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마법사와 겨우살이 풀 (5)
화살로 변한 미스텔이 살갗을 뚫고 갈비뼈 틈새를 지나 심장에 도달한 순간 미스텔은 그의 심장에 박혀 있는 저주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그 순간, 지독한 신을 죽이는 화살이 신화에 이르는 저주를 찢어발기며 거대한 마력의 격류를 일으켰다.
“커흑!”
아바스엘은 격통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마력의 격류는 마법진의 인력(引力)에 따라 저주로 막혀 있던 아바스엘의 마력회로를 뚫으며 거세게 흘렀다.
마치 무너진 댐이 연달아 하류의 댐을 박살내며 흘러넘치는 듯 했다.
그 과정에서 미스텔의 마력이 전신의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며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전신이 산산이 가루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발밑의 마법진이 아바스엘의 정신과 육신을 고정시켰다.
그 과정은 굉장한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희열이기도 했다.
“나는 신의 탈을 쓴 인간일지니. 어리석은 목자여, 일곱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반신이여, 나 또한 그리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을지니.”
아바스엘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력을 발휘하며 마력을 움직여 마법을 자아냈다.
손끝으로 마력이 흐르며 의지를 따라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수천 번의 밤 동안 꿈꾸고, 수천 번의 낮 동안 그려오던 순간이었다.
처음 마법을 봤던 어린 시절처럼 순수하게 감동했다.
처음 마력을 느끼고 움직였던 것처럼 즐거웠다. 처음 마법을 사용했을 때처럼 감격스러웠다.
“아아, 마법이란 이리도 신비롭고 아름답구나.”
잃어버렸던 손발을 되찾은 사람처럼 신기한 듯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오열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바스엘은 감사를 읊고 다시는 잃지 않겠노라 되뇌며 전신을 휘감는 마력을 감싸 안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양팔을 잃은 자가 잃었던 손을 되찾았을 때의 감정은 희망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엘!”
아바스엘은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외침에 상념에서 깨어나며 마력을 다루었다.
저주를 완전히 지워버린 미스텔의 모든 마력이 부서진 그의 전신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허물이 벗겨지듯 피부가 흘러내리고 뼈가 더욱 단단하게 붙었다.
너덜너덜해진 마력회로를 견고하게 재구성하였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과정 속에서, 아바스엘은 아공간에서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아아,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오랜만이다.”
마력이 봉인당하고 마법을 잃기 전 보다 굳건하고 방대한 힘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법 지팡이 끝으로 가볍게 신전 바닥을 두드렸다.
“아아악! 살려줘!”
가고일의 날카로운 발톱을 냄비로 막으며 비명을 지른 클리오는 죽음을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죽음의 공포에 덜덜 떨던 소년은 닥쳐올 고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사방이 고요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클리오가 천천히 눈을 뜨고 확인해 보니 자신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던 가고일이 멈춰 섰다.
“너희의 주인으로서 선언하니, 물러나라.”
아바스엘의 말에 몰려들던 가고일들이 일제히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열심히 가고일의 공격을 피해가며 싸우던 야드는 벙찐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물음에 아바스엘은 피식 웃었다.
“별것 아니네. 이 신전의 방위 마법에 간섭하여 주인 자리에 내 이름을 대신 새겨 넣었을 뿐이니까. 주인의 명을 경비가 따른 거지.”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나름 열심히 마법을 익힌 야드도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뭐, 아무 정보도 없었다면 나도 불가능했겠지만, 주군께 들은 신화적 정보가 많아서 말이다. 오면서 벽화를 해석하기도 했고.”
아무리 정보가 많았더라도 평범한 마법사는 신화가 서린 공간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의 마력이 미스텔이 지금껏 머금어온 신전의 마력으로 치환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거의 경보하듯 움직였는데 언제 해석까지 하셨담. 아무튼 놀랍습니다. 마법을 잃기 전에 대단한 마법사라는 게 정말이었군요.”
사실 그리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었다.
흔히들 자신이 소싯적에 대단했다는 사람치고 정말 대단했던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하는 게 모두 사실이라면 낡고 허름한 주점에서 왕년에 전설적이었던 탐험가와 용병왕을 한 더즌은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알코올 중독으로 손을 덜덜 떨면서 싸구려 연초나 피워대는 녀석들로 말이다.
야드의 반응에 아바스엘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큭큭큭, 이런 말을 하면 허풍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위즐 백작도 한 수 접어줬다고.”
위즐 백작보다 아바스엘이 먼저 슈프림 메이지가 되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마도팔현 중 한 분이라는 그분 말입니까?”
