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봉인과 대마수 (12)
콰과과과광-!!
결계를 베어내고 겨울나무의 숲으로 들어온 직후 로툴러스는 예지에 가까운 초인적인 직감에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평소였으면 한 번의 휘두름에 산이 무너져 내리고 공간이 찢길 힘이었지만 숲의 영향으로 그의 검격은 원래의 위력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었다.
그럼에도 견고한 겨울나무의 현자의 마력으로 버티는 나무들을 베어내고 강철보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을 갈아엎었다.
“무슨 일입니까?!”
‘매달린 사람’은 갑작스런 공격에 놀랐지만 뒤이어 그의 감각에도 잡히는 서늘한 감각에 전력으로 기세를 끌어 올렸다.
아르카나의 간부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로툴러스의 ‘대처’가 아니었다면 결계에 발을 들인 순간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란 걸.
-아쉽군.
피어오른 흙먼지와 얼음 가루가 가라앉으며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로툴러스는 전력으로 투기를 내뿜으며 눈앞의 존재를 경계했다.
“성역이라며! 어째서 이곳에 ‘악마’가 있는 거냐!”
로툴러스가 말하는 악마는 동료인 제프리즈의 코드네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계약을 통해 소환자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흑마력을 다루는 존재, 마계라 부르는 이계의 주민.
말 그대로의 악마였다.
“어떤 미친 마법사가 자신의 성역에 악마를 파수병으로 소환해 둔다는 거야! 보이는 족족 단매에 쳐 죽여야 할 빌어먹을 흑마법사도 하지 않는 짓이라고!”
로툴러스의 분노에 비플레이오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난쟁이라도 초인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아내는 건 못할 짓이었다.
“아니, 흑마법사는 상성상 그러지 못하는 것뿐인….”
“닥쳐! 이 난쟁이 똥자루야!”
대단히 종족 차별적이고 모멸감이 느껴지는 욕지거리였지만 비플레이오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안심하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였으니 응당 먹어야 할 욕이었다.
“진정해라, ‘전차’. 여기서 내분이 일어나면 적만 좋아할 뿐이다.”
제프리즈의 말에 로툴러스는 부리를 악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적지 한 가운데 들어온 이상 임무를 마치고 빨리 도망치는 것만 생각해도 부족했다.
“열쇠는 어디서부터 사용할 수 있지?”
로툴러스의 물음에 ‘매달린 사람’은 더 깊이 후드를 눌러쓰며 대답했다.
“결계에 들어온 이상 이곳에서도 사용은 가능합니다.”
“사용‘은’ 이라.”
그저 사용만 해서는 목표를 이뤘다 할 수 없다.
열쇠는 봉인의 거리에 비례해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 거리라면 길어야 사흘을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이번 임무의 최저 목표는 겨울나무의 현자 예카트리체를 3년 이상 바스타유 산맥에 묶어두는 거였으니 적어도 숲 중앙 가까이는 가야했다.
“결계의 압박을 받으며 악마를 뚫고 전진해야 하는군.”
악마는 본체가 차원을 넘을 수 없다.
만약 차원을 넘을 만한 짓을 할 수 있는 악마가 있다면 그건 신위를 지닌 마왕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저 악마가 얼마큼 가치 있는 재물을 받았는지에 따라 낼 수 있는 힘이 달라졌다.
하지만 머리의 뿔과 등의 박쥐 날개를 제외하면 인간의 형상을 한 모습과 척 봐도 느껴지는 풍격은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급이었다.
악마는 아르카나의 간부들을 값을 매기듯 품평했다.
-으흠, 초인과 그에 버금가는 가치의 침입자 셋이라. 아무래도 밑지는 계약을 했군.
악마의 계약은 선 입금으로 ‘원혼이 담긴 마정석’을 받고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를 ‘모두’ 처리하면 추가로 과거 대악마를 소환하는 데 쓰였던 ‘어린양의 두개골’과 침입자의 영육(靈肉)을 받기로 했다.
-큭큭큭, 그 순진한 여인은 아닐 테고… 누가 설계한 계약인지 모르지만 영악해.
‘원혼이 담긴 마정석’은 고위 귀족급 악마를 소환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순도 높았지만, 침입자를 모두 죽일 정도의 힘을 내기에는 부족했다.
