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봉인과 대마수 (10)
거대한 박쥐, ‘안개’는 이계의 흡혈귀 중에서도 아주 머나먼 고대에 존재했던 흡혈귀종의 일종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진조(眞祖)나 시조(始祖)라 불리는 흡혈귀보다 오래된 놈이었지만 딱히 위대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건국 신화나 창세 신화에 나오는 인간 영웅은 경탄하지만, 고대의 영장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경배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게 부족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국은 진화에 갈래에서 갈라져 나와 호모사피엔스와는 완전히 별개의 종이듯, 흡혈귀에게 있어서 대마수 ‘안개’를 흡혈귀라고 부르는 건 몹시 모욕적일 수 있겠다.
그래, 분류하자면 눈앞의 박쥐는 봉인의 마석이 없었다면 한없이 가치 없는 짐승에 불과했다.
“끼에에에에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박쥐가 흡혈귀의 특성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인간처럼 두 손으로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듯, ‘안개’ 또한 태양빛에 전신이 불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쳇, 역시 이걸로는 부족한가.”
‘안개’의 표피가 불타오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뿐이었다.
그래도 무려 과거 마도팔현 중 한 사람이었던 ‘태양의 현자’의 마법이었는데 말이다.
소설 속 삽화에 그려진 술식을 복원한 마법의 한계였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기대한 만큼은 되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레시아가 검강을 두른 검으로 ‘안개’를 베었다.
태양의 힘에 정신을 못 차리던 ‘안개’는 반쯤 베이자 정신을 차리고 몸의 일부를 안개로 바꿔 프레시아의 검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프레시아의 검도 보통 검이 아닌지라 데미지를 입혔다.
“끼에에에엑-!”
상처에서 피를 흩뿌리는 거대한 박쥐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자신의 상처를 재생시켰다.
재생력이 좋은 흡혈귀라도 무한히 재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베고 또 베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재생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거다.
프레시아는 그걸 노리고 수십 개의 잔상이 보일 정도로 ‘안개’를 베어냈다.
하지만 효율이 높지 못했다.
“ -!”
‘안개’는 마력을 담아 초음파로 맞대응했다.
공기를 매질로 울려 퍼지는 음파 공격은 막는 건 극히 어려웠다.
아무리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라 해도 주변 공기의 움직임을 완벽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 마법사라면 말이다.
“나비야!”
-냐아아옹~!
바람 그 자체인 정령이라면 완벽하게 공기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공 방벽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나비가 내 마력을 끌어다 사용하며 ‘안개’를 둘러 싼 진공막을 만들어 초음파 공격을 봉쇄했다.
“이게 정령의 힘…!”
제이드는 나비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겨울나무의 현자를 계승하기 직전인 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나처럼 쉽고 간단하게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라 그렇다.
손이 두 개인 사람은 손이 네 개인 사람보다 한 번에 많이 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제이드! 실루아!”
“아! 예! 알겠습니다!”
“준비 끝났어요!”
내 부름에 두 사람은 서둘러 ‘안개’를 공격했다.
“자비로운 태양의 힘이여! 악을 심판하는 소생의 검이여!”
“영광의 시대를 비춰라! 찬란한 태양이여!”
제이드가 만들어낸 태양의 기운이 서린 화염검과 실루아의 태양 광선이 거대한 박쥐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안개’의 흡혈귀 특성상 마법이 데미지를 주기 쉬웠다.
한눈에 봐도 내 마법보다 훨씬 큰 데미지를 주고 있었다.
이게 재능 차이인가? 서글퍼지는구만.
“!!”
나비의 진공막 덕분에 ‘안개’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음, 귀가 안 아파서 좋구만.
‘안개’는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공격당하자 전신을 안개화하며 도주하려 했다.
아무리 마법에 태양의 힘을 담아 때렸다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어설프게 복원한 힘을 담은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당연히 진짜 태양이 주는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안개’의 힘은 나비가 두른 바람층을 뚫기 충분할 만큼 강했다.
아무래도 그쪽으로는 마력 배분이 적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 몸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안개로 변한 것은 명백히 실수였다.
“람아!”