“그래. 그 누구보다 친했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지. 연락도 못 한 지 10년째인데,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군.”
자신의 친구는 재능을 꽃피우다 못해 마법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10년간 골방에서 썩어갈 뿐인 병신이었다.
벌레도 밟히면 발버둥 치는데, 밟혀도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한 자신은 벌레만도 못한 녀석이다.
만약 부티크에 속아 10년간 감금당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자신의 친구에게 연락을 했을까?
그렇게 속으로 자문한 아바스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과거 오만했던 자신이 그렇게 손을 뻗을 리 없었다.
부티크에게 속기 전에 몇 번이고 찾아갈 수 있었지만, 결국 친구의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모르는 상인의 도움을 원했던 그 아닌가.
지나간 과거에 만약이란 없으니 모두 부질없는 망상이었다.
“그보다 저희는 재보를 건든 적이 없는데 누구일까요?”
클리오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마법 지팡이로 신전 바닥을 가볍게 찍었다.
그러자 신전의 모든 것이 사라지며 푸른 들판과 청명한 하늘만이 남았다.
들판 위에는 아바스엘 일행 외에도 거친 숨을 토하며 전투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남녀가 서 있었다.
“어?! 내 보물들!”
“어?! 당신들!”
로우어펠과 페브리는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경악했다.
“네놈들이었나?”
아바스엘은 조금만 늦었으면 마법진을 완성하기도 전에 가고일이 덮쳐와 마법을 되찾지 못할 뻔한 것에 분노했다.
그의 살기 섞인 방대한 마력파에 두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며 경계했다.
“다, 당신 어떻게…?”
로우어펠은 평범한 사람이었던 아바스엘이 갑자기 강력한 마법사가 되자 당황했다.
로우어펠이 당황하고 있을 때 페브리는 상황파악을 끝내고 검을 땅에 버렸다.
“자, 잠깐만요! 대화를 원합니다!”
“자기야?”
“자기도 빨리 무기 버려! 지금 이 공간은 저 지질학, 아니 대마법사의 영역이라고!”
페브리의 말에 로우어펠도 주술 지팡이를 땅에 버렸다.
페브리가 대마법사의 영역이라고 할 정도면 완벽히 공간 주도권이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공간을 완벽히 지배하는 마법사의 영역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싸우는 건 목숨을 걸어야했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높은 위계의 마법사인 아바스엘과 적대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지금 상황에선 차라리 겨울나무의 현자의 땅을 침범하는 임무에 참가하는 게 더 안전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적어도 의지할 동료와 장비가 있었을 테니까.
“무슨 대화가 필요하지? 너희와 내가 원하는 바가 같을 텐데?”
순식간에 수백 개의 화염 창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페브리는 깨달았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적어도 제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두 사람 다 살아남지는 못하리라.
그렇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오해가 있습니다!”
페브리의 외침에 아바스엘은 일단 마법 사슬을 만들어 두 사람을 구속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잠재적 적을 두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구속당한 페브리는 속으로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이라 여겼으면 굳이 포박하는 게 아니라 공격했을 거다.
“이야기해 봐라.”
아바스엘의 말에 페브리는 차근차근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입니다. 신기한 탐험을 하려 했을 뿐, 당신의 것을 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쪽 남편이 발두르의 잊혀진 신전을 찾는다고 하지 않았나?”
아바스엘이 지적하자 페브리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게 목표였으면 그렇게 부주의하게 떠들고 다니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말씀드렸듯이 남편이 이상한 지역 전설을 듣고 찾아보자고 여행하는 게 취미라….”
그녀의 말에 아바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연기가 아니었다면 확실히 철없는 남편과 그 장단에 맞춰주는 아내로 보였다.
“그럼 왜 우리 뒤를 쫓았지?”
“그, 그게… 정규 루트를 벗어나도 길잡이가 되어주는 사람이 없길래, 딱히 목적지를 두고 산행을 하는 게 아니라 따라가 보자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페브리의 말에 아바스엘은 로우어펠을 봤다.
“저 남자가 제안한 거구만.”
“남편이 제안했네.”
아바스엘과 야드는 거짓말을 한눈에 알아봤다.
로우어펠이 열심히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페브리는 그런 남편을 박치기로 꾸중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알겠으니 넘어가고, 클리오에게 사흘만 길잡이를 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뒤를 따라가다 보니 마력이 잘 모이는 지역들을 여러 곳 지나치길래 단순한 지질 조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정 시간보다 더 여러분들을 쫓았습니다. 그냥 여행의 기념품 정도만 원했던 거지, 절대 뒤치기를 하려 한 게 아닙니다!”
