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늙은 어부의 사랑 (3)
인어 전설을 조사한다는 내 말에 다들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인어 전설이요?”
“어떤 전설이 내려옵니까?”
나였으면 전설이고 나발이고 딱히 관심도 없이 넘어갔을 텐데.
이런 모습을 보이니 일행들의 나이가 체감이 되었다.
새삼 살펴보니 죄다 십대 청소년들이군.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면 가출 청소년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처럼 봤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세계 기준으로 나는 물론, 길버트와 제이드 역시 성인이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나는 여관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 했다.
“전설이라고 해봤자 조금 흔해 빠진 이야기야.”
옛날, 어느 정도로 옛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옛날에 있던 일이다.
한 젊은 어부가 있었다.
그 어부는 젊으면서도 배 모는 실력이 뛰어나 모두에게 인정받는 어부였다.
그 어부에게는 한 가지 뛰어난 것이 더 있었는데, 바로 노래 실력이었다.
어지간한 음유시인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빼어난 노래 실력에 뭇 처녀들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그는 어디까지나 어부였고, 그날도 평소처럼 고기잡이배를 띄우고 동료들과 먼 바다로 항해를 나섰다.
노련한 어부들은 어군(魚群)을 쫓아 노를 저었고, 이윽고 몰려다니는 고기떼를 발견해 그물을 쳤다.
힘차게 그물을 당겨 만선이 되도록 고기를 잡던 그때, 변덕스러운 바다 날씨는 언제 맑았냐는 듯이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부들은 잡던 그물을 놓고 살기 위해 배를 부둥켜안았다.
그러다 젊은 어부의 동료 중 하나가 그만 요동치는 갑판 위에서 난간을 놓치고 말았다.
젊은 어부는 바다에 빠질 뻔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기둥에 밧줄을 묶어 몸을 날렸다.
동료는 밧줄을 잡고 살았지만, 그만 젊은 어부가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계속되는 격랑 속에 휩쓸린 젊은 어부는 빠르게 배와 멀어졌고, 동료들도 바다에 빠진 젊은 어부를 부르짖으며 안타까워했다.
바닷속으로 점점 가라앉아 의식을 잃어가는 젊은 어부의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소용돌이 군도의 한 섬에 표류하게 되었다.
작은 섬을 헤매던 젊은 어부는 망연자실하며 섬에서 며칠을 보내다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된다.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면 누군가 잡아 놓은 물고기를 발견하게 된다는 현상이었다.
젊은 어부는 그 현상을 보고 자신을 구해주고 먹을 것을 구해준 것이 인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꾀를 내어 생명의 은인인 인어를 만난다.
그렇게 젊은 어부는 인어와 몇날 며칠을 보내게 되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행복하던 시간도 잠시, 젊은 어부는 근처에 어업 중이던 어선을 발견하게 된다.
인어는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하던 젊은 어부의 마음을 알고 등을 떠민다.
인어에게 다시 돌아오겠노라 맹세한 젊은 어부는 인어의 곁을 떠나게 되지만, 결국 그 헤어짐이 마지막이 되었다.
인어가 젊은 어부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찾아오지 못하게 섬 인근에 수많은 소용돌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소용돌이 군도의 유래이자 이 도시에 전해지는 인어의 전설이야.”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실루아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헤어질 결심을 하다니 너무 슬퍼요.”
반면 제이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반론을 제시했다.
“인어의 피와 비늘은 값비싼 마법 재료로 유명하죠. 과연 이야기 속의 인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소용돌이를 만든 걸까요?”
동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석이었다.
“혹시 유안이 인어를 찾는 이유가…?”
날 범죄자로 보는 듯한 시선에 손가락으로 제이드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어허! 은인을 보는 눈깔이 불손하다. 내가 너같이 마법에 미쳐 있는 줄 알아?”
“어흠, 저도 딱히 미쳐 있는 것까지는 아닌데요.”
제이드는 찔리는 부분이 있는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퍽이나 그렇겠다. 그리고 딱히 인어를 사냥할 생각은 없어. 그냥….”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냥 인어가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니까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물론 자연스레 벗겨진 비늘이나 약간의 헌혈을 받을 생각은 있었다.
인어가 제정신이라면 말이다.
이미 미쳐버린 상태라면 인명 피해가 생기기 전에 죽여야지.
