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그대가 봄인가 보오 (1)
내 신호에 프레시아는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나와 ‘철갑’의 목덜미 근방 외골격 틈새에 깊게 검을 박아 놓았다.
카앙-!
“키이이이이이-!!”
갑작스러운 기습에 ‘철갑’은 꼬리에서 독가스와 독액을 사방에 뿌려댔다.
‘철갑’의 무서운 점은 바로 저렇게 약간의 유효타를 먹인 순간 극독을 살포한다는 점이었다.
사방에 독이 깔리자 프레시아의 어깨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비와 람이 독가스와 독액을 막아줬다.
순수한 공기와 물이 아니어도 몸에 닿지 않게 보호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물러나겠습니다!”
프레시아가 재빠르게 ‘철갑’에게서 떨어지자 실루아가 마법 사슬로 ‘철갑’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봉쇄했다.
그사이 프레시아의 어깨에 앉아 있던 누니가 날아올라 프레시아가 박아 넣은 검 위에 내려앉았다.
“1차 뇌격!”
그러고는 내 지시에 맞춰 내 마력을 마중물 삼아 마석 한 포대를 잡아먹으며 전기를 방출했다.
우르르르…. 파지직-! 콰아아앙-!!
프레시아가 박아 넣은 철검은 에테르스틸 코팅을 한 덕분에 전도율이 극도로 높았다.
“좋아. 스턴 걸렸다! 공격해!”
내 외침에 프레시아와 길버트, 실루아의 인형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외골격 틈새에 검을 꽂기 시작했다.
검기를 다룰 줄 아는 길버트는 꽤나 깊게 꽂았지만, 실루아가 조종하는 네임드 인형은 아예 못 꽂거나 얕게 꽂는 게 전부였다.
역시 게오르, 그 영감탱이랑 비교하면 숙련도가 압도적으로 부족하군.
하기야 게오르는 한 줌의 마력도 없는 상태에서 내게 마법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프레시아가 힘들어할 정도로 인형을 조종하던 괴물이니 비교하는 게 미안한 일이다.
“키이이이이이-!!”
“스턴 풀렸다! 물러나!”
내 외침과 동시에 마비에서 풀려난 ‘철갑’이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독을 살포했다.
하지만 나비와 람의 힘으로 내 일행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못했다.
“2차 뇌격!”
얕지만 전갈이 아니라 고슴도치로 보일 정도로 꽂은 검이 많으니 괜찮겠지.
내 지시에 일행들은 귀를 막았다.
우르르르…. 파지직-! 콰아아앙-!!
누니는 1차 뇌격보다 수배는 강한 전기를 내뿜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내 피부에도 정전기처럼 따끔할 정도였으니 검으로 벌집이 된 ‘철갑’이 이번 공격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좋아! 스턴 걸렸다! 꼬리를 잘라!”
내 지시에 프레시아는 파들파들 떠는 '철갑'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강기를 두른 검으로 꼬리를 베었다.
카앙-! 카앙-! 카앙-!
틈새를 노리고 베었건만 꼬리의 외골격은 유독 단단한지 세 번이나 베어야 떨어져 나갔다.
‘철갑’의 외골격이 ‘외뿔’의 뿔과 비슷한 강도라 했으니 오히려 세 번 만에 잘라내는 게 대단했다.
“키이이이이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 떨어져나가자 ‘철갑’은 분노하며 억지로 마력을 순환해 마비를 풀려 했다.
“물러나겠습니다!”
프레시아가 다시 재빨리 물러나자 나는 마석 포대를 새로 꺼냈다.
“3차 뇌격! 이제 좀 죽어라!”
우르르르…. 파지직-! 콰아아앙-!!
“키이이이이이!!!”
같은 뇌격을 세 번이나 맞으니 ‘철갑’도 저항을 하며 도주를 시도했다.
순식간에 저 거대한 몸이 파묻힐 정도로 땅을 판 ‘철갑’은 어느 순간 땅을 파는 것을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라 제이드의 얼음에 막혀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아하하하! 내가 괜히 스턴을 건 줄 알아?”