-삑! 삑!
안개는 공기보다 가벼운 ‘물’이다.
기체인 수증기가 아니라 액체인 ‘물’이란 말이다.
물의 정령 앞에서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수분으로 변하다니,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람이는 안개를 포집해 고착화시키고 고정했다.
이게 내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전해야 했던 이유였다.
‘안개’는 마력을 끌어 올려 저항하려 했지만 내 마력을 마중물 삼아 마석의 마력을 끊임없이 삼키는 람이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내 마력의 대부분을 ‘안개’의 도주를 막는 데 사용했다.
제 아무리 제이드라도 사계의 현자를 계승받지 못한 지금으로선 완벽한 안개화로 도망치는 놈을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안개로 변하니 타격이 잘 안 들어갑니다!”
제대로 된 태양의 마법이 아니라 그런지 안개화한 이후로 마법 데미지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검으로 베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가 좋으니 어쩔 수 없다.
“물량빨로 때려 박아! 안개화는 마력 소모가 심할 테니 때리다 보면 알아서 안개화가 풀릴 거야!”
내 조언에 제이드는 태양의 힘이 담긴 화염검을 수십 개 만들더니 ‘안개’를 공격했다.
“!!”
안개화한 거대한 박쥐 형상이 화염검에 난도질당해 괴로워하며 발버둥 쳤다.
주력 속성도 아닌데 이 위력이라니, 역시 마법은 재능인가.
그때 ‘안개’가 땅에 흘린 자신의 피를 이용하여 수십 개의 창을 만들더니 날 공격했다.
박쥐 주제에 도망치는 걸 막는 게 나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캉! 카가가강-!
“위험하니 물러나세요!”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검기를 두른 검으로 ‘안개’의 피의 창을 쳐내며 날 지켰다.
‘외뿔’ 토벌 때와 달리 두 사람은 크게 맡은 일이 없으니 내 호위를 맡았다.
“어? 길버트, 너 검기를 만든 거야?”
내가 검기를 보며 놀라자 길버트는 씨익 웃으며 나를 노리고 몰아치는 피의 창을 베어냈다.
“헤헤, 어쩌다 보니 됐습니다!”
아직 검기의 형태가 불안정해 보이긴 했지만 검기를 만들 때까지 꽤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기쁜 오산이었다.
아무리 실버 블룸이 대단한 영약이라 해도 검기를 만든 건 순전히 길버트의 재능이었다.
역시 괜히 군신이라 불리는 괴물이 아니었군.
보통 재능 있는 기사가 어려서부터 영약을 먹어가며 단련을 해도 마흔 가까이는 되어야 만들 수 있는 게 검기였다.
그런 만큼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길버트가 검기를 만들어낸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거참, 소설 속에서도 시조의 유산을 계승하고 제이드 일행에 합류하고도 꽤 오랫동안 잡일꾼 노릇만 했는데, 벌써 검기라니.
“보다 험하게 굴려도 괜찮겠군.”
“예?!”
내 중얼거림에 길버트는 기겁했다.
마치 이보다 더 어떻게 험하게 굴릴 수 있겠냐는 듯한 눈치였다.
음, 내가 그렇게 험하게 굴렸나?
“길버트! 도련님을 지키는데 감히 한눈팔다니, 죽고 싶은 거냐?”
“아닙니다! 집중하겠습니다!”
프레시아의 살기 어린 엄한 질책에 길버트는 바짝 긴장하며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너무 그러지 마, 프레시아. 성과를 보였을 때는 칭찬과 상을 줘야 의욕을 갖고 일을 하는 법이니까.”
내 말에 프레시아는 길버트를 흘끔 보더니 말했다.
“뭐, 검기를 만든 건 확실히 훌륭한 성과입니다.”
엄한 프레시아에게서 칭찬이 나오자 긴장하던 길버트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도 일하는 중이니 잡담은 나중에 해야겠다.”
어느새 제이드와 실루아에게 두들겨맞던 ‘안개’는 안개화가 풀리며 피투성이가 되었다.
“ -!”
“으윽!”
