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89화 (89/214)

제89화. 봉인과 대마수 (11)

차라리 함정에서 나온 직후였으면 이렇게 긴장을 풀지 않았을 거다.

사람의 감각을 농락하는 수많은 함정들을 헤치고 나왔으니 당연히 밖에 나오자마자 공격할 것 정도는 예상했었다.

아르카나의 간부들은 제대로 나왔다는 확신을 갖고 더 이상 공격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까지 1분의 시간을 가졌다.

무려 1분이었다.

골렘이 갑자기 솟아나와 공격을 한 타이밍은 모든 행동과 심리를 예측하다 못해 마치 이 순간에 긴장을 풀도록 유도한 것만 같았다.

“누가 만든 함정인지 몰라도 정말 최악이군.”

로툴러스는 있는 힘껏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골렘을 베어내며 중얼거렸다.

왜곡된 공간 속에서, 마찬가지로 공간과 함께 왜곡된 시간을 긴장 속에서 보낸 그들이 찰나의 순간 긴장을 푸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단련한 사람이라도 수십 시간 동안 산소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공간에서 막대한 체력과 마력을 소모했으니 휴식이 필요했다.

만약 이 함정을 설계한 사람이 아르카나에 들어온다면 ‘아르카나 15, 악마’의 칭호는 말레콥 제프리즈가 아니라 그자에게 주어야만 하리라.

그들은 계속해서 솟아나는 골렘들을 파괴하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 부상자가 있으니 자리를 피하지.”

제프리즈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제안했고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그 누구도 이 저주받을 함정의 입구이자 출구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내 시간 감각으로는 왜곡된 공간에서 사흘은 꼬박 있었는데 아직도 저 빌어먹을 우박이 내려치는군.”

자반을 업으며 하는 비플레이오드의 말에 제프리즈가 대답했다.

“마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만, 공간학의 아버지이자 ‘기하의 현자’ 에슐론이 말하길, 공간과 시간은 하나라 공간이 왜곡되면 시간 또한 왜곡된다 하였다.”

제프리즈의 말에 다들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바라봤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 빌어먹을 함정 속에서 사흘을 보냈다고 밖의 시간도 사흘이 지나갔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거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

비플레이오드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으로 제프리즈의 말을 깨달았다.

온갖 마법과 신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오래 사는 난쟁이가, 그것도 아르카나의 간부씩이나 되는 이가 그런 경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자리를 피한 그들은 자반과 아리사의 상태를 확인했다.

“심각하군.”

의원이자 주술사인 제프리즈는 두 사람을 치료하며 혀를 찼다.

회복력이 뛰어난 아리사는 몰라도 자반은 상당한 중상이었다.

“광대는 여기 두고 가야겠군. 데려가 봤자 방해가 될 테니.”

로툴러스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곳에 두고 간다는 건 알아서 목숨을 챙겨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고작 부상 정도로 바스타유 산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간부로서 실격이었으니 죽어도 상관없다 여겼다.

“죽음도 마찬가지로 두고 가야 한다.”

제프리즈의 판단에 로툴러스는 인상을 썼다.

“죽음의 곧 부상은 회복할 거다. 지금도 신성 마법으로 치료한 것처럼 상처가 아물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

로툴러스의 반박에 제프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력이 완전히 고갈해 탈진했어. 이래서는 회복하는 데 며칠 걸릴 거다.”

가뜩이나 왜곡된 공간 속에서 가장 많이 희생하고 마력을 사용한 게 아리사였다.

그런 와중에 심각한 중상을 치료하느라 부족한 마력을 소모했으니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쯧, 입이 쓰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는 가치가 없다.

위험한 임무에 있어서 짐 덩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겨울나무의 현자가 지키는 봉인에 균열을 만드는 임무를 맡은 이상 그들은 죽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싸우게 될 거라 예상했던 결계에도 도착 못 하고 두 명이나 낙오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상하군. 겨울나무의 현자는 계승하는 마력 탓인지 대대로 느긋한 녀석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과격한 행보라니….”

