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봉인과 대마수 (7)
제이드는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헛기침을 했다.
“어흠! 저번에 술을 주시면서 스승님을 살릴 방법을 같이 고민해 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가 말하고도 부족한 논리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거짓말은 아닐 거다.
다만 술에 취해서 이성보단 감성적으로 판단하다 보니 알아보지도 않고 스승의 죽음을 예견한 내게 달려온 거겠지.
“그냥 고도로 발달한 마법사의 직감으로 왔다고 하자.”
“아! 네, 바로 그겁니다!”
내 말에 긍정한 그도 스스로가 뻔뻔했다는 걸 아는지 다시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 모습에 낄낄대며 찻잔에 벌꿀과 끓는 물을 담아 건넸다.
“마셔, 술 깨는 데 좋으니까.”
“아, 감사합니다.”
“네 스승님의 정해진 죽음은 아마도 병사일 거야. 사인(死因)을 알고 있다면 회피도 가능하지.”
내 맞은편에 앉은 제이드는 꿀물을 홀짝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예카트리체 씨가 살기 위해선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자유. 정확히는 이 땅을 벗어나 병을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 의원을 이곳까지 불러들이기는 힘드니까 직접 가야지.”
큐어드 마스터 아라드리네라면 어찌어찌 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길버트의 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진다.
마약 후유증에 시달리는 디벳이나 약한 네드리안만으로는 불안했다.
어찌됐든 디벳이나 아라드리네나 독원에게 쫓기는 입장이었으니까.
“스승님을 치료해 줄 의원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 독원이라고 아나?”
지금의 제이드라면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제이드는 내 예상과 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달랑타 어르신께 들었습니다. 세상에 못 고칠 병이 없다는 곳이라고….”
“과장이 심하네.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은 아니야.”
그놈들도 사람인데 못 고치는 병 정도야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저 무고한 사람을 납치해다 임상 실험을 많이 한 덕분에 다른 의원들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다만, 독원이 못 고치는 병은 애초에 어지간한 기적이 없으면 치료하기 힘든 건 사실이지.”
내 평가에 제이드는 진지해졌다.
“내가 독원 출신의 의원을 알고 있다. 그것도 마스터 클래스의 의원이야.”
독원에서 마스터의 칭호를 수여하는 건 극히 일부분이다.
축출당한 디벳과 아라드리네를 포함해도 독원의 마스터는 총 다섯 명에 불과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다섯 명을 묶어서 천수오의(天數五醫)라 불렀다.
“여하튼 치료를 위해선 네 스승님이 자유롭게 움직여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예카트리체가 봉인을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대마수를 토벌하여 이계의 구멍을 완전히 닫아 의무를 완수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제이드가 겨울나무의 현자를 계승함으로써 그녀가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
내 설명에 제이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후자는 스승님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제가 아직 계승받을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하신다면 억지로 계승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대마수 토벌에 집중해야지.”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토벌에 더 열심히 참가하겠다고 결의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1년 남짓 남았다 하셨는데, 병세는 아직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곧 급격히 병세가 악화될 사건이나 계기가 생긴다는 말이지.”
아니면 계기 없이 갑자기 악화될 수도 있다.
으레 병이란 그런 법이니까.
그래도 현자씩이나 되는 마법사의 마력은 쉽사리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다고 해도 1년, 아무리 못 해도 최소 반년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거다.
만병의 현자 게오르가 실루아를 걱정한 것만으로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버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시 달랑타 님이 경고한 아르카나의 습격이?”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내 긍정에 제이드는 벌떡 일어났다.
“그럼 지금 대마수를 토벌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지, 그럴 때야말로 대마수 토벌에 집중해야 할 때야. 대마수 토벌을 미뤘다가 병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네가 제대로 토벌에 나설 수 있을 것 같아?”
내 물음에 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성격상 토벌에 나서기보다는 스승을 돌보며 스승 대신 봉인을 관리하는 의무를 대행할 게 분명했다.
남은 시간을 불확실한 가능성에 매달려 낭비하는 것보다는 소중한 이와 보내는 것을 중요시 여길 게 분명했다.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제이드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 살에 불과했다.
아무리 단련했다고 해도 한창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나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제이드 혼자였고, 지금은 우리가 함께 있으니 사정은 다르지만.
나는 괜히 제이드가 토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아직 네 스승님이 건강할 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악화되는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어서 대비책을 마련해 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예카트리체가 내 대비대로만 잘해준다면 당장 위급해질 일은 없을 거다. 아마도.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떠는 것을 보아하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며 무력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건 최대한 빨리 대마수를 토벌하는 거야. 가장 빠른 방법은 내 도움을 받는 거고.”
정확히는 프레시아의 도움이라 해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저 멀리서 구경하는 게 다지만, 이럴 때 적당히 생색을 내줘야 이용해 먹기 쉬운 법이다.
“이번에 토벌을 나가면 큰 부상을 입지 않는 한 다른 대마수를 전부 처리하고 올 거야. 며칠 걸릴 테니 네 스승님께 인사드리고 와.”
괜히 결계를 들락날락거리다가 아르카나와 마주치면 귀찮아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치워두는 게 옳다.
내 권유에 제이드는 움찔하더니 내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래? 인사드리기 싫어?”
“아, 아니요. 싫은 건 아니고….”
우물쭈물하며 다리를 꼬는 게 영락없이 부모님에게 혼나는 게 무서운 사춘기 꼬맹이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술을 먹었다고 했으니 감정 조절 못 하고 할 말 못 할 말 쏘아붙이고 왔나 보다.
충분히 이해한다.
이해는 하는데….
“하아, 내 신세야.”
이런 애송이를 데리고 여행을 해야 하다니.
