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91화 (91/214)

제91화. 봉인과 대마수 (13)

“아이고 뻐근해.”

나비의 힘으로 에어매트 위에서 잠을 잤는데도 허리가 뻐근했다.

아무래도 에어매트가 너무 푹신해서 그런 것 같았다.

물론 맨바닥에서 잤으면 앓는 소리가 아니라 죽는 소리를 냈을 테니 괜찮았다.

내 양옆에는 제이드와 길버트가 에어매트 위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깨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령들을 쓰다듬어 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어제는 피곤해서 일찍 잤더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고지대라 그런지 완연한 봄인데도 순간 겨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쌀쌀했다.

“오, 결계인가?”

아무도 불침번을 서고 있지 않길래 주변을 둘러보니 은밀한 결계가 쳐져 있는 게 느껴졌다.

실루아의 마술식이 아닌 걸 보니 제이드가 펼친 것 같았다.

나는 장작을 모아 누니의 힘으로 모닥불을 지피며 주머니를 확인했다.

“어? 악마가 역소환되었어?”

자느라 몰랐는데 악마와 연동된 계약서가 반쯤 뭉개져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지난밤 사이 아르카나의 간부들이 봉인을 노리고 쳐들어간 듯 했다.

뭐, 대책은 나름 세워뒀으니 예카트리체가 알아서 하겠지.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겠나.

“일어나셨습니까?”

프레시아가 천막에서 나오며 인사했다. 나는 마법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물었다.

“더 자도 되는데 나 때문에 깬 거 아니야?”

“아닙니다. 어제는 토벌에 대비한다고 훈련을 쉬어서 그런지 일찍 깨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확실히 프레시아의 훈련은 무시무시하긴 해.”

“무, 무시무시하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프레시아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모닥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나는 끓인 물로 차를 우려 그녀에게 건넸다.

“아, 차보단 커피가 좋나?”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주신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프레시아의 능숙한 사회생활에 피식 웃으며 나도 찻잔에 차를 따라 마셨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얼어붙은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모닥불로 몸을 덥히며 프레시아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일행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실루아의 활기찬 인사에 나는 따뜻한 차로 화답했다.

“유안 오빠, 어제 동굴을 분석해 봤는데 오빠의 말대로 마정석과 에테르스틸이 매장되어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안개'가 서식하던 동굴에서 거대한 두더지들이 끊임없이 마정석과 광석을 캐내고 있었다.

아마 매장량이 30톤쯤 되었던가?

만약 철광이나 구리광이었으면 채산성이 없다고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테르스틸 30톤이면 작은 나라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매장량이었다.

“다 캐내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음… 에테르스틸은 양이 많아서 일주일? 마정석은 사흘이면 다 캘 것 같아요.”

에테르스틸은 매장되어 있고 마정석은 동굴에 맺혀 있는 거니 효율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실루아는 작업을 계속해. 길버트와 프레시아를 놓고 갈 테니 암석 같은 건 검기로 베어내도록 해.”

프레시아라면 네임드 인형도 못 치우는 것을 베어낼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거다.

길버트도 검기를 다루는 연습이 될 거고.

“오빠는요?”

“나는 ‘번개 걸음’이나 잡으러 가야지.”

‘번개 걸음’의 서식지는 다섯 대마수 중 가장 넓었지만 편식이 심해서 위치를 특정하기 쉬운 편이었다.

주요 먹잇감만 찾으면 알아서 온다는 의미였으니까.

“걱정하지 마. ‘번개 걸음’은 대마수치고 약한 데다, 녀석을 잡을 때면 부를 테니까.”

잘하면 오늘 안에 ‘철갑’도 잡을 수 있을 거다.

마침 아르카나의 간부가 예카트리체가 있는 곳에 쳐들어갔으니, 그녀가 발목을 잡는 사이 빠르게 토벌을 끝내는 편이 좋았다.

만에 하나 우리가 대마수를 토벌하고 봉인의 마정석을 회수하고 있는 걸 들키면 골치 아파진다.

* * *

“정말 더럽게 싸돌아다니네. 저렇게 싸돌아다니면 안 지치나?”

나는 광학 장비로 거대한 설표인 ‘번개 걸음’을 확인하며 혀를 찼다.

