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마법사와 겨우살이 풀 (2)
로우어펠과 페브리는 등산용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수다스럽게 웃었다.
“이야, 정말 길잡이를 이렇게 빨리 구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지 뭡니까.”
“그러게요. 지금 이 시기에는 눈이 녹아 위험하다고 대부분 거절했거든요.”
4월부터 5월은 겨울에 쌓인 눈이 녹아 지반이 물러지고, 산사태가 일어나기 쉬웠다.
이 지방에 사는 이들도 이 시기에는 어지간하면 산을 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가 지나면 건조한 기후로 물러진 지반이 다시 단단해져 활동하기에는 좋아졌다.
클리오는 두 연인의 말에 저 멀리 지반 상황을 확인하며 앞서 나갔다.
“마터호른은 다른 산과 달리 풀이 자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상하게도 산 초입 부분만 나무가 자랄 뿐, 조금만 올라가도 풀 한 포기 찾기 쉽지 않았거든요.”
그게 마터호른산에서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였다.
주변의 다른 산은 나무뿌리가 서로 얽히며 지반을 단단하게 잡아주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바스엘은 유안에게서 들은 덕분에 어째서 마터호른에 나무가 자리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떠들진 않았다.
“그래도 중간 지대만 되어도 눈이 잘 안 녹아서 산사태 걱정은 없습니다.”
물론 눈사태 걱정은 해야 했다.
클리오의 설명에 페브리는 활짝 웃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저희도 온천 여행을 하는 김에 마터호른에 몇 번 오르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 등반하는 건 처음이라서 걱정했거든요.”
페브리의 말에 야드는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오~! 이 험한 산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야드가 페브리에게 묻자 로우어펠은 둘 사이에 끼어들며 대신 대답했다.
“우리는 낭만과 모험을 쫓는 탐험가라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탐험가 놀이죠. 이이가 조금 철이 없어서, 가는 여행지마다 이상한 전설을 주워듣고는 꼭 찾으러 가거든요.”
“너무해! 철이 없다니, 자기도 매번 신나서 따라오면서!”
“그럼 나도 똑같이 철이 없는 걸로 해.”
두 연인은 아웅다웅하며 장난스레 투닥거렸다.
야드는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면서도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몰리자 로우어펠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흠! 여기 마터호른산에는 태양신의 총애를 받았다는 발두르의 잊혀진 신전이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발두르 신전이라는 말에 아바스엘은 로우어펠을 바라봤다.
그 잊혀진 신전에는 아바스엘의 저주를 풀어줄 미스텔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신전에는 막대한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고 하는데 그 보물들을 찾아 부자가 되는 게 이번 여행의 목표죠!”
그의 말에 연인인 페브리는 피식 웃었다.
“그 목표는 한 번도 이뤄본 적 없잖아. 그냥 어르신의 눈을 피해 땡땡이치고 놀고 싶었으면서.”
“아니지, 그냥 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너와 함께 놀고 싶었던 거라고.”
“킥킥! 뭐래.”
서로 농담을 하던 두 사람은 아바스엘과 야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면 두 분은 이런 시기에 산을 올라가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 두 분처럼 큰 포부가 있는 건 아닌데….”
아바스엘은 최대한 자신의 친구를 흉내 내며 거짓말을 했다.
“저는 학회에서 파견 나온 지질학자입니다. 이 친구는 제 호위 겸 조수고요. 클리오가 말했듯이 이 산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연구 중이죠.”
타고난 개구쟁이에 거짓말쟁이인 위즐 백작을 어려서부터 봐온 그는 나름 능숙하게 거짓을 꾸며냈다.
이 변명은 유안이 사용하라는 변명거리였다.
발두르의 잊혀진 신전을 찾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뻔했기에 주변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저희같이 여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일이네요!”
페브리의 말에 로우어펠은 키득거리며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너와 함께 있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거든?”
“아, 이 앞의 지반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무너질 수도 있으니 우회하죠.”
클리오는 안내인답게 길 안내를 했다.
* * *
온천 마을에서 산 중턱에 위치한 고산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다.
두 연인은 클리오에게 값을 지불하고, 혹시 사흘만 더 길잡이를 해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클리오는 거절했다.
선객에 대한 의리 때문은 아니었다.
로우어펠이 제시한 금액이 많긴 했다.
하지만 고작 사흘이라면 장기고객인 아바스엘의 안내를 하는 게 더 이득이라 그랬다.
아바스엘과 야드가 지금까지 지불한 돈이면 자신이 도와야 할 고아원을 삼 개월은 더 운영할 수 있었다.
거기에 목표를 이루면 성과금을 지급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의뢰가 길어지든, 목표가 이루어지든 클리오에겐 아바스엘과 야드를 안내하는 게 이득이었다.
“이곳에는 세르파가 많습니다. 이 시기엔 아래로 내려가는 고객은 잘 받지 않지만, 위로 올라가는 고객은 받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그래, 고생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클리오는 로우어펠과 페브리를 여관까지 안내하고 아바스엘과 야드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철저한 자본주의적 논리였지만 아바스엘은 오히려 그런 태도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믿었던 이들에게 연달아 배신당해 나락의 구렁텅이에 허우적거려 본 경험이 있는 그는 사랑이나 선의 같은 건 더 이상 믿지 않았다.
“활동하기 시작하긴 좋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번에도 바로 움직이실 건가요?”
현재 시간은 오후 4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체력을 소모했기에 숙소를 잡고 다음 날 아침에 움직이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아바스엘과 야드는 곧바로 움직이길 선택했다.
