!”
아그니라 불린 노인은 빈 술잔을 거꾸로 들어 보이며 자신의 정력을 과시했다.
그러고 보면 어부들에게 물으라고 했던 건어물 상인이 아그니란 어부가 가장 나이가 많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했었지.
그 늙은 어부가 저 노인인 듯했다.
“큼! 큼! 그럼 목도 풀렸으니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한 곡조 뽑아야겠지.”
아그니는 술잔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치며 리듬을 만들었다.
일렁이는 파도, 넘실이는 웅심
사나이 나갈 길을 막을 자 누굴쏘냐
옆집의 베를 짜는 직녀도
꽃집의 아리따운 아가씨도
결코 돌아보지 않으니
바다 사나이 돛을 펼쳐라
에헤라 에헤라 노를 저어
데헤라 데헤라 파도 넘어
그물에는 고기가, 수조에도 고기가
넘쳐나는 바닷길을 막을 자 누굴쏘냐
거센 풍랑에 갑판을 적시는 파도
심해 속 이빨 빠진 외다리 악령
그 무엇도 무섭지 않으니
바다 사나이 조타를 잡아라
에헤라 에헤라 풍랑을 타고
데헤라 데헤라 나아가자
노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맑은 목소리의 노래에 나와 프레시아는 절로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젊은 시절 동료들과의 항해담은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아그니는 능숙하게 말을 끊으며 헛기침을 했고, 나는 그때마다 맥주를 주문해 바쳤다.
맥주를 들이켠 그는 흥에 취해 다시 노래를 부르고, 이전 세대의 이야기,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인어 전설의 이야기를 풀 때는 정말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 이 촌부의 이야기는 어떻게 재미있었나?”
늙은 어부의 물음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노익장보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푼 분은 없었습니다. 어부가 아니라 음유시인이 더 적성에 맞는 것 아닙니까?”
내 진담 섞인 농담에 그는 껄껄 웃었다.
“아하하하! 그렇지 않다네. 내가 배를 모는 것을 보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갈 걸세. 그러니 이 나이를 먹고도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지 않겠나.”
“그거 대단하군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현대의 원양어선도 젊은 사람도 허덕일 정도다.
하물며 돛으로 움직이는 나무배를 타고 어업에 종사하는 건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거나 기사처럼 연공을 하며 단련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노인에게선 특별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비싼 술을 드리고 싶긴 한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아그니의 물음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등에 턱을 괴었다.
“인어 전설의 내용이 다른 분들이 이야기해 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요. 물론 노익장의 노래와 언변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다른 정보가 있었으면 했는데 아쉽군요.”
“아니야, 이해하네. 원래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많이 들으면 재미가 떨어지는 법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살짝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그 인어 전설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네. 아, 자네 같은 젊은이에게는 오래된 이야기라 느낄 수도 있겠군. 지금은 소용돌이 군도라 불리는 저 섬들도 내가 어렸을 때는 하얀 파랑(波浪) 군도라고 불렸지. 거센 격류가 회전하며 섬과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가 하얗게 보였거든.”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제대로 찾았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인어 전설에 대해 들어 숨겨진 이야기가 있나 찾아보려 했는데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을 듯했다.
“제가 내건 상품의 주인이 나타난 것 같네요.”
“역시 아그니 영감이군. 최선을 다해 만들어 드리지.”
주점 주인은 능숙하게 칵테일 한 잔을 만들어 아그니에게 건넸다.
늙은 어부는 술잔을 받아 들고 음미했다.
“확실히 맛있군, 비싼 값을 하는 것 같아. 네 아버지가 네가 헛바람이 들어 헛짓한다고 혼내던 게 기억이 선한데, 훌륭한 술을 만들 수 있게 됐구나. 장하다.”
아그니의 인정을 받자 주점 주인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더니 훌쩍였다.
“내 망할 아버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네. 뭐, 팔리지 않는 걸 보면 아버지 말이 옳았던 것 같지만.”
“혼자 마시기 아까운 맛이야. 한 모금씩 해봐들.”
아그니는 술잔을 젊은 어부들에게 돌렸고 어부들은 비싼 술을 돌려 마시다가 누가 더 많이 마셨네, 적게 마셨네로 투닥거렸다.
“노익장이 인망이 좋으신 분인가 보죠?”
내 물음에 주점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 어부치고 저 영감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인망이야 좋을 수밖에. 나도 어렸을 때 가출하는 걸 도움받기도 했고 말이야.”
아니, 가출을?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주점 주인은 낄낄거렸다.
나는 그동안 주문한 술값으로 1천 듀플짜리 은화 세 개를 바 위에 놓았다.
술값으로 거의 100만 원 정도 쓴 셈이군.
“남는 돈으로는 저 어르신이 원할 때 한 잔씩 주세요.”
“…아니, 230듀플 정도 부족한데? 댁이 산 술이 비싼 술이라서 말이야. 맥주도 많이 사기도 했고.”
그의 말에 무안해진 나는 은화를 하나 더 얹었다.
앞으로 시킬 때는 가격표부터 보고 시켜야겠네.
뭐, 왕궁을 떠나기 전 왕에게 받은 용돈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상관없지만 말이다.
“이제 남죠?”
“어이쿠! 물론이지! 저 영감이 다른 놈들처럼 매일 오진 않아서 석 달 치 맥주 값은 되겠구만. 다른 놈 술값도 아니고 아그니 영감 거면 떼먹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말아.”
다른 사람 거면 꿀꺽하고 입 닦을 생각이었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돌리고 있는 어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늙은 어부에게 다가갔다.
“아그니 씨, 괜찮으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그에게 말을 거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나비가 내 어깨에 앉았다.
젠장, 무슨 일이 있으면 보내라고 당부했던 길버트가 보낸 연락이다.
아무래도 무슨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뵙고 싶습니다. 시간 괜찮습니까?”
“부탁? 내게 말인가? 뭐, 이 늙은이야 넘쳐나는 게 시간이라 괜찮네만, 내가 잠이 많아 오전은 피하고 싶구만.”
“그럼 제가 점심을 사 드리겠습니다. 이 가게 앞에서 만나도 괜찮겠습니까?”
내 제안에 아그니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점심을 산다면 여기보다는 시내에 있는 맛있는 가게를 알고 있네. 비싸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럼 중앙 광장에서 만나죠. 그 고래 조각상이 있는 분수가 있는 곳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말했고 나는 프레시아를 데리고 나비의 인도를 따라 달렸다.
사고를 쳤다면 제발 수습 가능한 범위이기를 바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