소의 형태를 한 몬스터를 주로 먹는 ‘번개 걸음’의 편중된 식습관 덕분에 위치를 특정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저 때껄룩 새끼가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사냥을 마치고 식사를 할 때는 좀 가만히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한입 먹고 돌아다니며 장난치다가 또다시 사냥하고 한입만 먹고 싸돌아다니기를 반복했다.

너무 빨라서 뒤를 쫓는 건 불가능했고, 움직임을 예측해서 앞서야 했다.

내 의문에 제이드는 망원경으로 ‘번개 걸음’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대마수니까요. 솔직히 다섯 대마수 중 붉은 눈을 제외하면 가장 잡기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약해서 싸워주지도 않을 뿐더러, 저 기동력은 퇴로를 차단하기도 전에 도망쳐 버릴 겁니다.”

‘철갑’은 느리며, ‘외뿔’은 무리가 있어 인질을 잡을 수 있어 보이고, ‘안개’는 태양광이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상은 전부 반대였다.

‘철갑’은 땅속에선 미친 듯이 빠르다.

‘외뿔’의 무리는 도망치는 시간을 버는 미끼에 불과하다.

그리고 ‘안개’는 안개화 때문에 사방이 트인 공간에서 어지간하면 도망치는 걸 잡을 수가 없다.

“에이, 가장 쉬운 거겠지.”

‘번개 걸음’은 그저 발만 빠를 뿐이다. 문제는 그게 미친 듯이 빠르다는 거였지만.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서도 잡는 데 가장 오래 걸린 게 ‘번개 걸음’이었던가?

다른 대마수와 달리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정공법으로는 번번이 놓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이드의 걱정도 타당하다 할 수 있었다.

내 자신감에 제이드는 싱긋 웃었다. 그동안 실적으로 증명한 덕분인지 내 말을 신뢰했다.

“그런데 저거, 사냥하면 심장만 먹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 같은데?”

“정말이군요.”

소의 심장만 먹고 버리다니. 저 정도로 편식이 심할 줄은 몰랐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행동 패턴만 알고 있다면 행동을 유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다만 이 구역에선 불가능하겠는데, 설치한 함정을 그대로 이전시킬 수 있나?”

이미 먹잇감은 ‘번개 걸음’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두 도망쳐서 유인할 만한 미끼가 남지 않았다.

“예, 마법 함정이니 이전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어디로 옮길까요?”

나는 지도를 살피다 ‘번개 걸음’이 가장 꺼릴 만한 위치를 찾았다.

“이 협곡에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늪을 만들면 기동성이 떨어지겠지?”

늪을 벗어나기 위해 협곡 벽면을 밟는 순간, 벽면도 흘러내리면 꽤나 볼만할 거다.

‘번개 걸음’은 빠른 다리를 제외하면 그저 보통 대형 몬스터보다 조금 더 튼튼한 몬스터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함정까지 유인할 생각이십니까?”

“그건 걱정 하지 마. 짐승 새끼 하나 꿰어내는 게 뭐 어렵다고.”

나는 미리 준비해 둔 것을 꺼냈다.

“물약입니까?”

“그래. 소가 발정기 때 내는 페로몬 향수야.”

짐승은 먹잇감으로 유인하는 게 정석이었다.

나는 페로몬 향기를 묻힌 정찰 인형을 ‘번개 걸음’의 모든 영역에 보내고, 함정이 있는 곳으로 모든 먹잇감을 몰았다.

“자, 그럼 배가 고프려면 열심히 뛰어 다녀야겠지?”

개조 석궁을 꺼낸 나는 광학 장비로 ‘번개 걸음’을 겨누었다.

예민한 ‘번개 걸음’이라면 이 공격에 열심히 도망쳐 다닐 거다.

겁쟁이인 녀석이 한참 혼자 도망치는 사이, 먹잇감을 한데 몰아넣는다.

그러면 배고파진 녀석이 자연스럽게 함정 안으로 들어오는 게 작전의 개요였다.

“격발!”

누니가 마석의 마력을 삼키며 화살촉을 가속시켰고, 음속의 7배에 달하는 속도의 화살촉은 바람길을 따라 ‘번개 걸음’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번개 걸음은 외뿔과 달리 빠르고 민첩하니 쉽게 피… 어?”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번개 걸음’은 내가 날린 화살촉에 맞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화살촉을 꺼내 석궁 시위에 걸며 외쳤다.

