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봉인과 대마수 (8)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눈 폭풍을 보며 감탄했다.
“이야, 저게 눈보라 마법이 아니라 설원 위로 우박이 떨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란 말이지?”
저 안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밖에서 보니 하늘 높이 얼음 알갱이 같은 게 떨어지고, 아래는 눈보라 치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저 광경이 고작해야 내가 예카트리체에게 조언한 1단계 대비에 불과하다는 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 얼음 알갱이 하나하나가 유안보다 커다란 얼음덩이일 겁니다.”
제이드의 첨언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이 거리에서 육안으로 보인다는 게 우박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과연, 바스타유 산맥에서 겨울나무의 현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분명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틀간 쉬지 않고 근방에 우박을 내리게 만들어 달라고만 했을 뿐인데.”
주먹만 한 얼음덩이여도 꽤나 위협적일 텐데 사람 몸뚱이 크기라니. 너무 규격외다.
사실 무리라면 반나절 정도만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예카트리체가 대수롭지 않게 고작 그거면 되냐고 되묻기에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동안 쌓아둔 마석은 넘쳐나니까요. 그래도 제 예상보다 더 과격한 걸 보면 스승님께서 실험용까지 끌어다 사용하신 모양이네요.”
제이드는 마법사란 강박적으로 마석을 쌓아두는 존재라 첨언했다.
“앞으로 이틀간은 결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겠네.”
“다행이네요.”
내가 제이드를 돌아보자 제이드는 내 시선을 피했다.
결국 이 녀석은 혼나는 게 무섭다고 자기 스승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나와버렸다.
내 시선의 의미를 느꼈는지 제이드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크흠! 저, 저도 성인입니다! 고작 며칠 외출하는 걸로 특별히 인사까지 드릴 필요는 없지 않나요? 스승님께서도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시고요.”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렇게 애새끼가 아니었는데.
“뭐, 좋아. 지금은 ‘안개’의 토벌에 집중해야 할 때니까.”
외뿔과 달리 안개는 나도 토벌에 참전해야 했다.
안전한 곳에서 관전만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필요하다면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건 다 이용하자는 주의였다. 그게 나라도 예외는 없다.
* * *
아리사는 생각했다.
“아, 죽겠구나.”
하늘을 가득 메운 얼음 덩어리는 상공 수백 미터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지 땅에 떨어질 때마다 굉음을 내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슈우우- 콰아아왕-!
“으아아아! 체념하지 마! 맞서 싸워!”
앵무새 수인 로툴러스는 자신의 깃털에 검기를 둘러 깃털째로 사방에 흩뿌렸다.
수왕류(獸王流) 비기(秘技)!
천참만륙(千斬灣陸)!
검기가 담긴 수많은 깃털이 땅에 꽂히자 땅이 융기하며 거대한 우박을 막아냈다.
콰과과과광-!
로툴러스가 일으킨 땅도 우박에 맞으며 흔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구멍이 뚫리며 허물어졌다.
“이봐, 죽음! 앞으로 이 공격이 얼마나 이어질 것 같아?”
로툴러스는 일행 중 유일하게 정통 마법사인 아리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중에 마법을 익힌 사람은 과반수가 넘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전문 분야를 보조하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아리사의 의견이 가장 믿음직스러웠다.
“냐하하하하! 얼마나 이어질 것 같냐고? 이 땅은 겨울나무의 영역이야! 겨울나무가 원한다면 몇 년이고 우박 세례는 이어질 거라고!”
아리사의 판단에 이 자리에 모인 아르카나의 간부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괜히 왔군.”
난쟁이 비플레이오드는 망치를 휘둘러 풍압으로 얼음 덩어리를 빗겨내며 한탄했다.
아무리 체력이 강한 난쟁이라도 쉬지도 않고 몇 년간 무한정 망치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선택해야 했다.
퇴각하고 다음에 다시 기회를 노리거나, 아니면 이 지옥 같은 우박을 넘어 결계로 침입하거나.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반이 말했다.
