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봉인과 대마수 (9)
“그 함정에 걸려들었을까요?”
내 대신 정찰 인형들을 조종하던 제이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함정? 어떤 함정?”
내 되물음에 제이드는 뭐겠냐며 날 바라봤다.
“아르카나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함정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함정? 그 함정이라면서. 진창? 금쇄진? 칠대죄? 역풍? 환각? 내가 하도 많이 함정을 깔아놔서 말이지.”
“그거 전부 다른 함정인 겁니까?”
아, 제이드는 함정의 종류까지는 모르나?
나는 함정의 설계만 하고, 제작은 예카트리체가 했다.
아무래도 제작 과정에서 제자의 도움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싸우고 난 다음이니 어색할 만도 했다.
그렇다면 함정의 내용을 아는 건 설계자인 나와 제작자인 예카트리체뿐이겠네.
그나저나 과연 현자답게 내가 생각해 낸 함정 구조를 쉽게 만들어냈다.
물론 꽤나 급조해서 만든 만큼 돌파당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전부는 아니고 패턴이 갈리지. 중복해서 깔아둔 것도 많고. 어지간해서는 어떤 함정이든 걸렸을 거야.”
아르카나가 퇴각하던 기습을 속행하던 엿 먹일 수 있게 아주 고르게 함정을 뿌려놨다.
숨어 있을 거라 예상한 위치에 잠복해 있었으면 말이다.
어쩌면 아직 바스타유 산맥에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달랑타가 물어온 정보는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으니.
그 경우에도 깔아둔 함정은 언젠가 써먹을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다.
“그럼 함정 중에는 뭐가 가장 최악입니까?”
열여덟 가지 종류의 함정을 다섯 가지 패턴으로 나누긴 했는데, 정확하게 몇 명이, 누가 걸릴지 몰라 고르게 엿을 먹일 수 있도록 만들어놨다.
“개인적으로 최악인 건 진창이겠지. 하지만 진창은 만들기 까다로워서 숫자가 적거든? 그래서 어지간히 운이 없지 않는 이상 그걸 밟을 일은 없을 거야.”
불완전한 왜곡 공간을 구성하는 것도, 그 안에 온갖 함정을 깔아두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물론 실제로 만든 건 예카트리체라서 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창은 한번 걸리면 막대한 마력 소모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잘만 하면 한 명쯤은 골로 보낼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설계한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정말로 인간의 악의란 끝이 없음을 증명하는 지독한 함정이었다.
“자자, 지금은 ‘안개’ 사냥에 집중할 때야. 안개가 활동하는 해가 지기 전까지는 위치를 파악해 둬야지.”
안개는 거대한 박쥐인 만큼 안개의 영역 중 햇빛이 들지 않는 크고 긴 동굴을 위주로 수색하는 중이었다.
소설 속 정보에 따르면 종유석이 자라는 유황 동굴에 서식 중이라 범위를 좁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예, 알겠…. 어? 이거 찾은 거 같습니다.”
제이드는 인형이 보내는 정보 속에서 안개의 흔적을 발견했다.
나와 실루아는 제이드의 옆에 붙으며 정보를 확인했다.
“맞는 거 같은데?”
“맞는 것 같아요!”
좋아, 움직일 방향이 정해졌다.
“가자! 얼음 집 버전 4.7!”
실루아는 일행을 실은 얼음 골렘을 움직였다.
* * *
유안의 함정 ‘진창’ 속에 빠진 아르카나의 간부들은 아리사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그들의 앞에는 시간 단축과 안전을 위해 아리사가 소환한 스켈레톤이 선두에서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스켈레톤의 뒤로는 아르카나의 간부들 중 가장 감각이 뛰어나고 전장 경험이 풍부한 로툴러스가 앞에 섰다.
콰직!
그때 앞에서 움직이던 스켈레톤이 무언가에 짓눌리듯 부서졌다.
“전방에 중력 함정!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초인인 로툴러스나 난쟁이인 비플레이오드라면 모를까 몸이 연약한 자반은 즉사할 함정이었다.
아리사는 그림자에서 새로운 스켈레톤을 꺼내며 경고했고, 로툴러스는 보이지 않는 함정의 크기를 가늠했다.
