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마법사와 겨우살이 풀 (3)
아바스엘은 턱턱 막히는 숨을 토해내며 걸었다.
“이만 휴식을 취하죠.”
클리오의 말에 아바스엘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다.”
지난 세 달이 가까운 시간 동안 아바스엘의 체력도 많이 좋아졌다.
그동안 한계에 가까운 운동을 하고 마법으로 회복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보통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체력과 근력이 붙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는 처참할 정도로 운동 부족이었다.
그가 아무리 체력이 좋아졌어도 험준하기로 손꼽히는 산을 오르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엘, 산행 중의 판단은 제가 내립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약을 파기하세요.”
무리한 산행은 죽음을 초래하는 법이었다.
단호한 클리오의 지시에 아바스엘은 인상을 쓰면서도 주저앉았다.
“여기 위에 앉으십쇼. 여기 마스크도 쓰시고.”
야드는 회복 마법진이 그려진 돗자리에 마석을 놓으며 자리를 권했다.
돗자리는 뛰어난 마법 각인사인 아바스엘이 마법진을 새겨놓은 마도구였다.
“그래, 고맙다.”
아바스엘은 지친 몸으로 돗자리 위에 앉고 코와 입을 완전히 밀봉하는 마스크를 썼다.
“쓰읍- 하아- 쓰읍- 하아-.”
유안의 아이디어로 제작한 산소 포집 마스크는 산소가 부족한 고산 지대에서 고산병으로 인한 저산소증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회복 마법진과 산소 포집 마스크가 허약한 그의 몸으로도 불가능한 등반을 가능하게 해줬다.
물론 회복 마법진도 과용하면 장기적으로 몸에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주기적으로 온천에 가서 부담을 줄여줘야 했다.
야드는 빠르게 안정되어 가는 아바스엘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처음에는 고산 마을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온천에 다녀왔어야 했는데, 지금은 목표 중 가장 먼 곳으로 향하고 있으니까요.”
유안의 묘사와 일치하는 일곱 곳 중 지금 향하는 곳이 고산 마을과 가장 먼 위치였기에 지금에서야 향할 수 있었다.
아바스엘의 마력을 봉인한 저주를 풀기 위해서 가야 하는데 그가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은- 쓰읍- 재활 훈련이- 하아- 쓰읍- 되었지- 하아-.”
어쩌면 마력을 잃기 전보다 체력은 더 좋아졌을지도 몰랐다.
아바스엘의 대답에 야드와 클리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엘, 그거 알아요? 그 마스크를 쓰고 말하면 되게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나도- 쓰읍- 알고 있다- 하아-.”
그도 귀가 있었다. 충분히 산소를 보충한 그는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산소를 들이마시는 건 좋지만, 너무 과용하면 과산소 혈증에 걸릴 위험이 있어 주의해야 했다.
과산소 혈증은 저산소증만큼이나 위험했기에 유안은 헤어지기 전 주의를 주고 또 주었다.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유안이 알려준 대기 성분에 따라 산소의 비중을 직접 조절할 수 있었겠지만 마도구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복잡한 사용 방법이 따라붙는 마도구는 마력을 직접 다룰 줄 알아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제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아바스엘의 재촉에 클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충분히 오버페이스입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단축되고 있으니 조바심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클리오는 단순히 지질학자인 아바스엘이 왜 조바심을 내는지, 그리고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어떻게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맞습니다. 잘하면 내일쯤 도착할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쉬죠. 오히려 지금 더 움직였다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몇 달을 허비하게 될 수도 있어요.”
야드도 한 손 보태자 아바스엘은 조바심에 입술을 깨물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두 사람의 말이 맞다. 전적으로 클리오의 의견을 따르지.”
아바스엘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 * *
앞서 걷던 페브리가 멈춰 서자 로우어펠도 덩달아 멈춰섰다.
“또 휴식이야?”
“그런 것 같아. 엘 씨는 학자에 일반인이니까 엄청난 강행군인 셈이지.”
