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마법사와 겨우살이 풀 (4)
아바스엘은 거침없이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을 밟고 신전 입구를 지났다.
야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클리오에게 물었다.
“너는 어쩔 거야? 따라 들어올래?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래?”
야드의 물음에 클리오는 큰 고민 없이 대답했다.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 기다리는 게 안전하리란 보장도 없었다.
눈사태는 보통 한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지진에도 여진이 있듯, 눈사태도 다른 구역에 영향을 주어 연쇄적으로 눈사태가 일어난다.
최악의 경우, 다른 곳의 눈사태가 다시 이곳에 영향을 주어 산사태까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최소한 신화시대부터 무너지지 않고 견뎌온 신전 안이 더 안전해 보였다.
게다가 여기서 기다린들 눈사태가 안정되고, 밤이 되어 눈이 완전히 얼어붙어 지반이 안정화될 때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야드는 거리낌 없이 신전 안으로 들어갔고, 클리오도 야드의 뒤를 따랐다.
깊고 어두운 길을 아바스엘이 들고 있는 마법 랜턴에 의지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엘, 가는 길에 함정은 없겠습니까?”
야드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랜턴으로 벽면을 비추며 대답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함정은 딱히 없을 거라 하셨다. 그도 그럴 게, 이 신전이 세워진 게 신화시대니 물리적 함정이든, 마법적 함정이든 그 세월을 버티지 못했을 테지.”
원시적인 함정이라면 남아 있겠지만, 돌다리도 두드리며 걷듯 주의하면 크게 위험하진 않을 터였다.
벽면에는 벽화에 가까운 상형 문자들이 가득 매워져 있었다.
“그래도 신화시대의 함정이면 혹시 모르지 않겠습니까?”
야드의 걱정도 타당했다.
고대의 유적이나 신화의 잔재가 짙게 남은 땅에는 종종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함정이나 파수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왜곡된 공간은 필연적으로 시간까지 왜곡시키기 마련이었다.
“아, 그것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이 산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이유와 같거든.”
아바스엘의 말에 두 사람은 관심을 보였다.
“내가 신전에서 찾는 게 뭐였지?”
아바스엘은 마치 선생이라도 된 것처럼 야드에게 물었다.
“미스텔, 신화시대에 신을 죽인 겨우살이 풀이었죠.”
야드는 아바스엘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래. 우리가 찾는 게 이 안에 있다. 그런데 신을 죽일 수 있다는 대단한 식물이 썩지 않고 살아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생명력이 필요할까?”
“설마… 이 거대한 산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이유가 그 겨우살이가 이 산의 모든 영양분을 잡아먹고 있어서란 말입니까?”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대체로 맞아. 때문에 이 안의 막대한 마력도 미스텔에 빨아 먹혀서 함정이 있어도 대부분 무용지물이 되었을 거야.”
물론 확신을 가질 순 없었다.
유안도 함정이 되살아나거나 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으니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잠깐. 그럼 저희도 이곳에 있으면 생명력이 빨리는 것 아닙니까?”
야드의 지적에 클리오는 사색이 되었다.
“다, 당장 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바스엘은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한 1년쯤 이곳에 있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며칠은 괜찮아.”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가던 아바스엘은 멈춰 서고 랜턴으로 벽면을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야드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미간을 좁히며 벽을 더듬었다.
“아니, 주군께서 120계단쯤 내려간 후에 오른쪽 벽면을 잘 찾아보면 지름길이 있다고 하셨거든.”
정확히는 신전 중심부에서 입구로 나가는 비밀 통로라 이곳에선 열리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지름길을 찾지 못하면 사흘은 어두운 미로를 통과해야 했다.
함정이 없는 대신 미로가 함정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 이거 안 되겠네.”
지름길로 통하는 입구는 발견했다.
하지만 통로 안에서 여는 건 가능해도 밖에서 여는 건 불가능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지금으로서는 무리였다.
“그럼 미로를 통과해야 하는 겁니까?”
야드의 걱정 어린 물음에 아바스엘은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괜찮다. 주군께서 미로 지도와 길을 알려 주셨으니까.”
권말 설정집 부록에 있는 지도를 유안이 그대로 따라 그린 지도였다.
함정의 위치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아바스엘의 당당한 미소에 야드는 혹시 모르니 따로 지난 길을 지도로 작성해 보겠다고 메모장을 꺼냈다.