“재장전! 격발!”

나비가 시위를 당겨 방아쇠 걸이에 걸고 누니가 다시금 구리관에 막대한 전류를 흘려보내 화살촉을 가속했다.

또 한 번 머리에 명중했고, ‘번개 걸음’은 두 번째 충격에 정신을 차렸는지 도주를 하려 했다.

명성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머리에 연달아 두 발을 맞고도 빠른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명백히 이전과는 다른 속도였다.

머리에 화살촉이 박히기 전에는 명중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지만, 지금은 잘만 하면 달리는 녀석이라도 충분히 맞힐 수 있어 보였다.

나는 뭐에 홀린 듯이 계속해서 화살촉을 꺼내 장전하고 격발했다.

그리고 두 발이 오른쪽 뒷다리에, 세 발이 갈비 부근에, 다섯 발이 전신에 골고루 맞고 마지막 한 발이 미간을 꿰뚫었다.

“어… 잡은 거야?”

“어… 그런 것 같은데요?”

움직이지 않는다. 평범한 시체 같다.

“혹시 환영 마법은 아니겠지?”

바로 어제 토벌한 ‘안개’는 물론, 20년간의 동면을 거쳐 상당히 쇠약해져 있던 ‘붉은 눈’을 잡는 데 굉장히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잡다니.

놀랍다 못해 어안이 벙벙했다.

“아닐 겁니다. 선대들의 기록에도 저 설표가 마법을 부린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나와 제이드는 믿지 못해서 눈을 깜박였다.

“이것 참, 기껏 함정을 만든 노고가 무용지물이 되었군.”

“그러게요.”

쉽게 잡았다고 좋아해야 할지,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아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 남은 건 산맥 중앙의 대마수 ‘철갑’뿐이다.

예기치 못하게 잡은 설표의 사체를 회수해 가니 프레시아에게 또 자신이 없는 사이 무리했다며 잔소리를 들었다.

억울하다!

하지만 초인이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나는 진땀을 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

‘또’라는 말에 지난날을 되돌아 봤지만 짐작 가는 점이 없었다.

그동안 딱히 무리한 적도 없는데 마치 나를 스릴 중독자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얘는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 * *

프레시아는 거대한 공동 안에 위치한 바위 뒤에 숨어서 멀찌감치 보이는 거대한 전갈을 관찰했다.

싹뚝! 싹뚝!

피륙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에 그녀는 긴장하며 검 손잡이를 잡았다.

날카로운 집게발은 사냥한 대형 몬스터의 질긴 가죽과 단단한 뼈를 케이크 자르듯 간단히 잘랐다.

거대한 전갈은 토막 난 사냥감을 입에 가져다 댔다.

프레시아는 자신의 주군에게서 들은 정보를 속으로 복기하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대마수 ‘철갑’은 다른 대마수들에 비하면 한없이 좁은 영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검강으로도 쉽게 잘리지 않는 단단한 외골격과 소량으로도 대형 몬스터를 죽이는 극독.

그리고 여차할 때 빠르게 땅을 파고 도망치는 탓에 토벌하기 쉽지 않은 괴물이었다.

그녀의 입장상 ‘외뿔’을 제외하면 그렇게 어렵게 잡은 기억이 없어 잡기 어렵다는 걸 실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난 모든 대마수 토벌은 철저한 함정과 계산을 통했기에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붉은 눈’은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유안에 의해 빈사 상태였다.

그리고 ‘안개’는 철저하게 상성 우위와 약점을 공략했다.

유일하게 힘들었던 ‘외뿔’도 유안의 화살촉이 두개골을 부순 덕분에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었다.

“정말이지, 왕자님께선 대단하시다니까.”

프레시아는 주군에 대한 신뢰감에 가슴이 충만해졌지만 동시에 걱정도 깊어만 갔다.

생일날 암살자가 올 것을 알고도 홀로 맞이한 것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호위인 그녀 없이 최강의 대마수 ‘붉은 눈’과 싸운 것까지.

그녀의 주군은 너무나 무모한 일을 자주 벌였다.

역시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

프레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어깨에 앉아 있는 주군의 정령들을 한 번씩 쓸어 만졌다.

심호흡을 하며 대마수 ‘철갑’을 주시하던 그때 멀리서 유안의 신호가 반짝였다.

토벌 작전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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