벌써 엿새째 산을 타고 있었다.
워낙 높은 지대라 영하에 가까운 기온이 유지되는 만년설 지대를 지났다.
수많은 크레바스를 우회하며 걷고 또 걸었다.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강행군이었다.
“그럼 또 근처 수색이나 하고 올까?”
로우어펠의 제안에 페브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우리도 조심해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지형이 심상치 않아.”
그동안 아바스엘 일행의 뒤를 쫓으면서 마력이 모이기 쉬운 지형을 발견했을 때마다 수색을 해봤다.
그런 지형에는 귀한 것이 생기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하긴, 기대하고 수색했는데 죄다 꽝이긴 했지.”
하지만 그렇게 수색할 때마다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했다.
페브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로우어펠을 보며 물었다.
“우리가 수색한 곳이 여섯 곳이나 됐는데도 한 곳도 없었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응? 뭐가?”
순진한 눈으로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의 시선에 페브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자기는 지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
“내가 왜!? 말레콥 숙부님은 나보고 천재라 하셨거든!”
“그래, 내가 표현을 잘못했네. 의술과 주술 외에는 지능이 부족한 것 같아.”
“음~! 틀린 말은 아닐지도?”
순순히 인정하는 로우어펠을 보며 페브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으이구! 귀여워. 내 말은, 저 지질학자가 우리가 수색했던 곳을 이미 전부 확인해 봤을 거란 소리야. 아무래도 지질 조사가 보통 조사는 아닌 것 같아.”
“오! 그럼 혹시 발두르의 잊혀진 신전을 찾는 건가?!”
로우어펠이 모험심에 눈을 반짝이자 페브리는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럴리가 있겠어? 전설은 그냥 전설일 뿐이야. 물론 그래도 재미있는 발견을 할 것 같긴 해.”
페브리의 말에 로우어펠은 신이 났다.
“진짜? 아싸! 예정보다 시간을 더 써서 따라오길 잘했네!”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뭘 찾는 건지 기대되네.”
두 연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추측했다.
페브리는 마정석 동굴을 찾고 있을 거라 예상했고, 로우어펠은 여전히 발두르의 잊혀진 신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 * *
“여기다.”
목적지에 도착한 아바스엘은 어떠한 기감도 느낄 수 없었지만 확신했다.
그는 마력도 기감도 봉인되었지만, 수십 년간 쌓아온 지식이 있었다.
부티크에 갇혀 마법 각인 노예가 되었을 때도 수많은 마법과 논문을 독파해 온 그였다.
선택과 집중으로 좁고 깊게 연구했던 슈프림 메이지 시절과 달리 각인사로 일하기 위해선 넓은 지식이 필요했다.
부티크는 각종 마법과 연구를 구해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부티크에서 일했던 10년은 절망과 지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아바스엘에게 금지된 연구를 포함해 막대한 지식적 양분이 되어주었다.
“저 일곱 능선이 마력이 흐르는 줄기가 되고, 바위가 쐐기가 되어 마력이 고일 수밖에 없어. 게다가 해의 움직임이 절묘하게 산 정상에 가려 그림자가….”
아바스엘은 이곳이 자신이 찾던 위치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마법적 설명을 떠들어 댔지만, 야드와 클리오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엘, 흥분한 건 알겠는데 진정하세요. 설명이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야드의 말에 흥분했던 아바스엘은 심호흡을 하며 진정했다.
“그, 그렇지.”
유안이 설명한 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끝이 평평한 검은 봉우리가 보였다.
그 아래는 붉은 퇴적층이 융기되어 마치 붉은 새처럼 보였다.
아바스엘은 유안이 말한 잊혀진 신전에 들어가는 방법을 그대로 실현했다.
“마력이 가장 잘 모일 것 같은 위치에서 검은 봉우리를 바라보고 붉은 새의 머리 방향으로 쉰여섯 걸음을 간 다음에…. 야드, 이곳을 마력을 담은 삽으로 내리찍어 주겠나?”