양피지로 되어 있어 쉽게 상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길 안내는 내가 계속하지.”
아바스엘은 앞장서며 당당히 어둠의 미로 속으로 향했다.
* * *
“으아! 죽는 줄 알았네!”
페브리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전신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연인을 업고 해일같이 쏟아지는 눈사태를 피해 달렸더니 완전히 눈사람처럼 되어있었다.
“으으, 추워.”
로우어펠도 덜덜 떨며 전신의 눈을 털어냈다. 짧은 시간 동안 거의 산을 횡단하다시피 했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눈사태를 피해 달리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거의 한 바퀴 돈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페브리는 주변의 눈으로 바람막을 만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눈사태는 보통 눈사태가 아닌 거 같아.”
“그럼?”
“비약이 섞인 추측이지만, 그 지질학자가 뭔가 해서 눈사태가 일어난 게 아닐까?”
페브리의 추측에 로우어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마력 없는 일반인이?”
“그러니까 비약이 섞여 있다고 했잖아. 그래도 내 추측이 맞는다면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당연히 궁금하지! 당장 가자!”
바로 아바스엘의 뒤를 쫓으려는 로우어펠을 페브리가 말렸다.
“기다려. 지금은 위험해. 눈 속 어디에 크레바스가 있는지도 모르잖아. 사방에 깔린 눈이 밤이 돼서 얼어붙으면 움직이자.”
지금 상황이면 길잡이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었다.
* * *
어두컴컴한 미로 속에서 아바스엘은 지도를 보며 망설임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멈춰 서더니 등산용 지팡이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타악-!
쿠르르…! 콰직!
바닥의 일부가 무너지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거 빠지면 죽겠습니다.”
“그러게요.”
야드와 클리오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바스엘이 이끄는 대로 무너지지 않은 바닥을 밟아가며 구덩이를 넘어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걷다가 이번에는 벽면을 쳤다.
탁! 탁! 탁!
덜컥! 드르르…!
계속 치다 보니 태엽 감기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이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광-!
“윽, 흙먼지!”
야드는 간단한 바람 마법으로 먼지를 가라앉혔다.
일행들은 떨어져 내린 무거운 돌덩이 위로 올라타며 그대로 전진했다.
“이야, 미로 내부 지도가 진짜였군요.”
이쯤 되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길은 몰라도 적어도 함정에 대한 정보는 진짜였다.
“에헴! 주군을 믿어라.”
야드의 감탄에 아바스엘은 으스대며 앞장서 안내를 계속했다.
* * *
“그 지질학자는 이걸 찾고 있었던 건가.”
거대한 신전 입구 앞에 선 로우어펠은 흥분했다.
“봐봐! 잊혀진 신전이 틀림없다니까!”
“아니, 꼭 그렇다는 보장은 없어. 신화시대의 유적이라면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마력이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잖아.”
페브리는 자신의 연인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녀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탐험을 좋아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분명 무언가가 마력이 흘러나오는 걸 막고 있는 게 분명해! 빨리 내려가 보자!”
로우어펠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페브리의 손을 잡고 신전 입구로 향했다.
“진정해.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내가 앞장설게.”
페브리는 마법으로 빛 구체를 만들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빠르게 계단의 끝에 내려온 그들은 어둠 속 거대한 미로에 도달했다.
세 갈래의 갈림길에서 바닥을 살핀 페브리는 색이 다른 흙가루를 발견했다.
아주 적었지만 아마 신발 틈새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메마른 유적지에서 약간의 물기가 있는 흙이라. 이곳으로 향했나 보네.”
페브리는 아바스엘이 남긴 미세한 흔적을 쫓았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굉장히 신중했다.
* * *
“여기가 끝이다.”
지하로 계속 파고들어 가는 미로의 끝에 도달했다.
아바스엘은 랜턴으로 십수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문을 비췄다.
“생각보다 빨랐네요.”
돌파하는 데 사흘은 꼬박 걸릴 것 같았는데, 막상 걸린 건 만 하루 정도였다.
“지도가 그만큼 정확했던 거지. 만약 미로의 벽화를 해석하며 움직였다면 못해도 일주일은 걸렸을 거야.”
그것도 아바스엘이 마법을 잃지 않았을 때나 그렇다.
이 비루한 육신으로 무작정 미로를 돌파하려 했다면 미로 초입에서 함정에 빠져 죽었을 터였다.