“그래, 이제 조사할 곳도 한 곳뿐이니까.”
유안이 발두르의 잊혀진 신전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긴 했지만,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이 높고 넓기로 유명한 산 전역을 뒤지려면 몇 년이 걸려도 부족했다.
하지만 유안의 설명 덕분에 수색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운이 없네요. 잘했으면 일주일 만에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유안의 묘사와 일치하는 지역이 일곱 곳 정도 되었는데, 앞서 살핀 여섯 곳은 허탕이었다.
야드의 한숨에 아바스엘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완전히 운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그걸 위안 삼아야지.”
유안이 말한 특징은 모두 마력이 모이기 쉬운 지형이었기 때문에 앞서 찾은 여섯 곳 중 다섯 곳에서 극히 희귀한 마법 재료나 영약 재료를 찾을 수 있었다.
완전히 허탕은 아닌 셈이었다.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야드는 다시 가방을 들쳐 맸다.
유안이 부티크에서 받은 공간 확장 가방에 아바스엘이 경량화 마법까지 추가로 각인해 안에 든 것에 비해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바로 마을을 나서자 아바스엘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을에서 헤어진 그 부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아바스엘은 마력이 봉인당하면서 함께 기감까지 약해진 상태라 정확한 파악이 되질 않았다.
“역시 눈치채셨습니까? 처음에 여성분께 꽃을 드릴 때 마력으로 압박하는 게 무시무시하더군요. 마을까지 함께 오는 동안 계속 무서웠습니다.”
야드의 말에 아바스엘은 어이가 없었다.
오는 동안 계속해서 느끼한 말을 하며 추파를 던지길래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미친놈인가 싶었다.
혹시 어쩌면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게다가 목표도 같아. 계속 주변을 경계해 줘야겠어.”
“빨리 움직이죠. 꽤 멀어서 편도로 꼬박 일주일은 넘게 가야 할테니까요.”
길잡이인 클리오가 앞장서는 일행은 걸음을 재촉했다.
* * *
“휘유~!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지?”
로우어펠이 동의를 구하자 페브리는 아바스엘 일행의 흔적을 좇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잡이 소년도 꽤나 마력 다루는 게 능숙하지만 반쯤 무의식의 영역이고, 그 잘생긴 남자는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야.”
산기슭으로 향하는 족적만 봐도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클리오의 발자국은 보폭이 일정하고 옅으며 흐트러짐이 없는 반면, 야드의 발자국은 거의 흔적이 없었다.
이는 명백히 오랜 시간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의 흔적이었다.
“잠깐. 잘생긴 남자라니!”
로우어펠의 항의에 페브리는 놀리듯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다.
“뭐야~? 질투하는 거야?”
“흥! 질투는! 아니거든! 저런 아무에게나 추파나 날리는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한테 무슨!”
뻔히 보이는 그의 부정에 페브리는 자신의 연인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귀엽기는~! 그래도 너무 화내지 마. 아마 야드라는 사람이 내게 계속 추파를 날린 건, 자기가 질투하는 걸 내가 좋아해서 일부러 해준 걸 테니까.”
페브리의 말에 로우어펠은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그냥 자기가 너무 예뻐서 그런 게 아니고?”
“맞아!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보이던데? 꽤나 오랫동안 못 만난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 애틋한… 그런 느낌이었어. 그저 여자에게 상냥한 사람이야.”
“으음…. 뭐, 자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로우어펠은 페브리의 통찰력을 믿었다. 그녀는 그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추론가였다.
“그리고 그 피부 하얀 장년의 사내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이야. 학자가 맞는 것 같아.”
아바스엘의 발자국은 보폭이 일정하지 않고 자국이 깊으며, 바로 걷는 듯 보여도 계속해서 좌측으로 움직였다.
마력을 다룰 줄 모르고, 운동 부족에, 신체가 균형 잡히지 않은 이의 흔적이었다.
등산가들도 쉽사리 도전하지 않는 산을 타기에는 보통 각오가 필요한 게 아닐 텐데 온천 마을에서 산 중턱까지 오기까지 앓는 소리 한 번 없었다.
학자는 맞는 것 같았지만 단순한 지질 조사가 목적은 아닌 듯 보였다.
“따라가 보는 게 재미있어 보이지?”
“물론!”
두 연인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이 처음 보여줬던 손기술, 그거 ‘광대’가 사용하던 그거 맞지?”
로우어펠의 물음에 페브리는 긍정했다.
“자반 씨의 손기술과 매우 흡사해. 물론 그런 손기술이 무슨 비전 마법은 아니니 다른 사람에게 배웠거나 했을 수도 있긴 한데….”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지.”
그들의 속도로 약 세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아바스엘의 발자국을 쫓았다.
발자국이 선명한 덕분에 가장 추적하기 수월한 탓이었다.
“말레콥 숙부님의 일을 돕지 않고 땡땡이치니까 양심의 가책은 느껴지는데, 이런 재미있는 일을 빼먹을 순 없잖아?”
“후후후,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그냥 내가 겨울나무의 현자를 상대하는 위험한 임무를 하는 게 싫은 거면서.”
페브리의 지적에 로우어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자기도 같은 마음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충분히 쉬고 숙부님한테 같이 혼나주는 거다?”
“그건 싫은데? 말레콥 시숙부님은 나도 무섭다고.”
두 연인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아웅다웅했다.
경외하고 존경하는 숙부의 전사(戰死) 소식을 듣는 건 지금으로부터 보름은 더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