차라리 마정석이 아니라 ‘어린양의 두개골’을 받았다면 모두 죽이고도 넘칠 힘을 끌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약자는 영악하게도 귀물을 쉽게 넘길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악마는 아쉽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약자가 대단히 똑똑한 녀석이라 생각했다.
필요 이상의 힘을 악마에게 주면 필연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숙련된 악마 소환사도 깨닫지 못하는 녀석들이 많은데 유능하다.
-좋아. 그래도 영육은 죽인 만큼 가져갈 수 있으니 손해를 보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군.
아마 전부는 죽일 순 없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전부 죽이지 못할 것도 없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힘이 허락하는 걸 느낀 악마는 계약서를 작성한 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큭큭큭, 재미있겠어.
악마가 움직임과 동시에 로툴러스도 움직였다.
쾅! 쾅! 콰과과광-!
순간적으로 수십 개의 잔상이 격돌하며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툴러스의 강기와 악마의 검은 마력이 부딪칠 때마다 땅이 패고 나무가 쓰러졌다.
‘매달린 사람’은 각종 보조 마법을 로툴러스에게 걸어 최대한 로툴러스가 결계의 힘을 이겨내고 제대로 된 컨디션으로 움직일 수 있게 도왔다.
동시에 제프리즈는 주술로 악마가 사방에 흩뿌리는 부정한 기운을 억제하고 통제했다.
보조 마법으로 로툴러스의 힘을 되찾지 못하는 것보다 부정한 힘이 컨디션을 좀먹는 게 더 위협적이었다.
비플레이오드 또한 놀진 않았다. 간간히 로툴러스를 보조하는 두 사람을 노리고 날아든 흑마법을 망치로 깨부수고, 신성 마술이 새겨진 쇠구슬을 망치로 후려쳐 날렸다.
깡-! 깡-!
악마로서는 로툴러스의 검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간간히 치명적인 기운이 담긴 쇠구슬이 날아오니,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쉽지 않아.
악마는 흑마법 화살로 로툴러스의 배후를 공격하는 동시에 흑마력으로 만든 손톱으로 눈을 파내려 뻗었다.
하지만 신성력이 담긴 쇠구슬이 날아와 손톱을 부수자 로툴러스는 보지도 않고 검으로 등 뒤의 마법 화살을 베어내고 주먹으로 악마의 안면을 후려쳤다.
-정말로 이번 계약은 쉽지 않아!
악마는 계속해서 손해라고 중얼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으윽!”
로툴러스는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악마가 뒤로 넘어가며 발톱으로 옆구리를 베어낸 것이다.
옷 아래 입은 경갑 틈새로 베인 얕은 상처였지만 피해는 심각했다.
상처를 통해 직접적으로 부정한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제아무리 제프리즈가 사방에 퍼진 부정한 기운을 통제한다고 해도 몸에 직접 주입하면 답이 없었다.
-큭큭큭, 머리가 박살 나는 건 유쾌하지 않아.
악마는 완전히 뭉개진 얼굴을 복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로툴러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흑마력으로 손톱의 날을 세워 로툴러스의 목을 노렸다.
로툴러스는 검으로 손톱을 쳐냈다.
이번에는 심장을, 머리를, 옆구리를 오른쪽 다리를 노리고 손톱을 휘둘렀다.
폭풍같이 몰아치는 공격에 로툴러스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며 쳐냈다.
옆구리의 상처에서 퍼지는 부정한 기운이 혈맥을 따라 퍼져나가며 서서히 전신을 좀먹어 갔다.
그의 오색찬란한 깃털이 흉터처럼 검게 물들어 갔다.
최대한 마력으로 몰아내려 했지만 몰아치는 공격을 막느라 견디는 것이 고작이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그 탓에 공격을 몰아치는 악마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이런! 안 돼!”
계속해서 로툴러스를 몰아치던 악마의 목적은 앵무새 수인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그를 보조하던 두 사람이었다.
로툴러스 앞의 악마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갑자기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을 지키며 악마를 견제하던 비플레이오드는 악마를 향해 힘껏 망치를 내리쳤다.
하지만 계속해서 날리던 쇠구슬과 달리 망치에는 신성력이 담겨 있지 않았다.
-큭큭큭, 멍청한 난쟁이. 제 것이 아닌 하찮은 재주가 떨어졌나?
