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그대가 봄인가 보오 (3)
왕궁 대의회실에서는 한창 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던 왕후의 폐서인을 두고 이루어진 탄핵 투표가 드디어 결말지어진다.
왕과 모든 귀족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결과를 기다렸다.
“탄핵 찬성표.”
“찬성 94표!”
상선이 표를 개봉하면 기록관이 힘차게 외쳤다.
“탄핵 반대표.”
“반대 74표!”
찬성이 앞설 때가 있는가 하면 반대가 앞설 때도 있었다.
“탄핵 찬성표.”
“찬성 112표!”
“탄핵 반대표.”
“반대 121표!”
엎치락뒤치락하던 개표의 마지막 표가 발표되자, 대의회실에 모인 귀족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왕후마마의 폐서인 탄핵 투표는 찬성 131표, 반대 133표, 기권 15표로 탄핵이 부결되었음을 공표드립니다.”
상선의 발표에 모든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이도, 탄식을 내뱉고 싶은 이도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왕후의 탄핵 논의는 끝났지만 아직 정치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치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왕의 말을 기다렸다.
담담한 모습으로 왕좌에서 탄핵이 부결되었음을 들은 왕은 천천히 일어나 입을 열었다.
“공들의 의견은 알았소. 왕후를 탄핵하기에는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오. 허나, 왕후가 제 소생이 아니라 하여 1왕자를 학대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미심쩍다 하나 왕후가 1왕자를 암살하려 하였다는 증거도 있는바!”
왕은 한 템포 쉬며 선언했다.
“짐은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연류되어 왕실의 명예를 추락시킨 왕후에게 별궁 근신을 명하며, 근신 동안 왕후로서의 직권을 회수할 것이다!”
별궁은 1왕자, 유안의 거처로 왕궁에서 가장 외지고 작은 궁이었다.
그곳에 근신시킨다는 것은 왕후에게 있어 가장 큰 모욕이었다.
“이는 짐이 근신을 풀 때까지 영구적으로 지속될 것이니 이에 이견이 있는 자, 지금 짐의 앞에 나서라.”
왕의 명령 앞에 그 어떠한 귀족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왕후의 탄핵은 전 왕국의 대사(大事)였지만 왕후의 근신은 왕실 내부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왕이 정한 왕실 내부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역모에 준하는 죄였다.
귀족파의 세력이 커졌다고는 해도 왕권은 아직 강성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소신들은 따르겠나이다!”
모든 귀족들의 대답에 왕은 다시 왕좌에 앉으며 말하였다.
“이만 의회를 파하도록 하겠소.”
왕의 폐정 선언에 귀족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왕 앞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떠나갔다.
그 모습에 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났군. 1왕자의 말대로 이제부터는 정말로 마시는 물 한 모금도 조심해야겠어.”
왕이 쓰러지는 순간 귀족파는 왕실의 다음가는 권위자인 왕후를 복권시켜 왕의 자리를 탐할 터였다.
수렴청정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였다.
“소장이 지켜 드리겠사오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호레이즌의 말에 왕은 쓰게 웃었다.
“그래, 부탁하지.”
본격적인 정치와 정쟁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 * *
“이곳입니다. 이곳에 외부인을 들인 적은 처음이군요.”
나와 일행들을 예카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지하실에 발을 들였다.
제일 뒤에서 제이드가 이계의 구멍을 닫는 술식이 그려진 석판을 마법으로 들고 따라왔다.
다섯 개의 석판에는 각각 봉인의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그거 이빌리비스크의 석판이야?”
내 물음에 제이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시는군요! 듣기로는 선대 겨울나무의 현자께서 기록의 현자께 구멍을 닫는 데 사용하겠다고 직접 받았다고 하더군요.”
“직접? 아, 시기상으로 그렇게 이상하진 않나.”