“다수결로 합시다. 작전을 실행하느냐, 이대로 퇴각하느냐.”
자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까마귀 부리 가면을 쓴 제프리즈가 말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겨울나무의 현자를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심은 병을 치료할 사람은 극히 드물겠지만 없는 것도 아니라서.”
예카트리체는 봉인을 지키느라 병을 치료할 실력의 의원을 찾는 데 시간을 들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녀의 절친한 벗인 달랑타는 아니었다.
최근 제자에게 봄꽃의 자리를 물려준 그라면 돈과 권력,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해 의원을 찾을 터였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빌어먹을 우박만 안 떨어지는 곳으로 간다면.”
“저도 동의합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군요.”
비플레이오드와 ‘매달린 사람’이 다수결에 기권하자 아리사와 로툴러스가 말했다.
“냐하하하하! 나는 이런 미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네.”
“위험한 적은 죽일 기회가 있을 때 처리해 둬야 하는 법이지.”
두 사람이 작전 결행을 선택하자 자반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이런. 기권 둘에 찬성 셋. 그럼 작전을 결행하는 걸로 결정되었군요.”
“냐하하하! 느끼한 늙은이의 의견은?”
아리사의 물음에 자반은 추위에 떨면서도 읭크를 했다.
“아기 새 양, 지금 상황에서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잖아?”
다수결로 정해진 상황에서 그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그의 말에 아리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맨날 헤실헤실 웃는 얼굴 뒤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쾌감이 일었지만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그들은 몰아치는 거대한 얼음 폭풍을 뚫고 전진했다.
초인조차 떨게 만드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몰아치는 눈 폭풍과 크레이터를 만드는 우박을 뚫고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 끝에 지옥이 있더라도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예카트리체는 난로에 장작을 더 집어넣으며 따뜻한 차를 홀짝였다.
창밖에는 그녀가 만들어낸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조용히 앨범을 꺼내 자신과 제자가 찍힌 추억을 되돌아봤다.
어제는 술에 취해 찾아온 제자의 폭언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녀는 뭐라 반박하거나 혼을 내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결국 믿어주지 못했다는 제자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화해는 어떻게 하는 거지?”
그녀는 우울함에 무릎을 감싸 안으며 고민했다.
제이드를 제자로 들이고 이렇게 크게 싸운 적은 처음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어려서부터 은둔하며 살아온 탓에 화해하는 법 따위는 잘 알지 못했다.
제이드와 싸우고 유안에게 찾아가 왜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말해줬냐고 따지기도 해봤다.
하지만 유안은 괜히 제3자가 끼어들어 봤자 관계만 어그러진다며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넘길 뿐이었다.
분명히 그저 즐기고 있을 뿐이라고 예카트리체는 확신했다.
“정말이지, 성격 나쁜 분이라니까.”
깊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결계 밖에서 마법 함정이 발동되는 것을 느꼈다.
동남쪽 136도, 2377미터 떨어진 위치였다.
마법 함정은 그녀가 아니라 대마수 ‘안개’를 토벌하러 나가는 김에 유안의 마법을 토대로 제이드가 설치했다.
결계 근방으로는 추위 때문에 몬스터는 접근하지 않았으니, 분명 아르카나의 자객들이 분명했다.
예카트리체는 적의 위치를 특정했지만 밖에 몰아치는 우박을 멈추거나 하진 않았다.
유안이 떠나기 전에 여러 경로로 분산되어 침입할 수 있으니 이틀은 반드시 유지하라 주의를 주고 갔기 때문이었다.
“퇴각이냐, 속행이냐를 두고 1시간 이내로 결정하고 행동할 거라 하시더니. 정확하네.”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지 아직 1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예카트리체는 유안이 남긴 마법진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무슨 함정이었더라?”
분명 듣기만 해도 철저한 악의가 느껴지는 함정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아! 찾았다, ‘진탕’.”
