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03화 (103/214)

제103화. 늙은 어부의 사랑 (2)

작은 배로 강줄기를 따라 달리기를 대략 반나절.

굽이치는 강 때문에 약간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바스타유 산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몬스터가 적게 나오기 시작하는 걸 봐서는 슬슬 산맥 끝에 도달하겠네요.”

배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물속의 몬스터를 가볍게 처리한 제이드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리 봐도 사방이 산맥인데?”

“아, 저기는 바스타유가 아니라 소크레 산맥입니다. 바스타유랑 연결되어 있지만 지역적으로 다릅니다. 지도로 봤을 때는… 여기쯤이겠네요.”

제이드가 지도에서 짚은 지역은 산맥이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마치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바스타유에서 멀어질수록 몬스터가 적어지는 걸 보면 마법적인 이유가 있나 보지?”

내 추측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이계에서 나온 몬스터가 봉인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귀향심을 자극하는 마법이 산맥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물론 너무 넓게 퍼트린 마법이라 절대적인 효과를 가진 건 아니지만요.”

“봉인의 마정석을 삼킨 놈들이 산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붉은 눈은 57년 전 블란츠바그령의 요새를 박살 내고도 다시 산맥으로 돌아갔다.

그게 그저 영역 생물이라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간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대마수를 노리고 건 마법이라 대마수에게는 정신 지배에 가까운 마법이었죠. 위치 추적 마법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당시는 워낙 상황이 급박했다고 하니까요. 그나저나 벌써 여기라니. 역시 물길이 빠르긴 빠르네요.”

골렘으로 걸어왔다면 반의반도 도착하지 못했을 거다.

“이렇게나 빠를 줄 알았으면 생필품을 구하러 도시에 갈 때 물길을 이용하는 거였는데 말이죠.”

“돌아갈 때도 생각해야지. 편도가 빠르다고 물길을 이용하면 돌아가는 길이 더 멀고 힘들잖아.”

“아…!”

내 지적에 제이드는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도 은근히 헛똑똑이라니까.

지도에 그려진 강줄기를 따라 배를 달리니 금방 소크레 산맥을 넘어 저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에 파도를 따라 어지러이 반짝이는 수평선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도련님! 저게 바다인가요? 정말로 물밖에 없네요!”

프레시아도 뺨을 상기시키며 눈을 반짝였다.

“저기가 그 유명한 에메랄드 해협이야. 지금은 붉게 보이지만 낮에는 초록빛이라고 하더라고.”

에메랄드 해협은 질리빌이 휴양 도시라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아름답고 맑은 바다와 무역항으로서 온갖 물품들이 모이는 지리적 특성이 맞물려 꽤나 번화하다고 했다.

질리빌과 꽤 거리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저 섬들이 인어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는 소용돌이 군도. 왼쪽의 툭 튀어나온 반도가 우리가 갈 항구 도시 아크라. 저 항구 도시에서 여객선을 타고 질리빌로 갈 거야.”

아크라와 소용돌이 군도는 가까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수십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아크라도 나쁘지 않은 위치에 있었지만 질리빌에 비해 해류가 거세고 암초가 많았다.

아무리 소크라 산맥에 막혀 있다지만, 바스타유 산맥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 등으로 그렇게까지 번성하지는 못한 도시였다.

“도시로 들어가기 전에 혹시 모르니까 신분증 나눠줄게. 이건 블란츠바그령에서 발급한 자유민 통행 신분증.”

신분증이라고 해봤자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나무패에 이름과 출생년도, 출신지 정도가 새겨져 있는 게 다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없는 사람이 수두룩한 시대였다.

귀족 신분증처럼 마법이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위조하기 쉽긴 했다.

그러나 위조하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신분증이 필요한 경우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신분증에는 영주의 직인이 찍혀 있는 탓이었다. 괜히 위조하다 걸리면 참수를 당했다.

신분증이 필요하다면 용병단 가입 등 대체할 방법이 많았으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그리고 이건 자작가 기사 신분패, 그리고 이건 왕실 기사 신분패, 그리고 이건 준남작 가문의 귀족 신분패, 그리고 이건 용병단 단증, 그리고 이건 상행 허가증, 그리고 이건….”