“마력이 느껴지는 범위로 봤을 때 여유롭게 30미터 정도는 우회해야 할 것 같군.”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새하얀 공간은 투명한 미로와 같았다.
정해진 길 외에 발을 들이는 순간 평범한 사람은 즉사할 만한 함정으로 가득했다.
그나마 곳곳에 마법으로 만들어진 모닥불이 놓여 있지 않았다면 순백의 공간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속을 헤맸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악마, 혹 이전에 있었다는 이계의 구멍을 막는 봉인에 균열을 만드는 작전에서도 이런 함정들로 가득했었나?”
로툴러스의 물음에 제프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바스타유 산맥과 결계인 겨울나무 숲 자체가 이미 천혜의 요새인데 굳이 이런 잡다하고 지독한 함정을 만들 이유가 없지 않나.”
겨울나무 숲의 보조를 받는 예카트리체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간부가 덤벼도 이기지 못할 괴물이었다.
그 오만하고 자비로운 마법사가 이런 악의 넘치는 함정을 만들 리가 없었다.
제프리즈의 설명에 자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계승한 새로운 겨울나무의 현자가 만든 함정인거 아니겠습니까?”
자반의 추측에 제프리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제자는 실력뿐만 아니라 성격도 보는 법이네. 자식이 부모를 닮듯 제자 또한 스승을 닮는 법일진대, 그녀의 제자가 이런 성격 파탄자나 만들 함정을 만들었다라….”
제프리즈가 무언가 미심쩍어 하던 그때 가장 앞을 걷던 스켈레톤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떠오르며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독연이다! 모두 숨을 참고 연기를 날려버려!”
제프리즈는 연기가 퍼지기도 전에 미세하게 느껴지는 냄새를 맡고 경고했다.
간부들은 각자의 방법대로 바람을 일으켜 연기를 막으며 재빨리 우회했다.
“냐하하하, 그래도 이번에는 스켈레톤을 안 잃었네.”
아리사가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선두의 스켈레톤이 함정을 밟고 칼날 바람에 갈려나가며 가루가 되었다.
“아하하하! 말하자마자! 역시 아기 새 양도 ‘광대’의 소질이 있어!”
자반은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아리사는 자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닥쳐! 이 느끼한 늙은이야! 쳇! 뭐, 됐어! 다 도착했으니까!”
각종 함정들을 조심하며 오긴 했지만 돌파하는 인원들의 실력이 실력이다 보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물론 가장 앞에서 함정들의 위치를 알려준 수십 구의 스켈레톤의 희생이 있긴 했다.
하지만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시간을 단축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저기를 강하게 공격하면 왜곡 공간이 찢겨나갈 거야!”
“좋아, 내가 하지.”
로툴러스는 아리사가 가리킨 부분을 향해 검강을 두른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로툴러스의 검에 공간이 찢겨나갔다.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공간으로 나올 것을 예상하며 혹시 모를 요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찢겨나간 공간은 다시 아물며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땅에 떨어진 종이를 확인하니 수려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꽝! 다음 기회에.
그 글자를 읽은 아리사는 종이를 찢으며 광분했다.
“냐하하하하! 날 농락하다니! 죽여 버리겠어!”
“진정해라! 죽음!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네가 아니냐!”
잔뼈가 굵은 용병답게 로툴러스의 외침에 살기를 흩뿌리던 아리사는 광기로 번들거리던 눈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지.”
벌써부터 왜곡된 공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리사는 가짜이거나 함정일 것도 고려해서 다음 틈새를 탐색했다.
“그런데 왠지 조금씩 숨이 차오르는 기분이군요. 점점 공기가 옅어지는 느낌이에요.”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매달린 사람’의 말에 아리사는 무언가 깨달은 듯 사색이 되었다.
“당장 불을 꺼야 해!”
아리사의 말에 난쟁이인 비플레이오드를 제외한 다른 간부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사방에 위치한 수많은 모닥불이 없으면 함정투성이의 보이지 않는 미로를 어떻게 돌파한다는 말인가?