대마수는 하나같이 감각이 뛰어나다. 프레시아 같은 초인이 아니면 가까이 접근조차 못한다.
그런 만큼 도주를 막겠다고 바로 아래 얼음막을 만들려 해봤자 금세 눈치채고 마법이 완성되는 것보다 빠르게 도주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일단 전신을 전기로 지져 마비시키고 난 다음 제이드에게 퇴로를 막을 것을 지시했다.
그게 다들 공격할 때 제이드만 공격하지 못한 이유였다.
“람아!”
-삑삑!
내 부름에 람은 ‘철갑’이 판 구덩이에 물을 가득 채웠다.
꼬르르르르…!
철갑은 갑자기 물에 빠지자 당황해서 허우적거렸다.
이대로 둬도 질식해 죽을 테지만, 그래서는 너무 오래 걸린다.
마침 구덩이에 물이 가득 차 거대한 흙탕물 웅덩이가 되었다.
순수한 물은 오히려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적당히 불순물이 섞여 있어야 감전도 잘되는 법이다.
“4차 뇌격!”
우르르르…. 파지직-! 콰아아앙-!!
“5차 뇌격!”
우르르르…. 파지직-! 콰아아앙-!!
“6차 뇌격!”
우르르르…. 파지직-! 콰아아앙-!!
나는 쉬지 않고 흙탕물 웅덩이에 뇌격을 꽂았다.
혹시 땅에 전기가 흘러나가 ‘철갑’이 데미지를 입지 않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나도 혹시 몰라서 일부러 에테르스틸을 코팅한 검으로 고슴도치를 만들어놓은 거니까.
“아이고, 힘들다. 징하게도 안 죽네.”
몸 튼튼한 걸로는 대마수 중 제일이라더니, 허명이 아니었다. ‘번개 걸음’ 같은 물몸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계속하여 뇌격을 꽂자 결국 ‘철갑’은 거꾸로 뒤집혀 흙탕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급성 마력 부족으로 쓰러졌다.
누니가 사용하는 힘의 대부분이 마석이라고 해도 전기는 아군까지 다칠 위험이 있었다.
결국 힘을 통제하는 데는 내 마력이 필요했다.
산업전기 기사가 괜히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게 아니다.
“도련님!”
프레시아는 놀라서 날 부축했고, 땅속에 얼음막을 유지하던 제이드는 봉인의 마정석을 꺼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유안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
제이드의 감이 안 잡힌다는 말은 진심일 거다.
한참 경험을 쌓은 뒤라면 모를까, 아직 겨울나무의 현자의 후계자인 그라도 누니만큼 강력한 번개를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참고로 소설 속에서 제이드는 그냥 무식하게 돌격해서 잡았다.
물론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쓰긴 했지만 프레시아와 제이드 둘 다 결국 독에 중독되어서 골골거렸었지.
“고마우면 나한테 잘해. 나는….”
나는 제이드에게 말하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 * *
눈을 뜨니 익숙한 숲이 보였다.
겨울나무의 숲에 이제 도착한 걸 보면 얼마 기절 안 했나 보네.
숲 이곳저곳이 파이고 나무가 잘려나간 것을 보면 상당한 격전이 있어 보였다.
보아하니 내게 이용당한 악마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아주 열심히 싸워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결계 안으로 침입한 간부는 넷 정도 되려나?
넷보다 숫자가 많았다면 악마는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고 손해를 최소화하려 했을 테고, 숫자가 적었다면 악마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을 거다.
그렇다면 이렇게 흔적이 크게 남지 않았을 테지.
그럼 자반, 아리사, 제프리즈, 로툴러스가 결계 안으로 들어왔나?
니벨은 내 함정 때문에 마력이 고갈했거나, 그림자 탑을 잡아 족치는 위즐 백작 때문에 아예 바스타유 산맥에 못 왔을 수도 있겠다.
뭐, 자세한 건 예카트리체에게 듣기로 하자.
“일어나셨습니까?”
날 업고 있던 길버트가 내가 정신 차린 걸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나는 길버트의 등에서 내려오며 스트레칭을 했다.