* * *
기껏 자유 시간을 줬는데도 모두가 인어 전설에 관심을 보이는 통에 우르르 몰려다니기는 뭐하니 둘로 나누어져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나와 프레시아가 1팀, 길버트와 제이드, 실루아가 2팀. 이렇게 나눠서 움직이자.”
이렇게 나눈 이유는 간단했다.
“길버트, 두 사람이 사고 치지 않게 조심해.”
다소 상식이 부족한 일행 중에서 나를 제외하면 길버트가 유일하게 상식인이었다.
내가 길버트의 어깨를 다독이며 주의를 주자 길버트는 자신이 없는 듯 했다.
그런 길버트를 위해 제이드와 실루아에게도 주의를 줬다.
“길버트 말을 잘 따르고,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다고 혼자 움직이지 말고, 돈은 내가 줄 테니까 돈 없다고 헐값에 마도구 팔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도 함부로 오지랖 부리지 마. 요약하자면, 사고 치면 혼날 줄 알아.”
내 말에 제이드와 실루아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무슨 어린아이인 줄 아십니까?”
“맞아요! 저도 어린애 아니에요!”
제이드는 몰라도 실루아는 어린아이 맞는 것 같은데.
게다가 제이드는 주인공답게 사건 사고에 쉽게 휘말리는 녀석이라 걱정이었다.
나는 길버트에게 묵직하게 넣은 동화 자루와 나비를 건네며 말했다.
“정보 탐색은 느긋하게 해도 되니까 돈이 필요하면 이걸 써. 그리고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연락해.”
“예, 알겠습니다.”
무역선이 거쳐 간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촌 도시니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아하하하, 유안도 참 걱정이 많습니다. 자! 가시죠! 길버트, 실루아!”
내 걱정을 한 귀로 흘려 넘긴 제이드는 자연스럽게 길버트와 실루아를 데리고 시장 거리로 향했다.
길버트가 잘해줄지 불안해지는구만.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프레시아에게 말했다.
“이렇게 둘이 움직이는 건 오랜만이네. 자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데이트나 즐겨보자고.”
“데, 데이트라뇨!”
내 농담에 프레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고지식해서 그런지 농담으로 받아 넘기질 못했다.
“뭐, 불쾌했다면 미안하고.”
“아닙니다!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우리 둘은 함께 시장 거리와 항구 쪽에 열린 수산 시장을 살폈다.
수산 시장 한편에는 갓 잡아 올린 듯한 사람 몸집만 한 생선들을 마법사들이 얼리고 있었다.
그 귀하다는 마법사까지 동원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휴양 도시인 질리빌로 가는 생선인 모양이었다.
휴양 도시인 질리빌도 바닷가에 있으니 어부가 있긴 했다.
하지만 관광객이나 무역상이 넘쳐나는 탓에 공급이 수요에 못 미쳐서 가까운 도시에서 구매해 가는 거다.
아니면 내륙에 있는 왕실이나 귀족가에 납품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마법사들은 콧대가 높다고 했는데 저런 일도 하네요.”
프레시아는 신기한 듯 구경했다.
확실히 쓸데없이 자존심 높은 마법사들이 저런 일을 하는 건 쉽게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륙 지방에서는 말이다.
“마법사도 사람인데 먹고살 돈은 필요하겠지.”
연구에 필요한 마법 시약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마법사는 숨 쉬는 것만으로 돈이 깨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구에 많은 돈을 사용한다.
실력이 좋거나 이빨을 잘 까면 귀족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모든 마법사가 대우받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생선을 얼리는 게 용병질 보다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였다.
나와 프레시아는 이런저런 구경과 군것질을 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시장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말 좀 물읍시다. 저 멀리 소용돌이 군도에 인어가 산다는데 정말입니까?”
내 갑작스러운 물음에 상인은 헛웃음을 쳤다.
“그런 전설이 있긴 한데, 인어가 정말 있겠수? 젊은 사람이 순진하구만.”
“하하하, 저도 정말 인어가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저 인어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어서 말이죠.”
“응? 그런 옛날이야기는 수집해서 뭐 하게?”
상인의 물음에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행상인이라 말이죠. 원래 높으신 귀부인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특히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죠.”
내 대답에 나이 많은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러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로 높으신 귀부인들의 귀를 사로잡아서 물건을 팔아먹는다는 말이군!”