비플레이오드의 중얼거림에 로툴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힘. 유일한 마법사인 죽음이 당해서 ‘열쇠’를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의 목적에는 균열을 만들 열쇠라는 마법 지팡이가 필요했다.

“아, 그건 걱정 마시죠. 사용 방법이 어렵지 않아서 저도 사용할 줄 압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아르카나 12, 매달린 사람’의 말에 로툴러스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별것 아니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악마’나 ‘힘’도 방법만 알면 사용이 가능할 겁니다. 두 사람도 어느 정도 마법을 익혔으니까요.”

이 자리에 모인 간부 중 마법을 익히지 않은 건 ‘아르카나 07, 전차’ 로툴러스뿐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리사가 깨어나면 ‘매달린 사람’이 열쇠를 인도받고, 혹시 모르니 방법을 공유해라.”

“알겠습니다.”

임무는 자연스럽게 속행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병이 든 예카트리체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제프리즈가 있었으니 저 미친 듯이 몰아치는 우박을 뚫고 지나가는 것보다는 전진하는 게 수월해 보였다.

어리석게도 그렇게 보였다.

* * *

제이드와 길버트가 열심히 ‘안개’의 사체를 정리하는 사이 실루아는 동굴 안으로 두더지형 인형, 땅굴 시리즈를 보내 마정석과 에테르스틸을 캐내기 시작했다.

“에테르스틸 기대되네요! 그거로도 오빠 인형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실루아의 말에 나는 프레시아와 천막을 설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전용 인형에 그런 고급 재료를 써주면 나야 좋았다.

어지간한 설비로는 다룰 수 없는 게 에테르스틸이었지만 게오르의 공방 설비가 있다면 충분히 정제할 수 있었다.

“그거 좋을 것 같네. 아다만티움이랑 미스릴 광맥도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그것도 사용하자.”

“정말요? 와아! 미스릴! 아다만티움!”

아다만티움을 뼈대로, 에테르스틸을 근섬유로, 미스릴을 마력회로로 사용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희귀 금속을 입에 담자 제이드도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저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필요하다면 써야지.”

“오! 감사합니다!”

나는 아직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금속으로 생색을 냈고 제이드도 당장이라도 금속을 받은 듯 해맑게 기뻐했다.

“자, 다들 오늘 수고했고 내일은 ‘번개 걸음’을 잡으러 움직일 테니 푹 쉬어 둬.”

‘번개 걸음’은 굉장히 빨라 정면 승부를 벌이기 까다로운 몬스터였지만 의외로 사냥하기는 다섯 대마수 중 가장 쉬웠다.

함정을 파놓고 기습하면 일격에도 죽일 수 있는 게 ‘번개 걸음’이었다.

문제는 산맥 중앙의 대마수, ‘철갑’이다.

그 독전갈은 ‘외뿔’의 뿔과 비슷할 정도로 외피가 단단한 데다 사방에 독을 뿌려대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여차할 때면 땅을 파고 도망치기 때문에 도주를 막기도 쉽지 않다.

소설 속에서는 무식하게 독을 해독해 가며 프레시아가 정면승부를 벌였기에 그 방법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당장 생각나는 사냥 방법은 두 가지인데 어느 쪽으로 해야 할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프레시아는 마지막 지주 핀을 땅에 박고 훈련용 검을 든 뒤 길버트를 불렀다.

“도련님, 그럼 저희는 훈련 겸 주변 몬스터를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어, 이제 완연한 봄이라 몬스터가 날뛰지 않으니 적당히 해.”

피의 봄이라 불리는 것도 막 겨울이 끝나는 초봄에나 그랬다.

지금처럼 초목이 자라나고 초식동물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자생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먹이사슬이 안정되었다.

애초에 피의 봄도 몬스터가 마력을 다루기에 먹이사슬 하위의 동물들보다 훨씬 일찍 동면에서 깨어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처음 이계의 구멍을 봉인한 당시의 겨울나무의 현자가 의도한 바였지만 말이다.