그냥 제이드가 아니라 예카트리체를 영입할까?
* * *
겨울나무의 숲 인근 얼음 동굴에 여섯 명이 집결했다.
“냐하하하하! 정말로 네가 올지는 몰랐는데? ‘힘’.”
아리사가 ‘아르카나 08, 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그녀의 반절만 한 크기의 난쟁이는 거칠게 그녀의 손을 쳐냈다.
으드득!
아리사는 난쟁이, 가터 비플레이오드에게 맞은 손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난쟁이답게 소년같이 작은 체구에도 무시할 수 없는 근력에 부러지고 말았다.
“냐하하하하! 아프네.”
아리사의 부러진 손에 검은 마력이 휘감기더니 부러진 뼈가 제자리를 찾았다.
“건방지게 굴지 마라, ‘죽음’. 내 손에 죽는 수가 있다.”
비블레이오드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아리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잉, 귀여워.”
아리사는 비플레이오드를 껴안으려 시도했지만 비플레이오드는 경멸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몸집보다 커다란 망치를 꺼내 위협했다.
그가 망치를 들자 아주 어린 소년이 망치를 드는 것 같아 망치가 연극 도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비플레이오드가 든 망치는 장난감 같은 소품이 아니라 통짜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진품이었다.
아다만티움은 단일 금속으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밀도가 높아 무게도 많이 나갔다.
“불쾌하군. 내가 필요 없다면 나는 이만 가겠다.”
비플레이오드의 경고에 자반이 나섰다.
“워! 워! 진정하게! 우리 아기 새 양,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어. 정 안고 싶으면 내 품에 안겨줘. 내 품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
자반이 양팔을 벌리자 아리사는 토 나온다는 듯이 헛구역질을 하며 물러났다.
“흥! ‘광대’가 ‘예의 물건’을 넘겨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시답지 않은 일 따위는 참가하지 않았을 거다. 물건이나 넘겨라.”
“아이고, 물론이지. 여기 있네.”
자반은 품 안에서 연고가 들어 있는 작은 통을 꺼내 난쟁이에게 건넸다.
“효과는 확실한 거겠지?”
“일단 요정에게는 효과가 확실했다네. 난쟁이에게는 모르겠군.”
비플레이오드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일단 자신의 아공간 마도구 안에 집어넣었다.
난쟁이는 순간 서글픈 표정으로 자신의 매끈한 턱을 쓸어 만졌다.
“효과가 있으면 좋겠군.”
그때 전신을 검은 외투로 둘러싸고 까마귀 부리 가면을 쓴 사내, ‘아르카나 15, 악마’ 말레콥 제프리즈가 물었다.
“그보다 작전에 쓸 열쇠는 가져왔나?”
제프리즈의 물음에 아리사가 자신의 그림자에서 커다란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냐하하하! 당연히 가져왔지. 이걸 봉인지 정중앙에 꽂으면 봉인이 무너지고 다시 이계의 구멍이 열릴 거야.”
칠흑의 마법 지팡이는 겨울나무의 현자가 지키는 봉인을 뚫기 위한 전용 마도구였다.
“뭐, 지난 세월 동안 겨울나무의 현자를 뚫고 도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들의 목표는 봉인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었기에, 봉인지에 도달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아리사가 든 마도구는 봉인지에 가까이 다가가 땅에 내리찍기만 해도 봉인에 균열이 일었다.
그렇게만 해도 겨울나무의 현자가 봉인을 보수하느라 결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 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셈이었다.
“봉인지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균열은 커지니 최대한 가까이 가려면 몇이나 죽을까요?”
후드 망토를 깊게 눌러쓴 사람, ‘아르카나 12, 매달린 사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봉인에 일으킨 균열이 크면 클수록 겨울나무의 현자는 오래 봉인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매달린 사람의 말에 제프리즈는 지팡이를 짚으며 짙게 살기 어린 웃음소리를 흘렸다.
“끌끌끌,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젊었던 시절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녀의 몸에 심어둔 작은 질병이 있으니.”
제프리즈의 말에 자반이 관심을 보였다.
“오오! 그렇다면 겨울나무의 현자를 죽일 수도 있는 겁니까?”
자반의 물음에 아리사가 비웃었다.
“냐하하하하, 질병을 심어뒀어도 발병해야 의미가 있는 거 아냐?”
“괜찮다. 수레바퀴에게 발병했다는 예언을 들은 것이 벌써 2년 전이니.”
제프리즈의 확언에 얼음 동굴에 모인 이들은 모두 기대 어린 눈으로 제프리즈를 바라봤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겨울나무의 현자라는 희대의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60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발병하다니. 너무 오래 걸렸다고 한탄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늙어 죽기 전에 발병했다고 기뻐해야 할까 모르겠군.”
노년의 주술사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작전을 짜도록….”
자반이 말하려는 그때, 얼음 동굴에 모인 간부들은 섬뜩한 감각에 무언가 판단을 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콰과과과과광-!!
하늘에서 사람 몸뚱이만 한 우박이 쏟아져 내리며 얼음 동굴을 박살 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초인의 영역에 들어선 앵무새 수인 로툴러스였다.
로툴러스는 검으로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우박을 베어내고 흘려보냈다.
“우리 위치를 들킨 건가?!”
“이 넓은 산맥에서 어떻게?!”
그들은 겨울나무의 현자에게 위치를 들킨 줄 알고 기겁했다.
하지만 얼음 동굴이 박살나며 보인 광경은 더더욱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예카트리체는 그들의 위치를 특정해 공격을 퍼부은 게 아니었다.
그저 결계인 겨울나무 숲을 중심으로 반경 십수 킬로미터를 전부 초토화시켰을 뿐이었다.
“으아아악! 살려줘!”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옥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