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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94화 (94/214)

제94화. 그대가 봄인가 보오 (2)

제이드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바로 봉인이 있는 지하로 향했다.

오전에 유안에게서 봉인을 노린 적들의 침입이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쯤 자신의 스승은 봉인을 돌보고 있을 터였다.

제이드가 직접 아르카나의 습격을 받은 적은 없지만, 예카트리체에게 들은 것들이 있었다.

봉인으로 향하는 수십 겹의 결계를 지나 봉인이 있는 지하실의 문 앞에 선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예카트리체는 이번 습격이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말했다.

때때로 위대한 점술가가 되는 그녀인 만큼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 문을 열면 혹시 자신의 스승이 죽어 있는 것은 아닐까?

유안 일행과 함께 있을 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두려워 손이 떨렸다.

“괜찮을 거야. 유안이 대책을 만들어 놨다고 했잖아. 그래, 유안을 믿자. 스승님을 믿자.”

하지만 믿기 전에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응, 괜찮을 거야. 유안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건 용기의 물약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다.

제이드는 심호흡을 하며 아공간에서 유안이 줬던 술을 꺼내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퐁~!

술잔에 술을 따르려는 그때 지하실 문이 열렸다.

“밖에서 안 들어오고 뭐 하고….”

“앗…!”

스승과 눈이 마주친 제이드는 다급하게 술병에 마개를 닫고 아공간에 넣어버렸다.

“너….”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스승님!”

마치 없던 일인 것처럼 구는 제자를 본 예카트리체는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었다.

“축하주는 이계의 구멍을 닫고 난 다음에 함께 마시자꾸나. 지금은 균열을 봉합하는 것 좀 도와다오.”

예카트리체의 뒤에는 균열이 간 봉인이 보였다.

이전에 스승이 말했던 것보다 균열의 규모가 몇 배는 커다랬다.

이계의 구멍을 막기 위해선 밑 작업이 필요했는데 이대로라면 준비를 하기도 전에 봉인이 풀리게 생겼다.

제이드가 놀라는 것을 본 예카트리체는 쓰게 웃었다.

“이야기를 하자면 긴데, 짧게 이야기하자면 허를 찔렸단다. 어지간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최고 간부 중 하나가 숨어들어서 균열을 일으켰어.”

그녀는 스스로의 안전을 너무 우선시해 버렸다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봉인의 마정석이 결계 안으로 들어온 순간 모든 마정석이 모였음을 알아차렸기에 이제 봉인은 아무래도 좋았다.

“알겠습니다. 위에 하늘의 사슬을 덧대는 방식입니까?”

제이드가 마법 지팡이를 꺼내자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리니 간단히 칠성 봉인으로 하자꾸나.”

어차피 밑 작업을 할 시간만 벌면 된다. 완벽하게 봉인을 봉합할 필요는 없었다.

두 사제는 봉인을 중간에 두고 서로 마주 섰다. 침묵하며 봉인 마법을 사용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이드.”

“아, 먼저 말하세요.”

“아니다. 네가 먼저 하거라.”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다가 이번에는 제이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늦었지만 죄송했습니다. 제가 스승님께 마음에도 없는 심한 말을 했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속죄해야겠죠.”

그의 사과에 예카트리체는 어색하던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사과를 받아주마. …그리고 나도 미안하구나. 너를 위한다고 말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네 말을 듣고 사실은 모두 나를 위한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사과를 한 두 사제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앞선 침묵과 달리 불편한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서로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길게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쯤은 잘 알고 있었다.

“어… 유, 유안이 정령을 소환한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고 보러 가죠!”

“그, 그렇구나! 기대되는구나!”

그래도 싸운 뒤 어색함은 어쩔 수 없었다.

* * *

열심히 정령 소환 준비를 마치고 정령을 소환하려는데, 뒤에서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서쪽에는 어스름과 여명의 상징체군요.”

“동쪽에는 광명과 소생의 구절이야.”

예카트리체와 제이드는 내가 그린 소환 마법진을 반짝이는 눈으로 분석했다.

“유안 오빠! 저 주변에 설치한 마법진은 소환 마법과 상관없어 보이는데 왜 그려 넣은 건가요?”

실루아는 한술 더 떠서 내게 질문했다.

“아!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중앙의 차원 간섭 술식은….”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제가 아는 정령 소환 마법진과 상당 부분 다른데….”

실루아가 질문하자 예카트리체와 제이드도 질문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질문 공세에 나는 큰 소리가 나도록 마력을 담아 손뼉을 쳤다.

짜악-!

“시기가 늦으면 동이 틀 무렵까지 기다려야 하니 질문은 나중에 천천히 받겠습니다.”

내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번에 소환할 ‘빛의 정령’은 다른 정령과 달리 소환 시간이 꽤 중요했다.

정확히는 시간이라기보다는 해와 달이 둘 다 하늘에 위치해 있는 환경적 조건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니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주변에 설치한 마법진을 가동시켜 사방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리즈벳의 정령서에 따르면 이 소환 마법진을 빛으로 가득 메우면 빛의 정령이, 어둠으로 가득 메우면 어둠의 정령이 소환된다고 한다.

때문에 밤이 되기 직전보다 동이 튼 직후가 빛의 정령을 소환하긴 좋긴 했다.

그렇지만 빛은 마법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모두 빛 때문에 눈이 멀지 않게 주의해.”

디벳 영감이 만든 정령 감화 촉진제를 마시며 주의를 준 나는 소환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주문을 외웠다.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의 빛이여! 개벽(開闢)을 알리는 한바탕의 소란스러움이여! 때로는 내려앉는 구원이듯, 때로는 내리꽂는 심판이듯, 이 땅에 강림하여라! 광휘(光輝)의 군주여!”