그 당시의 겨울나무의 현자는 몬스터가 너무 과하게 불어나는 것을 경계해 몬스터끼리 서로 상잔하게 만들려 했다.

그 계획은 성공적이었지만, 지나치게 성공해서 인가 근처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먹이를 찾아 내려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 주의하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프레시아와 길버트를 배웅하고 나는 천막 안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에고고, 힘들다”

그나저나 아직 겨울나무 숲의 결계가 뚫렸다는 신호가 오지 않은 걸 보면 아르카나의 간부들이 바스타유 산맥에 도착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르카나의 간부씩이나 돼서 아직도 결계를 뚫지 못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네임드 간부가 그렇게 무능하진 않을 테지.

결계 밖에 설치한 함정이라 봐야 ‘진창’ 외에는 별것 없기도 했고, ‘진창’에 걸려서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해도 간부 정도쯤 되면 금방 뚫고 들어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쳇, 그럼 괜히 우박으로 마석만 낭비한 건가? 쳐들어올 거라고 하길래 숨어서 집결 중인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나 보네.”

숨어 있는 녀석들의 행동을 강제시키려고 한 우박이었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뭐, 진짜는 결계에 들어가야 발동하니까 언제 쳐들어오든 상관없었다.

아예 봉인의 마석을 다 모으고 이계의 구멍을 완전히 닫아버린 다음 아르카나가 뒷북치며 쳐들어오는 꼴이 더 재미있을 테니.

“아니, 그게 더 좋겠는데?”

나는 혼자 키득거리다 잠에 들었다.

이 허약한 몸은 이 더럽게 넓은 땅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다했다.

거기에 ‘안개’를 사냥한다고 고생한 탓에 기절하듯 의식을 잃었다.

* * *

로툴러스는 풀 한 포기 없던 새하얀 설원을 지나 겨울나무 숲 앞에 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드디어 결계에 도착했군.”

아리사와 자반을 두고 온 그들은 신중을 기하며 전진했다.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무수히 많은 깊게 패인 자국과 눈과 얼음이 녹아 질척해진 흙탕물로 가득했다.

수천의 얼음 골렘과 사방에서 쇄도하는 마법 사슬, 그리고 이따금씩 엄습해 오는 환영을 물리치며 왔지만 처음 걸렸던 공간 왜곡 함정에 비하면 별것 없었다.

단숨에 돌파해도 괜찮았지만 신중의 신중을 기한 이유는 또다시 공간왜곡 함정에 걸려들면 아리사 없이 안전하게 빠져나올 자신이 없어서였다.

유안은 아리사 외에도 니벨까지 올 것을 감안해 시간을 계산했지만, 니벨이 임무에 참가하지 못한 탓에 굉장히 시간이 늘어났다.

“이 안에 들어가면 또 그런 함정이 있는 건 아니겠죠?”

‘매달린 사람’의 걱정에 비플레이오드는 담담히 말했다.

“이 결계 안은 겨울나무의 현자에겐 성역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다른 사계의 현자들이 와서 간곡히 부탁해도 절대 이상한 함정 따위는 설치하지 않았겠지.”

오래 사는 난쟁이의 말에 다들 안도했다.

물론 겨울나무의 숲이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발을 들이면 견딜 수 없는 혹한의 추위는 물론, 강한 마력압에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없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숲이 겨울나무의 현자를 강화시켜 주니 어쩌면 공간 왜곡 함정보다도 위험한 공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안도하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미리 대비책을 준비해 뒀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젊었던 시절 같은 임무에 종사했었던 제프리즈의 역병 주술을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돌입하지.”

로툴러스는 그동안 아껴뒀던 초인으로서의 전력을 다해 결계를 베어 틈을 만들었다.

아르카나의 간부들은 짧게 만들어진 틈 사이로 재빨리 들어갔고, 이내 소리쳤다.

“성역이라며! 이상한 함정 따위는 설치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몰랐다.

성역 따위는 제자의 자유와 은공의 부탁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었음을.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