계속해서 날리던 신성력이 담긴 구슬은 비플레이오드가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
악마는 둘로 갈라지며 비플레이오드의 망치를 피하는 동시에 제프리즈와 ‘매달린 사람’을 노렸다.
로툴러스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둘 다 구할 순 없다.
비플레이오드는 둘 중 누구를 구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서는 겨울나무의 현자의 몸에 심어둔 병을 악화시킬 수 있는 제프리즈를 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눈앞의 악마를 쓰러트린다 하더라도 전멸을 못 피한다.
선택을 마치자 난쟁이의 움직임은 과감하고 빨랐다.
거대한 망치가 갈라진 악마 중 하나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거대한 강기가 둘러진 망치는 초인이라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마력이었지만, 동시에 초인이라도 내기 힘든 너무나 강대한 근력이 담겨져 있었다.
망치가 분열된 악마의 머리와 온몸을 짓눌러 터트릴 때, 다른 분열된 악마가 ‘매달린 사람’의 가슴에 손톱을 박아 넣고 심장을 취했다.
-으흠, 달콤한… 아니?! 네놈! 가짜였나!
“흐흐…! 그럼, 쿨럭! 이런 위험한 곳에 진짜 몸으로 왔겠습니까?”
악마는 분노하여 ‘매달린 사람’의 가짜 몸, 분신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분신에 담겨 있던 영혼의 파편과 마력을 들이켰다.
-아아, 이번 계약은 정말로 수지가 맞지 않아.
힘을 거의 다한 악마는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 위로 거대한 강기 다발이 쏟아져 내렸다.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악마를 보며 로툴러스는 분노했다.
“이 망할 새끼가 약해빠진 분신으로 때워?! 어쩐지 열쇠를 사용할 줄 안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정확히는 같은 간부인 ‘매달린 사람’에 대한 분노였다.
로툴러스는 그저 실력을 숨겼다는 데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실제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분신을 만들고 장거리 운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법 실력이 뛰어남에도 모든 희생을 아리사에게 떠넘겼다는 점.
그리고 이 자리에 소극적이었던 ‘매달린 사람’보다 아리사가 있었으면 훨씬 전투가 수월했을 거라는 점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 왜곡 공간 속에서 마법적 부담감을 분산시킬 수만 있었어도 결계 안으로 여섯 명이 전부 들어왔으리라.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감정에 살기를 내뿜었다.
용병인 그에게 있어 신뢰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였다.
“으아아아악!!”
그때 갑자기 제프리즈가 자신의 오른팔을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악마가 터져나가며 날카로운 파편이 튄 자리에서부터 급격히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로툴러스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과감하게 그의 오른팔을 잘라버렸다.
-큭큭큭, 고작해야 영혼 파편에 팔 하나라니 손해가 극심해. 초인의 팔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방심하던 찰나 갑자기 악마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진 듯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크윽! 피해가 너무 커.”
당초 예상대로였다면 결계까지 아무 일도 없이 들어와 은밀히 접근한 다음, 겨울나무의 현자와 전투만을 벌였어야 했다.
하지만 예카트리체와 마주하기도 전에 여섯 명 중 세 명이 탈락하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하늘에서 방대한 마력이 고고히 내려앉으며 세 사람을 무겁게 짓눌렀다.
마력의 존재만으로도 전신이 얼어붙을 것 같은 감각에 전신을 떨 수밖에 없었다.
절로 숙여지는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리자 하늘에서 아름다운 미녀가 내려왔다.
“이번에 숨어든. 쥐새끼들은. 영 써먹지 못할… 것들이군. 하찮은 버러지들. 같으니라고.”
무언가 어색한 톤으로 입을 여는 예카트리체를 보며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연기하는 것 같은 말과는 다르게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존재를 지워버릴 듯한 압력은 진짜였다.
그녀의 앞에선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영원히, 크흠! 바, 박제해서 시, 실험 재료로… 에휴, 맞지 않는 연기는 그만하죠.”
머리를 쓸어 넘긴 예카트리체는 진심을 담아 살기를 담은 마력을 방출했다.
“경고컨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멀쩡히 살아서 나가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위대한 현자의 땅에 강림한 현자는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마법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힘겹게 일어나 싸울 준비를 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 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