‘안개’는 안개화가 풀린 즉시 있는 힘껏 마력을 담아 초음파를 내뿜어 댔다.
위력적인 초음파는 진공막을 찢으며 우리를 공격했다.
지금 내 마력은 대부분 ‘안개’를 붙잡아 두기 위해 물의 정령인 람이에게 보내고 있는 상태라 나비에게 마력을 보내는 게 늦어진 탓이었다.
사실 전환이 빨랐어도 언제 안개화로 도주할지 모르는 이상 나비에게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는 귀를 막으며 가능한 나비에게 마력을 보내 일행들을 보호했고,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초음파 공격에도 즉시 검과 마법을 휘두르며 물리적으로 공격했다.
“끼에에에엑-!”
‘안개’는 최후의 발악으로 초음파 공격과 동시에 자신의 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공격했다.
하지만 이내 제이드에게 날개가 찢기고 프레시아에게 목이 달아난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바로 코앞까지 날아든 피로 만들어진 바늘들은 ‘안개’가 죽자마자 마력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휘유~! 위험했네.”
나는 뺨에 묻은 ‘안개’의 피를 닦아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렇게 이 일대를 지배하던 대마수 ‘안개’의 전설은 오늘로 막을 내렸다.
“아, 흡혈귀 피는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모아둬야지.”
흡혈귀 피는 다양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다.
마법 재료는 물론, 상처를 치료하는 물약 재료나 마약성 진통제 제조, 테러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 * *
빛이 없는 칠흑 같은 공간에서 앵무새 수인은 감각에 의존하며 물었다.
“여기가 마지막인가?”
원래는 수많은 모닥불로 사방이 환한 공간이었지만 그들이 미로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불을 껐기에 어두워졌다.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낼 순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은 한 줌의 마력조차 아껴야 할 정도로 극한의 환경이었다.
때문에 아르카나의 간부들은 모두 감각에 의존하기로 합의했다.
로툴러스의 물음에 아리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득! 이 함정을 만든 새끼는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녀는 이 함정을 돌파하기 위해 모든 하위 언데드는 물론 아끼던 몇몇 고위 언데드까지 희생해야 했다.
여섯 명의 간부 중에서도 그녀의 피해가 가장 컸다.
“진짜 최악의 함정이었군.”
자반의 말에 그들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이 함정은 여러 방면에서 최악이었다.
즉사성 함정으로 보이지 않는 미로를 만든 것과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를 잡아먹는 모닥불로 알지 못하게 질식을 유도한 것은 둘째 치자.
그럼에도 이 공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을 기만하고 이간질하는 요소로 넘쳐났다.
그 요소로서 가장 최악이었던 건 아리사의 손에 들린 서른다섯 장의 종이였다.
그들은 왜곡된 공간의 틈새에 숨겨져 있던 ‘꽝! 다음 기회에’, ‘ㅋㅋㅋㅋㅋ’, ‘바보’, ‘또 속냐?’ 등 도발하는 글귀가 적힌 종이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화가 나서 바로 종이를 찢어 버렸다.
하지만 일곱 번째로 나온 종이에서 자반이 희미한 마력을 감지했다.
그들이 찢었던 것을 회수해 조사한 끝에 종이에 마력으로 적힌 것은 이곳을 나갈 힌트라는 결론을 내렸다.
힌트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이 힌트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래도 어찌어찌 끝났다.”
로툴러스는 심호흡을 하며 검에 강기를 두르고 허공을 베어냈다.
콰아아아-!
드디어 왜곡 공간에 틈이 만들어지며 원래 그들이 있던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곳으로 나왔다.
중간중간 치고나오는 감각 교란은 위험했다.
게다가 여러 환영으로 이 함정을 벗어났다고 착각해서 스스로 즉사성 함정에 발을 들였을 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혹시 이번에도 환영인가 경계했지만, 초인의 감각이 이곳은 현실이라고 말해주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악의를 맛볼 수 있는 최악의 함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긴장을 푼 순간.
퍼억!
뒤에서 따라오던 자반과 아리사가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얼음 골렘의 주먹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며 땅을 굴렀다.
“으아아아! 전투 준비!”
악의는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