기록의 현자 이빌리비스크의 활동 시기와 이계의 구멍을 봉인한 시기는 약 6백 년 전쯤이니, 석판 원본을 받았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잠깐, 그럼 저거 세계 문화유산 아니야?
음… 내가 알 바 아닌가?
“이게 봉인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넓은 지하실 중앙에 떠 있는 거대한 구체를 올려다봤다.
일곱 개의 띠가 둘러진 봉인에서는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굉장히 춥네요.”
“아, 아르카나가 균열을 만들어놔서 그렇습니다. 일단 칠성 봉인으로 때워놓긴 했는데 역시 냉기가 흘러나오는 모양이네요.”
예카트리체는 면목 없다며 사과를 했고 나는 나비의 힘으로 냉기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이드는 봉인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석판을 세웠다.
“이제 봉인을 풀고 구멍을 닫겠습니다. 제 삶이 끝나기 전에 구멍을 닫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못했는데….”
예카트리체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눈물이 맺혔다.
“사용하세요. 좋은 날에 어울리지 않네요.”
“감사합니다. 그렇죠, 이런 날에는 웃어야죠.”
내가 손수건을 건네자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지팡이로 가볍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탕!
그러자 머리 위의 오두막이 사라지며 청명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탕!
예카트리체가 다시 한번 땅을 내리찍자 이번에는 겨울나무 숲이 소란스럽게 마력을 내뿜었다.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력들은 마치 살아 있는 실타래처럼 뭉쳤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석판과 연결되었다.
“지금부터 봉인을 푼다. 봉인을 풀고 구멍을 닫는 동안 어지러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녀의 선언에 제이드도 마법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고는 둘이 서로 주고받듯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 *****! *******!”
두 사람의 주문 소리에 다들 귀를 부여잡았다.
마치 고주파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방금 두 사람이 무슨 주문을 외운 거지?
분명 귀로는 들리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이해를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서도 제이드의 주문이 지워진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냥 인쇄 미스인가 했는데 설마… 아니, 아니겠지.
그렇게 한참을 주문을 외우자 구체에 균열이 일며 봉인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마치 세상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한 점의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할 구멍이 나타났다.
그 구멍을 응시하자 뭔가 알 수 없는 공포와 소름이 돋았다.
“운명의 실타래여! 세상을 봉합하여라!”
예카트리체의 외침과 동시에 석판에 박힌 마정석이 빛나며 술식으로 이루어진 실을 내뿜었다.
마법 술식은 이계의 구멍에 닿더니 봉합실로 꿰매듯이 구멍의 크기를 줄여갔다.
이내 구멍이 완전히 메워지자, 그곳은 언제 이계의 구멍이 있었냐는 듯이 고요했다.
“후우~! 모두 끝났습니다.”
여유롭게 구경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나와는 달리 이계의 구멍을 닫은 예카트리체와 제이드는 땀을 흘리며 힘들어했다.
소설 속에서는 제이드 혼자서 한 마법을 둘이서 하니 공간이 일그러진다거나, 구멍 속에서 괴물이 튀어나오려는 일은 없었다.
여차하면 프레시아에게 검을 뽑아 괴물을 베라고 귀띔해 놨는데. 괜한 걱정이었군.
하기야 소설 속에서도 괴물이 나오기 전에 닫아서 큰 걱정은 안 했다만 예상 이상으로 싱겁게 끝났다.
“고생했습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수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역시 나이를 먹으니 힘들군요.”
겉으로는 20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역시 100살이 넘은 사람의 말에는 무게감이 다르다.
역시 100대!
“그런 말씀 마십쇼. 스승님께선 아직 정정하십니다.”
제이드도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웃었다.
“아니, 내 평생의 숙원도 이루었으니 이제 물려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예카트리체의 말에 제이드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스승님!”
“그리 외치지 않아도 내가 네 스승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더냐.”