“알겠습니다.”
야드는 가방에 매달린 삽을 들고 아바스엘이 표시한 부분을 힘껏 내리찍었다.
마력이 땅을 타고 사방으로 흐르자 아바스엘은 마석을 망치로 깨며 주문을 외웠다.
“일곱 갈래로 뻗은 나무 화살이여, 태양의 눈을 가리고, 그의 심장을 움켜쥐어라. 만물의 사랑을 약속받은 아들의 고통에 찬 울음이 울려 퍼질 때, 소외되고 어리디 어린 생명의 가지는 천 가지 업과 만 가지 죄를 이고 숨통을 꿰뚫을지어라. 그 미천한 나뭇가지는 멸망의 나팔일지어니!”
마석이 깨지며 퍼지는 마력에 아바스엘의 음성이 맞닿으며 일시적으로 세상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그러자 산 전체의 마력이 요동치며 심상치 않은 진동이 울렸다.
그 진동 소리에 평생을 산에서 살아온 클리오는 사색이 되었다.
“누, 눈사태 전조입니다! 아직 전조일 때 당장 도망쳐야 합니다!”
“괜찮다, 이곳은 입구야. 눈사태는 빗겨 갈 거다.”
“안 괜찮다고!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
클리오의 외침에 야드는 갈등했다. 클리오의 말대로라면 당장 아바스엘을 업고 뛰어야 했다.
“야드. 나를, 아니 주군을 믿어라. 모든 것이 주군의 말씀대로였다.”
아바스엘은 반쯤 광기로 번들거렸다.
인간 불신에 걸린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그가 보이는 모습은 신뢰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까웠다.
“지금이라도 바위 지대로 피해야 해요!”
“바위 지대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기다려라!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다!”
아바스엘과 클리오는 야드를 바라봤다.
“엘을 업어요!”
“클리오를 말려라! 이곳이 아니면 모두 죽는다!”
두 사람의 외침에 야드의 갈등은 깊어졌다.
“시간이 없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돼!”
급박한 상황과 재촉 속에서 야드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 *
로우어펠과 페브리는 심상치 않은 산울림에 산 정상을 바라봤다.
“저거 설마 흔들리는 거 아니지?”
“서, 설마.”
여기가 보통 산이었으면 아무리 고도가 높았어도 산 중턱에서 날짐승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무가 없다는 것은 벌레가 없다는 것이고, 벌레가 없다는 것은 그것을 먹이로 하는 새나 작은 짐승도 없다는 말이었다.
보편적으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파악할 만한 것들이 없는 탓에 그만 대응이 늦어지고 말았다.
우르르르…!
“제길! 망했다! 눈사태야!”
“빨리 도망쳐야 해!”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 산 아래로 뛰었다.
전문적인 마법사라면 모를까, 하늘을 나는 마법은 느리고 마력 소모가 극심했다.
마력을 다룰 줄 안다면 뛰는 게 더 빠르다는 건 상식이었다.
* * *
“하, 하하하….”
야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 살았다.”
클리오도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던 것을 멈춘 뒤 고개를 들었다.
“보아라! 주군께선 한 치의 틀림도 없었으니!”
아바스엘만이 눈사태로 쓸려 내려간 눈 속에 파묻혀 있었던 신전 입구 앞에서 당당히 서 있었다.
신성력까지 감도는 오래된 석조 입구를 본 야드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클리오의 외침에도 이미 늦었다는 아바스엘의 설득이 통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만이 산사태를 피해갔다.
몰아치는 눈의 해일 속에 신화 속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지듯 바로 앞에서 눈사태가 갈라진 광경은 없던 신앙심도 생길 것 같았다.
아바스엘은 마법 랜턴에 마석을 채워 넣으며 신전 입구로 앞장섰다.
“따라와라. 신화시대부터 잠들어 있던 비밀이 우리를 반길 테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