“이 문은 어떻게 엽니까?”
야드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랜턴으로 문 아래 파여 있는 틈을 비췄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미로를 돌파하면서 얻은 의미 불명의 돌조각들을 순서에 맞게 꽂아 넣었다.
신화시대의 상형 문자로 ‘만세(萬世)의 축복을 그에게’이라는 의미였다.
틈새가 메워지자 거대한 문은 스스로 열렸다.
“와아~!”
클리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초목이 우거진 언덕 위에 세워진 신전이 그들을 반겼다.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왔으니 분명 깊은 지하일 텐데, 미로 안에서의 공기가 가라앉은 묵은 냄새와 답답함이 없었다.
“마법적 이공간인가요? 아니면….”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여기 있는 것들은 신전에 가져가면 대부분 성유물로 지정받을 거야.”
아바스엘의 말에 야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클리오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성유물로 지정된다는 건 값을 매기기 힘든 보물로서 인정받는다는 의미였다.
아바스엘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야드는 그가 당연히 신전 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지만 신전으로 들어가는 계단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이름 모를 잡초를 캐냈다.
하찮아 보이는 풀을 소중히 들은 아바스엘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찾던 겨우살이 풀이다.”
지난 10년간의 지옥에서 자신을 구원할 풀이었다.
“예? 신전 안도 아니고 이런 곳에요?”
“오히려 신전 안에 있다면 이상하지. 신을 죽인 풀이 신이 거하는 곳에 모셔져 있을 순 없으니까.”
야드는 아바스엘의 말에 납득이 가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미스텔을 든 아바스엘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안에는 만물의 형상을 한 석상들이 사열하듯 길목에 나란히 서 있었다.
신화 속에서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모든 것들의 형상이었다.
그렇게 기나긴 길을 지나자 여러 갈래의 길이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오른쪽에서 다섯 번 째 길.”
그곳이 신전 중앙에 위치한 제단이 있었다.
아바스엘의 말을 따라 신전의 중앙에 다다르자 제단을 중심으로 온갖 금은보화로 가득한 공간이 나왔다.
클리오가 마른침을 삼키며 금괴에 손을 대려 하자 야드가 막았다.
“이거, 너무 노골적인 함정이네요. 이게 유안 씨가 말한 그 함정입니까?”
눈치가 빠른 야드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다. 주군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재물에 손을 대면 즉시 밖에 나열된 가고일들이 눈을 뜨고 우리를 죽이려 들 거라 하시더군.”
아바스엘의 말에 클리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주군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방금 지나온 미로를 지도로 만들 정도로 이 신전을 알고 있다면 사실일 터였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좋을 순 없었다.
아바스엘은 그런 클리오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중앙 제단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각인 펜을 들고 수십 번을 연습하고, 수백 번을 허공에 그려보고, 수천 번을 머릿속에서 떠올린 마법진을 그렸다.
그때 신전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엘, 당신이 한 겁니까?”
“아니다! 제길, 누군가 신전 안의 재물을 건드렸어!”
저 길목 너머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전 내부에 있는 모든 가고일들이 침입자를 배제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었다.
아바스엘은 다급하게 야드에게 미스텔을 건네고 마법진의 중앙에 서며 외쳤다.
“야드, 의식을 부탁한다!”
“의식을 해도 정말 죽진 않는 거겠죠?”
“주군을 믿어라.”
야드는 마법진과 연결된 소재의 자리에 서서 가방에서 활을 꺼내 시위를 걸었다. 그리고는 눈을 안대로 감아 매었다.
“저기 석상이 몰려오고 있어요!”
클리오의 외침에도 야드는 심호흡을 하며 주문을 외웠다.
“하찮은 풀이여, 이는 장난일지니, 그저 장난에 불과할지니. 만물의 축복 받은 태양의 아들을 쏘아 떨어트릴 화살이 되어라.”
야드의 마법은 주문이 필요 없는평범한 마력 화살을 만드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야드의 주문과 손에 들린 미스텔이 공명하며 작은 겨우살이가 화살로 변했다.
-갸오오오오!
수백에 달하는 석상들이 들이닥쳤다.
“으아아아! 괴물들이 왔어요!”
야드는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당겼다. 그러고는 아바스엘의 심장을 노리고 시위를 놓았다.
보이지 않음에도 정확히 아바스엘의 심장에 명중한 화살은 찬란한 태양과 같이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