장난스레 웃은 그녀는 다시 한번 마력을 해방시켜 마법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차피 계승할 것이었다. 뒤틀리지 않은 원래의 운명이었어도 나는 얼마 안 있어 네게 겨울나무의 현자를 계승했을 테지.”
내가 없었다면 죽음의 운명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테니 당연한 말이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녀는 더 이상 겨울나무의 이름을 짊어지기 힘들었겠지.
“저는… 저는 아직 스승님께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제이드는 차마 스승이 건네는 마법 지팡이를 받지 못했다.
무거운 직위를 계승받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었고,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지 않고 싶어서였다.
“어리광 부리지 말거라. 너는 이미 내 가르침이 필요한 때는 오래전에 지났으니.”
“하지만….”
“아니면, 이 못난 스승의 뒤는 잇고 싶지 않은 게냐?”
“아닙니다!”
제이드의 외침에 예카트리체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스승님….”
“쿡쿡, 미안하구나. 내가 은공께 못된 것을 배운 모양이야.”
아니, 여기서 내 탓을 한다고?
“이해합니다. 놀랍게도 저도 그런 것 같거든요.”
“아니! 내가 여기 며칠이나 머물렀다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내 항의에도 두 사제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만큼 저희에게 은공의 영향력이 크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스승님의 말이 옳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안의 말과 행동은 하나하나가 충격이었으니까요.”
이번에는 키득거리며 두 사제는 날 놀렸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예카트리체는 마력이 담긴 지팡이를 제이드에게 건넸다.
“제자야,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네 스승을 믿거라, 그리고 네 스스로를 믿거라.”
지팡이를 앞에 둔 제이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지팡이를 붙잡았다.
“아직 저는 제가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스승님께서 더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말에 순간 봉인을 닫고 난 직후의 소설 속 장면이 떠오르는 듯했다.
'아직 저는 제가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스승님께서 더 이끌어 주셨으면 했습니다.'
제이드의 손에 쥐어진 마법 지팡이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하지만 저는 스승님의 믿음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보답해야 할 스승님께선 남아 계시질 않는군요.’
그는 대대로 계승하는 마법 지팡이를 쓸어 만졌다.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후회합니다. 저는 사랑했노라 말했어야 했습니다.’
마법 지팡이는 이제부터 그가 짊어질 사명을 격려하듯이, 축복하듯이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저는 겨울나무의 현자를 계승받고, 나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스승님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이 될 테니.”
‘저는 겨울나무의 현자로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이 될 테니.’
그는 각오를 다지며 새로운 사계의 현자가 되었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역대 겨울나무의 현자들이 가장 꿈꾸던 순간이었다.
제이드는 자신의 스승에게 그동안의 감사 인사를 올리고는 날 바라봤다.
“유안,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어쩌면 절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내가 부정하지 않자 그는 당신답다며 키득거렸다.
“당신이 저희의 염원을 이루어 주었고, 이 땅에는 더 이상 겨울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저의 봄인가 봅니다.”
제이드의 느끼한 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사내새끼에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은데.”
소설 속에서 프레시아에게 했던 말을 내게 할 줄은 몰랐다.
“뭐, 저도 남성분에게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건 감사 인사니 받아 주십쇼.”
제이드는 마법 지팡이를 들고 내게 겨울나무의 축복을 내렸다.
“그대가 봄인가 보오.”
이 축복은 쉽게 내려줄 수 있는 축복이 아니었다.
“이걸 내게 줘도 되는 건가? 비축한 마력 소모가 심할 텐데?”
“제가 아니었어도 스승님께서 주셨을 겁니다.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마십쇼. 저희가 받은 것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것없는 축복이니.”
아냐, 안 부담스러워. 내가 왜 부담스러워?
어차피 봉인에 들어갈 힘의 일부를 내게 몰아준 것뿐이었을 텐데.
내가 아까워하는 건 나보다는 프레시아가 받았으면 더 효율이 좋았을 축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몸뚱이는 쓰레기라 말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