“으음, 아마 거짓은 아니군.”
아바스엘은 마법 사슬을 통해 전해지는 두 사람의 맥박이 일정한 것으로 보아 거짓말이 아니라 판단했다.
“하지만 너희들 때문에 중요한 의식이 실패할 뻔했다. 의식이 실패했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겠지.”
아바스엘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분노를 느끼자 페브리는 다급하게 외쳤다.
“갈음하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돈이나 물품으로 갚겠습니다! 저와 그이가 이렇게 보여도 돈과 인맥이 있습니다!”
인맥이라는 말에 아바스엘은 잠시 멈칫했다.
“인맥이라… 그럼 정보도 받을 수 있나?”
아바스엘의 물음에 로우어펠과 페브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그 아공간 마도구를 넘기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가져와라. 그럼 그냥 넘어가겠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동의하자 아바스엘은 마법 사슬을 풀어주고 허공에 마법 술식이 담긴 계약을 띄웠다.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넘기고, 위해를 끼치지 않으며, 절대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계약서였다.
“마력으로 지장을 찍어라. 그럼 이번 일은 넘어가지.”
어기면 죽음으로 갚는 종류의 마법에 두 사람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계약했다.
신화적인 힘이 서려 있는 공간의 서포트를 받는 대마법사를 상대하느니 정보를 넘겨주는 게 더 살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듀플리온 왕국 마탑 소속인 인형술사 니벨 디 프로벨린의 모든 정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슬라반 서커스단의 단장 유밀 자반의 모든 정보. 특히 위치 특정과 주요 활동지역이 중요하다.”
‘광대’와 ‘탑’의 정보를 원하자 두 사람은 놀라서 눈을 깔았다.
“엘…!”
야드는 자신을 생각해 준 아바스엘에게 감동했다.
“정보를 넘기는 기한은 12월 1일, 정오. 정보를 넘기는 위치는… 수도…. 수도, 위즐 백작가 앞에 있는 찻집. 찻집이 없어졌으면 백작가 정문 앞이다. 내가 지정 시각으로부터 20분 이내 오지 않는다면 매달 1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
아바스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약이 체결되며 세 사람의 몸에 마법 문장이 새겨졌다.
“저기, 그 두 사람은 왜 찾는지 알 수 있을까요?”
페브리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피식 웃었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과 아버지라고 해두지.”
만나면 서로 죽이기 위해 안달이 날 테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말에 안도하며 두 사람은 아공간 팔찌를 풀었다.
“아, 혹시 돌아갈 여비 정도는 빼도 괜찮을까요?”
아바스엘은 그들의 아공간 마도구에서 금화 자루 하나를 꺼내 던졌다.
아공간 내부를 슬쩍 확인해 보니 굉장한 알부자였다.
“저기, 혹시 괜찮다면 이번 여행의 기념푸억!”
페브리는 헛소리하는 로우어펠의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켰다.
“…남편 때문에 고생이 많군.”
“…알아주시니 감사해요. 그래도 귀엽잖아요?”
페브리는 남편을 업고 재빨리 신전이 사라진 들판을 떠났다.
“그런데 신전은 어디로 간 겁니까?”
야드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아공간 팔찌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내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제 내가 주인이니까.”
이 신화가 서려 있는 공간도 챙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건축물인 신전과 달리 세상의 일부분이라 무리였다.
게다가 신전이 사라졌으니 이 공간도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후후, 방금 나간 부부의 인맥을 기대해 봐도 괜찮겠어.”
아공간 팔찌의 마법 술식으로 보아하니 제작자는 아바스엘 본인이었다.
그 말인 즉, 저들은 부티크의 고객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아바스엘은 이 공간에 서려 있는 마지막 힘을 이용해 자신과 일행을 ‘쫓아냈다’.
갑자기 신전 입구로 나오자 야드와 클리오는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클리오, 그동안 고생했다. 이르지만 이건 약속했던 보수와 성과금이다.”
아바스엘은 빼앗은 아공간 마도구에서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자루를 꺼내 건넸다.
“이, 이 정도로나요!? 감사합니다!”
이 정도라면 아끼고 아낀다면 다른 지원 없이도 10년간 고아원을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놀라는 클리오의 모습에 아바스엘은 오히려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화 자루가 아니라 신전에서 얻은 것을 나눠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보물은 화를 부르는 법이었으니까.
산 아래 지평선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하늘을 가르고 작은 새 한 마리가 아바스엘에게 날아왔다.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새였다.
“이건…?”
한 손으로 전서구 인형을 받아든 그는 편지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주군께서 우리를 부르시는군. 가자, 휴양 도시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