내가 계속해서 다양한 종류의 신분증을 꺼내자 제이드는 당황했다.

“자, 잠깐만요. 무슨 신분증을 이렇게 많이 주시는 겁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되물었다.

“왜 주냐니? 당연히 상황에 따라 돌려쓰라고 주는 거지.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

입만 터는 걸로는 안 되는 곳에 들어가거나, 신분 때문에 귀찮아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높은 신분이라고 반드시 좋은 건 아니었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그러고는 귀엽게 약간 으스대며 제이드에게 소소한 텃세를 부렸다.

“당신은 아직 도련님을 잘 모르는군요. 도련님께서는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프레시아를 보며 제이드는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안이 지나치리만큼 철저하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지독한 함정 설계만 봐도 알 수 있죠.”

왠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며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었다.

그보다 지독한 함정 설계라니 너무하네. 나는 그저 효율을 중시했을 뿐이었다.

“싸우는 거 아니지?”

내 물음에 두 사람은 언제 서로를 노려봤냐는 듯이 표정을 바꾸며 외쳤다.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이럴 때 보면 또 호흡이 잘 맞는다니까. 그래, 원래 미운 정이 들다 보면 어느새 고운 정이 되기도 하는 거지.

“그래도 위조까지 하는 건 조금….”

제이드의 우려에 나는 싱긋 웃었다.

“위조 아닌데? 전부 공식 절차에 따라 발급받은 거야.”

데미웨이가 내 요청에 반강제적으로 도와주긴 했지만 위조는 아니었다.

기사나 귀족 신분패는 블란츠바그 후작의 가신 가문의 것을 사용했다.

용병단도 반쯤 데미웨이의 사병이 된 용병 조합 블란츠바그 지부에 진짜로 등록해 놓았다.

말하자면 페이퍼 컴퍼니처럼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신분들이었다.

물론 합법이냐 묻는다면 불법에 한없이 가까웠지만, 원래 이런 건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다.

6천 대에 달하는 인형 수리비도 거의 안 받듯 했는데 이 정도 도움은 웃으면서 해줘야지.

“여기서는 일단 행상인으로 도시에 들어갈 거니까 가방들 메고, 혹시 검문이 있으면 상행 허가증으로 준비해 둬.”

적당히 준비를 마친 우리는 언제 다시 사용하게 될지 모르는 배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아크라로 들어갔다.

다행히 꽤나 외진 곳에 위치한 도시라 따로 검문은 없었다.

“여기에는 며칠간 머무실 생각입니까?”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글쎄, 아바스엘과 만나기로 한 날짜도 있으니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정도지 않을까 하는데.”

내가 이 도시에 온 이유는 여기가 질리빌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지만, 인어의 전설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소설 속에서 이 도시가 등장할 때는 이미 어떤 한 미친 인어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다음이었다.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 일행은 그 인어를 물리치고 인어의 보금자리에서 ‘기적의 결정’을 비롯해 여러 중요한 것들을 얻는다.

이미 기적의 결정은 가지고 있으니, 반드시 인어를 족치고 보금자리를 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왜 인어가 미쳐 날뛰었는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배후에 아르카나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소설이라고 모든 정보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바스엘이면 어머니 제자분 말씀이죠? 만나는 건가요?”

실루아는 아바스엘과 만난다는 말에 신기해했다.

“아바스엘이 일을 끝냈으면.”

아바스엘과 만나는 건 저주를 풀고 마법을 되찾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쯤이면 저주를 풀었어도 이상하지 않아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내 두긴 했다.

하지만 만약 내 예상보다 늦어져서 아직 저주를 풀지 못했을 때는 저주를 푸는 데 집중하라고 적어놓았다.

나는 항구 근방에 형성된 시장 거리에서 조용하고 질 좋은 여관을 수소문해 방을 빌렸다.