“그렇죠! 덤으로 그 전설과 엇비슷하게 짜 맞추어 물건을 팔면 썩 품질이 좋지 않아도 좋다고들 삽니다. 인어 전설이면 저렴한 진주 귀걸이와 맞춰 팔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상인이 팔던 건어물을 구매했다.
“어허! 젊은 친구가 상재가 뛰어나구만!”
물건을 팔아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감탄한 것인지 기분이 좋아진 상인은 인어에 대해 아는 대로 이야기했다.
대략적으로 내가 아는 것과 그렇게 다르진 않은 내용이었다.
“음, 내가 아는 건 이 정도고,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저 앞 주점에 술을 마시고 있을 어부들에게 물어보게. 그 전설이란 게 어부들이 술에 취하면 떠들어대는 옛날이야기니까.”
“어부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마 아그니 영감이라면 많이 알 거야. 그 영감이 어부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으니까.”
하기야, 날아갈 게 아니라면 배를 타고 저 암초 밭과 거대한 소용돌이를 지나야 하니, 배와 배를 몰아줄 선원을 고용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어부들과 접선하는 건 좋은 선택지였다.
물론 나비와 람이의 힘에 의존해서 내가 운전수 노릇을 할 순 있었지만 암초에 부딪혀 배가 침몰하는 미래밖에 보이질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일직선으로 조종하는 거라면 모를까, 복잡하게 배를 몰 자신은 없었다.
상인의 말에 나는 고맙다 인사하고 그가 가리킨 주점, ‘흰 긴 수염 술고래’로 향했다.
“생각보다 깔끔하네요.”
“그러네.”
프레시아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바닷바람에 녹슬고 지저분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예상 외로 깔끔했다. 거친 어부들이 이용하는 것치고는 말이다.
보통 영화 같은 걸 보면 외지인이 이런 로컬 술집에 들어오면 떠드는 걸 멈추고 입구를 보며 경계하는데.
영화는 영화에 불과한지 주점의 술꾼들은 왁자지껄하게 자기들 이야기하기 바빴다.
나는 주점 주인이 지키고 있는 바로 다가가 의자에 앉으며 술을 주문했다.
“여기서 가장 비싼 걸로 한 잔 주세요. 비싼 게 맛있겠죠?”
내 주문에 주인장은 긴 콧수염 사이로 누런 이빨이 보이도록 웃으며 술잔을 꺼냈다.
“그거 참 마음에 드는 주문이군. 당연히 비싼 게 맛있지. 저 쓸모없는 것들은 죄다 독한 것 아니면 싼 것만 찾는다니까.”
주점 주인의 말에 가까이에 있던 어부가 껄껄 웃었다.
“싼 거나 비싼 거나, 술이 취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뭘 더 바라나? 다들 안 그러냐!”
어부의 외침에 주점에 있는 이들이 동의하며 주점 주인에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야유했다.
그들의 야유에 주점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올려 모두가 볼 수 있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닥쳐! 이 쓸모없는 새끼들아! 빨리 술이나 처먹고! 돈이나 내고! 꺼져! 어이! 거기! 또 구석에 토하고 토끼면 내 손에 뒈질 줄 알아!”
“우우! 쓰레기 악덕 업주! 닥치고 술이나 팔아라!”
주점 주인은 입으로 손님들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동시에 손으로 능숙하게 칵테일을 만들었다.
“노을 지는 에메랄드 바다를 본 딴 칵테일이다. 질리빌의 노을이지.”
은은한 붉은 빛의 칵테일은 꽤나 달콤하고 도수가 꽤 높았다.
과일의 단맛이 아니다. 정제된 설탕 시럽의 맛이었다.
시중에서 설탕을 구할 수는 있긴 했지만 가격이 비싼 사치품에 속했다.
“이야! 달달한 게 비싼 이유가 있네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주점 안의 어부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은화 한 개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 먹을 순 없죠. 하지만 너무 비싸니 딱 한 사람! 제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께 한 잔 사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 도시의 인어 전설에 관심이 많습니다!”
내 제안에 어부들은 관심을 보이며 서로 앞다투어 이야기하려 애썼다.
주점 주인의 욕설 섞인 중재로 도전자들을 줄 세웠고, 어부들은 인어 전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듣던 중, 주점 문을 열고 한 노인이 들어오며 말했다.
“인어 전설이라면 이 도시에서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아네.”
노인의 등장에 어부들은 탄식하며 포기했다.
“이 촌부에게 술 한 잔 살 준비 하게나.”
늙은 어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