“에고고, 목이야. 누니야.”
업혀 오느라 잠을 잘못 잔 모양이었다.
뻐근한 어깨에 누니를 앉혀 놓고 미약한 저주파를 내뿜게 했다.
근육이 수축했다 풀리며 경직된 부분을 풀었다.
“다아드을 수우고오오해, 했어어어. 대애마아수우도도 다다 자잡아았으으니이… 누우니이야아, 그그마만!”
내 지시에 누니는 저주파를 멈추고 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아직 뻐근하지만 그래도 낫네. 나중에 허리에도 해야지.
“다들 수고했어. 대마수도 다 잡았으니 푹 쉬자.”
“예!”
다들 힘차게 대답하는데, 제이드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아무 일도….”
시선을 피하는 제이드를 보며 나는 장난스레 웃었다.
“네 스승님 보기 거북하구나?”
“윽!”
그는 정곡을 찔린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누구 탓인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의 등을 세게 때리며 말했다.
“비 온 다음에 땅이 굳는다고 이 참에 속에 있는 말들을 다 털어놔. 그리고 역대 겨울나무의 현자들이 하지 못했던 봉인의 마석을 직접 모았으니 네 스승님께 자랑도 하고.”
내 말에 제이드는 당황스런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제가 한 일이 뭐 있습니까. 전부 유안의 공적이죠.”
“물론 그렇지?”
나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없었으면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어도 놓쳤을 테니, 내 공적의 반은 네 거야.”
퇴로 차단이야말로 토벌 작전의 핵심이었으니 나는 없었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제이드가 없었으면 실행조차 못 했을 거다.
시작이 반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그래 안으로 들어가 봐. 마침 토벌에 사용하려던 마석도 남았고 하니, 나는 네 스승님한테 받은 정령석으로 정령 좀 소환하고 있을 테니까.”
예카트리체가 계속 나보고 필요한 게 없냐고 묻길래 정령석 남는 것 좀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내게 자루째로 건네줬다.
정령석은 어지간히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실험용으로 따로 빼놓은 게 많으니 괜찮다고 하는 걸 보고, 나는 예카트리체와 더욱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 말에 제이드는 멈칫하더니 집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령 소환은 나중에 하고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하늘을 보십쇼. 벌써 저녁 먹을 시간 아닙니까!”
산어귀로 노을이 지고 하늘은 붉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너 정령 소환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하기야 마법사라면 한 번쯤 보고 싶어 할 만했다.
“크흠! …그래서 뭐 안 됩니까?”
정곡이 찔리자 제이드는 오히려 뻔뻔하게 나왔다. 그 모습에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안 될 건 없지. 그나저나 의외네, 원하는 것도 당당히 요구하고.”
“모두 유안, 당신에게 배운 겁니다.”
“아니, 내가 뭘?”
내가 억울해하자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유안과 대화를 하다 보니 조심스러워하는 제가 왠지 바보 같아서요. 제게 술을 마시라 권할 때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준 게 아닙니까?”
그런 의미도 있긴 했다. 좋은 현상이다. 이렇게 조금씩 호구기를 벗기고 타락시켜야지.
“아닌데? 그냥 술친구나 하나 얻으려고 꼬드긴 것뿐인데?”
프레시아는 술버릇이 고약하고 길버트는 술이 너무 약했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라 나중에 실제로 먹여가며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제이드는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그것도 좋겠네요. 다만 조금 덜 독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안이 준 술은 오래 못 마실 것 같아서요.”
“좋은 술이 있으니 나중에 마시자고. 나는 밑 작업이나 하고 있을 테니 일단 네 스승님께 보고나 하고 와.”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오두막 앞 볕이 잘 드는 곳에 아바스엘의 마법 각인 펜으로 정령 소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리즈벳의 정령서를 보며 따라 그리는데 실루아가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정령을 소환할 거예요?”
프레시아와 길버트도 궁금했는지 나를 바라봤다.
“이번에 부를 정령은 말하자면 범용성이 뛰어난 정령이야.”
다르게 말하자면 사기 칠 때 아주 유용한 정령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