하루 숙박 비용이 꽤 비쌌지만 그래도 나름 깔끔한 방이라 만족했다. 적어도 야숙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자, 지금부터 자유 시간. 방에서 휴식을 취하든 시장 구경을 하든 마음대로 해.”

내 말에 길버트가 물었다.

“도련님께선 뭘 하실 겁니까?”

그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나? 나는 지금부터 이 도시의 인어 전설을 캐고 다닐 거야.”

* * *

늦은 저녁, 노인은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어선들이 모여 있는 항구로 걸었다.

“아그니 영감, 배 띄우러 가는 거요?”

그물 뭉텅이를 어깨에 들쳐 멘 어부의 인사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오냐. 지금 어선을 띄우러 간다.”

“거, 애들이 너무 늦은 시간에 배를 띄운다고 걱정합디다.”

중년의 어부가 넌지시 말리자 늙은 어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네 젖먹이 시절부터 배를 몰던 나다. 그런 핏덩이들 걱정이 무어냐?”

“클클클, 하기야 그건 그렇지. 만선하쇼!”

“예끼, 늙은이가 어찌 감당하라고. 적당히 배만 불릴 정도만 바다에서 얻어오는 게지. 너나 만선해라.”

서로 덕담을 주고받은 두 어부는 짧게 인사를 하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자신의 배에 올라탄 늙은 어부는 닻을 올리고 먼 바다까지 배가 움직일 수 있게 돛을 풀었다.

“바람이 좋구먼.”

해가 지고, 식어버린 도시에서 부는 땅바람에 돛이 부풀며 배를 힘껏 바다로 밀어냈다.

보통 낮에 일하는 어부들은 먼 바다에 나갈 때 여럿이 노를 저어 바다에서 부는 바람을 이겨내고 나아간다.

하지만 늙은 어부가 홀로 바다에 나가기 위해서는 바람의 힘이 필요했다.

때문에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고기잡이배를 띄우고, 늦은 밤 밀물의 힘을 빌려 다시 항구로 돌아왔다.

“이제 몇 번이나 바다에 나올 수 있으려나.”

노인은 뱃머리에 등불을 걸어놓으며 한탄했다.

밤중의 고기잡이는 위험해서 젊은 어부들도 꺼리는 일이었다.

비록 노련한 경험과 등대 불빛으로 뱃길을 잡는다고는 하지만, 고기잡이를 하는 작은 배로는 자칫 잘못하면 표류하기 십상이었다.

이 근방의 해류는 인어가 산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격렬했다.

“뭐, 위대한 어머니의 품에 영원히 잠드는 거라면 바라는 일이다만.”

늙은 어부의 두려움은 오히려 노쇠해 바다에서 그 끝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유쾌하게 웃으며 먼지 낀 그물망 위에 몸을 누이고 돛과 연결된 밧줄을 잡아 배가 나아갈 방향을 조절했다.

어슴푸레한 하늘에 벌써 떠오른 개밥바라기 별이 노인의 자침(磁針)이 되어주었다.

늙은 어부는 흥겨움에 항구에서 흥얼거리던 노래를 불렀다.

인어 아가씨, 날 위해 노래를 불러주오

치맛바람 휘날리듯 파도를 둘러맨 소녀여

아리따운 목소리로 날 매혹해 주오

뭇 청년들의 시샘을 받도록

살랑이는 바닷바람, 푸르른 눈동자

햇빛이 비추는 너울 같은 목소리

어리석은 어부의 순정을 취해주오

일렁이는 너울을 걷어 그 얼굴을 보여주오

아아, 아리따운 인어 아가씨

순진한 어부의 사랑을 받아주오

그 끝이 달을 향한다 하여도

후회는 없으리, 후회는 없으리

“정말로 후회는 없으니, 그 그리운 얼굴을 다시 한번 내게 보여주오. 더 잊기 전에 부디….”

늙은 어부는 쓸쓸히 중얼거렸다. 흥겨운 가락은 파도 소리에 파묻히고 서글픔만이 남아 어깨를 짓눌렀다.

늙은 허리가 굽은 이유가 그 슬픔의 무게 때문인 것처럼.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