인간의 악의를 구현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독한 함정에 예카트리체는 혀를 내두르며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 * *
아르카나의 간부들은 끊임없이 폭격하는 우박을 쳐내고 사방에 비산하는 눈보라를 지나 간신히 겨울나무 현자가 만든 겨울나무 숲 근방에 도착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곳에서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로툴러스의 초인적인 방향 감각과 자반의 길 안내 덕분이었다.
특히 자반의 길 안내는 신들린 듯 했다.
그는 폭격으로 주변 지형이 실시간으로 바뀌었음에도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 최대한 짧은 길을 찾아냈다.
“아, 따뜻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초인인 로툴러스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추위로 가득했었지만, 눈보라를 헤치고 나오니 약간 훈훈한 느낌까지 들었다.
“벌써 결계 안으로 들어온 건가?”
결계 안은 영상의 온도를 유지한다고 들었기에 로툴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로툴러스의 말을 들은 아리사와 자반, 그리고 제프리즈는 각자의 마법 지팡이를 움켜쥐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니! 결계는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제프리즈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딛고 있는 땅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함정이다!”
자반의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마법 사슬이 뻗어 나와 그들을 구속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그들을 향해 수천발의 얼음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위협적인 함정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고작 이런 함정은 방금 그들이 지나온 우박이 쏟아지는 땅에 비하면 가소롭게까지 느껴졌다.
“방심하지 마! 상대는 겨울나무의 현자다! 전력을 다해 깨부숴야 해!”
로툴러스의 외침에 비플레이오드는 손에 쥔 망치를 휘둘렀다.
분명 얼음 화살로 눈을 가린 다음 지독하리만큼 위협적인 마법이 그들을 덮칠 게 분명했다.
“흥! 이런 잡술 따위로 어딜!”
그 순간 아리사는 불길한 직감에 외쳤다.
“안 돼!”
아리사가 손을 뻗으며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비플레이오드의 망치는 마법 사슬을 끊어내는 동시에 땅을 가격해 마법진에 충격을 줬다.
애초에 마법 함정 자체를 부숴버리면 고생할 일도 없다는 계산이었다.
아다만티움 망치가 내려쳐진 충격은 이 일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고, 땅에 떠오른 마법진이 일그러졌다.
“뭐가 안 된다는….”
로툴러스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더니 주변 풍경을 일그러트렸다.
“뭐, 뭐야?!”
갑자기 주변이 뒤틀린 듯한 공간으로 변하자 전원 아리사를 바라봤다.
아리사는 입술을 깨물며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공간 왜곡 현상. 마법진에 차원계 중첩 마법을 숨겨뒀어. 마법진을 부수면 일부러 마법이 실패함으로써 아공간에 가까운 공간에 가둬버린 거야.”
심각한 상황이라 으레 하던 웃음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탈출 방법은?”
냉철한 로툴러스의 물음에 아리사는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일부러 실패한 마법인 만큼 이음새가 약한 곳이 있을 거야. 빨리 찾아야 해! 늦어서 이 공간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영원히 차원 간의 경계를 헤매게 되는 수가 있어!”
아리사의 외침에 모두 안색이 새파래졌다.
“제길, 심리 트릭에 당했어!”
일부러 지나치게 광범위한 지역에 과하게 강력한 마법을 난사하는 것을 보여준 다음, 함정에 걸려들게 만든 탓에 그들이 함정 자체를 지나치게 경계하게 만들었다.
아리사같이 마법적 소양이 높거나, 자반이나 제프리즈같이 신중한 사람이라면 결코 걸리지 않았을 함정이었다.
이 함정은 마법에 대해 잘 모르면서, 동시에 단숨에 마법진을 붕괴시킬 만한 물리력을 가진 비플레이오드나 로툴러스를 노린 함정임에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들은 소름이 돋았다.
“겨울나무의 현자는 어쩌면, 우리 개개인의 행동 방식이나 특성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자반의 말에 전원 극도로 긴장했다.
“빠르게 움직이지. 죽음, 어느 방향이 좋겠나?”
로툴러스가 앞장서며 묻자 아리사는 주변의 마력을 훑으며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유안이 구성해 놓은 함정은 아직 시작도 안 되었다는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