내 마력을 끝없이 잡아먹으며 주변에 설치해 둔 빛을 빨아들여 주변을 칠흑 같은 어둠으로 만들었다.

하늘의 어스름한 노을도, 하늘빛의 달도, 개밥바라기 별도 빛을 잃은 어둠이 이어지길 몇 분이 지났다.

그러다 갑자기 타오를 것만 같은 광량이 소환진 중심에서 터져 나왔다.

하늘은 밤이 되어 어둡건만 주변이 대낮같이 밝아진 풍경은 마치 빛이 이 땅에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빛이 이 땅에 강림하였으니 틀린 표현은 아니리라.

사위의 빛이 점점 범위를 줄여가더니 다시 정령 소환을 하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환 마법진 위에 손바닥만 한 빛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물고기 한 마리가 허공을 헤엄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정령석을 꺼내 광휘의 군주의 관심을 끌었다.

정령석에 이끌린 빛의 정령은 빛의 물결을 일으키며 내게 다가왔다.

“가지고 싶니?”

내 물음에 빛의 정령은 날 멀뚱히 바라봤다.

전신이 빛으로 되어 있어 나를 보고 있는지 눈으로는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럼 나와 계약하자.”

내 제안에 빛의 정령은 날 탐색하듯 내 주변을 헤엄치며 빙빙 돌았다.

나는 마치 고치처럼 빛의 물결 안에 감싸졌다.

한참을 돌던 정령은 내가 마음에 든 듯 내 머리 근처를 돌더니 손으로 다가가 정령석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정령과 연결이 이어졌다.

“그렇구나, 넌 은하수를 헤엄치던 정령이구나. 네 이름은 은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계약을 마친 은하는 내 뺨에 몸을 비비더니 빛을 감추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존재감은 확실히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부르면 바로 나올 거다.

생각보다 부끄럼쟁이군.

정령 소환이 끝나자 세 명의 마법사는 눈을 반짝이며 질문 공세를 쏟아냈다.

나는 그 질문 세례에 난감해하며 말했다.

“일단 밥이나 먹읍시다. 배고프네.”

* * *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저녁 훈련을 하러 밖에 나갔다.

제이드는 이계의 구멍을 닫을 밑 작업을 하러 봉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실루아는 절대 함부로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예카트리체에게 허락을 받은 뒤, 제이드의 준비를 구경하러 따라붙었다.

그렇게 나는 예카트리체와 단둘이 남아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밑 작업을 하는 데 직접 손을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예카트리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봉인의 균열을 해결하느라 지쳤거든요. 제이드도 언제든 제 자리를 계승받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니, 이제는 믿고 맡겨야죠.”

그녀는 언제까지고 감싸고 돌 수 없다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정말이지 은공께는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드려도 부족합니다. 봉인의 마정석을 모은 것도 그렇고, 제게 인생의 깨달음을 주신 것도 그렇고… 제 운명을 비튼 것도 그렇고요.”

“죽음의 운명이 사라졌습니까?”

제이드가 들으면 기뻐하겠군.

내 물음에 예카트리체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걸쳐 있는 느낌입니다.”

“혹시 말레콥 제프리즈를 놓쳤습니까?”

독원의 마스터 중 하나인 디지즈 마스터가 살아 있다면 확실히 죽음을 회피했다 보기 힘들었다.

내 우려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공간에서 얼어붙은 시체 하나를 꺼냈다.

“은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확실하게 죽였습니다. 그를 죽인 순간 제 예지의 힘이 속삭이더군요. 이자가 제 죽음이었노라고.”

내 예상대로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원인 제공자가 제프리즈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직 병세가 미약할 때 병을 치료하면 완전히 죽음을 회피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예카트리체는 내게 작은 나무 상자를 건넸다.

“은공께서 빌려주신 귀물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내게 돌려준 상자에는 은은한 신성력을 발하는 로사리오가 담겨있었다.

내가 왕궁을 떠나기 직전 챙겼던 각종 독과 저주를 막아주는 성물이었다.

원래는 이걸 프레시아에게 들려주고 대마수 ‘철갑’을 때려잡게 시키려 했다.

그러던 와중 예카트리체가 병에 걸려 있다는 말에 그녀에게 쥐여준 게 정답이었나 보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예카트리체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를 확실히 처리했음에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글픔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아르카나의 간부들이 쳐들어왔을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줬다.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당신께선 오래전 이자의 연인을 죽였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당시에는 저도 지금처럼 온화한 성격이 아니었어서요. 적이 왔을 때는 꽤나 무자비했답니다.”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후회란 말에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과거 제프리즈의 연인을 죽인 것을 후회하는가?

아니면 과거 제프리즈를 놓쳤던 것을 후회하는가?

어쩌면 복수할 기회를 더 주지 않고, 그를 이번에 확실히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일이라 느꼈다면 행하지도 않았을 테니.”

“하지만 죄책감은 느끼는군요?”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죠?”

“아니요, 원래 인간은 여러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법입니다. 하나의 사건으로 하나의 감정만 느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죠.”

내 대답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프레시아 경에게 들었습니까?”

“예? 뭘 말입니까?”

그녀는 얼굴 살짝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 착각이었나 보네요.”

무슨 착각인지는 몰라도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감정은 자유입니다. 신경은 쓰시되 너무 매몰되지만 않으면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살면서 원한 관계에 초월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누군가의 개새끼가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예카트리체가 제프리즈의 개새끼였다면, 제프리즈는 디벳의 개새끼였다.

딸 부부를 죽인 게 디지즈 마스터, 말레콥 제프리즈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온 지 몇 개월 되지 않는 나도 이미 누군가의 개새끼일지도 모른다.

뭐, 그런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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