“불은 ‘공기’를 잡아먹으며 타오른다! 불을 끄지 않으면 이 밀폐된 공간에서 질식해 죽을 거야!”
장인의 종족이라 불리는 난쟁이답게 비플레이오드는 아리사가 하려는 말을 깨닫고 외쳤다.
제아무리 강인한 초인도 숨을 쉬지 못하면 결국 죽는다.
시야를 밝혀주는 모닥불 자체가 인지의 밖에서 서서히 조여 오는 가장 지독하고 위험한 함정이었다.
아리사는 마법으로 돌풍을 일으켜 모닥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아리사의 마법은 사방에 도사린 함정들에 부딪쳐 멀리 가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3차원으로 구성된 함정은 비행 마법 또한 막았다.
“제길, 마력을 아낄 때가 아니었군.”
“전력으로 탈출한다!”
공간의 붕괴 외에도 질식의 위험이 그들을 위협해 왔다.
그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진창 속에 깊게 빠져 있었다.
* * *
예카트리체는 갑자기 아르카나의 간부들이 빠진 함정과 연결된 마법진에서 마석이 빠르게 소비되는 걸 확인했다.
그녀는 포대 자루에 든 마석을 들고 와 마석 통에 들이부었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창밖을 보며 홍차를 음미했다.
“은공이 놓고 간 술이나 마실까….”
그녀는 여전히 제자 때문에 고민이 깊었다.
* * *
우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대마수 ‘안개’가 서식하는 동굴에 도착했다.
“들어갑니까?”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부러 적이 유리한 공간에 들어가 줄 필요는 없지.”
아무래도 아르카나를 엿 먹일 작전을 구체화시키고 함정을 설계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한 탓에 작전 설명을 너무 간추려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면 프레시아가 제대로 싸울 수가 없잖아.”
내 말에 길버트는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그렇겠습니다.”
제이드는 키득거리며 가볍게 깐족거렸다.
“실수로 매장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군요.”
“그런 실수는 당신이나 하는 거겠지.”
두 사람은 서로를 흘겨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피했다.
“큭큭! 사이가 좋아 보이니 다행이네.”
내가 짓궂게 웃어 보이자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동시에 반발했다.
“아닙니다!”
“어딜 봐서요!”
그러고는 다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정말 싫어한다기보다는 라이벌쯤 여기는 듯 보여서 다행이었다.
원래 저렇게 싸우다 정이 드는 법이다.
“자자, 아직 해가 지기 전이니 다시 작전에 대해 설명해 줄게.”
동굴 같은 지형은 ‘안개’가 사용하는 초음파 공격이 사방에 부딪혀 몰아치기에 불리했다.
때문에 동굴 밖으로 끌어내 싸울 거다.
특히 ‘안개’가 서식하는 동굴은 마정석과 마법 금속 에테르스틸이 가득 매장되어 있어 마력이 담긴 초음파가 증폭되어 메아리쳤다.
소설 속에서도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그걸 모르고 갔다가 낭패를 당했었다.
다행히 소설 속의 제이드는 도망치면서 마법으로 입구를 틀어막아 ‘안개’를 놓치는 일은 없었다.
“저기에 마정석과 에테르스틸이 매장되어 있습니까?!”
내 말에 마법사인 제이드와 실루아가 관심을 보였다.
마정석이야 마력을 다루는 몬스터의 몸에 높은 확률로 있는 마석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많이 귀하진 않지만 에테르스틸은 다르다.
에테르스틸은 미스릴이나 아다만티움과 비슷할 정도로 희귀한 금속이었다.
“캐내는 건 안개를 토벌하고 난 다음이야.”
그것도 실루아의 인형이 캐고 우리는 곧장 ‘번개 걸음’을 잡으러 가야했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작전 설명이 끝나갈 때쯤 되니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박쥐형 대마수 ‘안개’가 활동하기 위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안개’가 나오자마자 나는 바로 마법을 날렸다.
“받아라, 눈뽕! 태양권!”
“끼에에에에엑!”
밝은 태양의 기운이 담긴 불덩이 앞에 고대 흡혈귀의 피를 이은 ‘안개’가 비명을 내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