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봉인과 대마수 (6)
제이드는 자신의 방에서 책상 위에 술병을 올려놓고 갈등했다.
퐁!
코르크 마개를 열자 올라오는 독한 술 냄새에 떨떠름하게 술병을 내려다봤다.
“하아~! 먹자니 죽을 것 같고, 안 먹자니 입이 안 떨어지고.”
맨 정신으로 스승에게 죽음을 따지기에는 그는 아직 어리고 여렸다.
유안에게 스승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만 하루가 넘도록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승이 그런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었건만, 그는 술을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었다.
유안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저 듣지 않았다 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이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무리 부정하고 그럴 리 없다 되뇌어도 무의식의 영역에서 속삭여 왔다.
유안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어쩌면 유안의 말대로 제이드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승의 병이 심상치 않은 병이며, 늦으면 손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아니, 그보다는 마력을 갈고 닦으면서 발달한 육감을 초월한 무언가가 그에게 속삭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스승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고.
고도로 수련한 마법사에게 드물게 찾아온다는 자각하지 못하는 예지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술을 마시는 게 두려웠다.
만약 사실이면 어떡하지?
순간 제이드는 알 수 없는 공포에 빠졌다.
그것은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는 공포였다.
너무 어려서 흐릿한 기억 속. 굶주리고 길바닥을 기어 다니던 고아였던 자신의 손을 잡아줬던 그 차가우면서 따스한 손이, 그 온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알에서 깨어난 아기 새의 세상은 먹이를 게워주는 어미 새와 좁은 둥지가 전부이듯, 제이드의 세상은 이 외딴 설원 속 숲과 오두막, 그리고 스승이 전부였다.
“그래,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것뿐이야. 스승님은 무슨 실없는 소리냐며 웃으며 꾸중하시겠지.”
꾸중하시면 자신은 어설프게 웃으며 말을 둘러댈 것이다.
그리고 평소처럼 마법에 대한 이야기로 스승과 밤을 지새울 테지.
단지 그뿐에 불과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제이드는 독한 술이 담겨 있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가는 독한 술에 제이드는 기염을 토했다.
“커흡! 허억! 이게 뭐야!”
마치 차가운 불을 삼킨 것처럼 처음에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독한 술 냄새와 은은한 포도 향기가 전신을 마비시키듯 타고 올라왔다.
“윽! 윽!”
숨을 쉬기 힘들다. 아니, 어지럽다.
아니, 이게 취한다? …는 감각?
생각이 잘되지 않았다.
다만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당장 이성을 잃을 것처럼 전신이 흔들렸고, 세상이 느리게 흘렀으며, 아름다웠다.
그래, 이 고통은 아름다움을 위한 고통인가?
이내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감각이 사라져 갔다.
이성이 마비되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아, 이뤠서… 요옹기의 무우울야악이라 하셔어엇구우나.”
세상에 무서운 게 사라졌다.
어렸을 적 침대 아래 괴물이 무서워 베개를 들고 스승을 찾아간 날, 이 술이 있었으면 베개가 아니라 용감히 마법 지팡이를 들고 괴물과 맞서 싸웠으리라.
제이드는 붕 뜬 감각에 웃으며 비틀거렸다.
“크흡! 후우우~! 후우우~!”
책상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거듭하니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고양감은 여전해서 무서울 게 없었다.
제이드는 무심코 술병을 쥐고 잔에 따랐지만 술잔을 들진 않았다.
자신이 술을 마신 이유가 무엇인가. 스승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가 아닌가.
“아, 아, 어흠! 말은 나오네.”
느리지만 말은 또박또박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제이드는 망설임 없이 스승의 방으로 향했다.
예카트리체의 방에 도착하자 제이드는 노크를 하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였으면 노크 후에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받았을 테지만 술에 취해서인지 거침이 없었다.
예카트리체는 갑자기 제자가 들어오자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닫고 책상을 정리했다.
책상에는 복잡한 마법진과 술식이 가득해 제이드의 눈길을 끌었다.
제이드는 처음 보는 마법에 호기심이 동해 물어보려 했지만 예카트리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다니 별일이구나. …응? 술 냄새? 제자야, 술을 마셨느냐?”
예카트리체는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제자의 모습에 당황했다.
제이드는 호기심을 억누르고 본래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예, 마셨습니다.”
“…그것 참 별일이구나. 무슨 일 있느냐?”
미소 지으며 묻는 스승의 얼굴을 보자 제이드는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묻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초 제자, 스승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해보거라.”
“스승님의…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제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무서웠다.
어서 피식 웃으며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들었냐고 한소리 들었으면 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예카트리체의 웃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은공께 들었느냐?”
소망과 전혀 다른 대답에 제이드는 빠르게 피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에 피가 몰리며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술에 취한 탓인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할 사실이 닥쳐왔기 때문일까?
“정말… 정말이었습니까?"
“….”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에 예카트리체는 침묵했다.
“지독하리만큼 성격 나쁜 은인의 농담이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스승님!”
제이드는 직시하지 못할 현실에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휘청거렸다.
정신력이 흐트러지자 술기운이 확 올라온 느낌이었다.
“제이드!”
“만지지 마십쇼!”
넘어질 뻔한 그를 받치려던 스승의 손길을 제자는 쳐냈다.
스승을 바라보는 제이드의 눈에는 배신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그런 제자의 시선에 예카트리체는 심장이 베이는 듯했다.
“…병 때문입니까?”
폐부를 쥐어짜듯 묻는 제이드의 표정에 예카트리체는 서글픈 눈으로 시선을 깔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오랫동안 보아온 점성술에 따르면 그녀는 1년 안에 병사나 쇠약사 하게 될 운명이었다.
지금은 그리 병세가 깊지 않지만, 언제 악화될 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이란 점은 전염성이 있는 병이 아니라는 것뿐.
“얼마나 남았습니까?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남은 시간은 1년 남짓, 알게 된 건 3년 정도다.”
생각보다 긴 시간에 제이드는 울컥해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했다.
“3년…! 어째서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겁니까!”
한 달 아니, 적어도 반년이었으면 못난 제자가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망설였을 거라 여겼을 거다.
하지만 3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이 못난 제자에게는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 생각하신 겁니까!”
악에 받친 제이드의 외침에 예카트리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 아니다! 언젠가 알려줄 생각이었어!”
“언제요! 죽기 직전에요? 아니면 죽고 난 다음에 가르쳐주실 생각이었습니까!”
예상치 못한 분노를 토해내는 제자의 모습에 예카트리체는 주춤했다.
제자의 외침에 아니라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분명 이렇게 물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기 직전까지, 아니. 어쩌면 죽고 난 다음에야 제자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을지도 몰랐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제이드는 대답이 없는 스승의 모습에 심장이 쥐어뜯기는 느낌이었다.
“저는 스승님께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습니까? 그저 자신을 대신해 의무나 물려주면 될 존재였냐는 말입니다!”
평소 예의 바르던 제이드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망언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핏발 선 제이드의 외침에 예카트리체는 충격을 받았다.
“아, 아니, 쿨럭! 쿨럭! 아니야!”
“아니라면 어째서입니까! 아니라면! 적어도 이 제자에게 스승님이 죽지 않도록 발버둥 칠 기회라도 주었어야죠! …아니라면 스승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이라도 주셨어야죠.”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목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1년이라니, 너무 짧지 않은가. 스승에게 그간 너무나 많이 받아왔건만,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너무했다.
눈물을 흘리며 잘게 떠는 제자의 모습에 예카트리체는 깨달았다.
그동안 제자를 위해 말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속여왔지만, 말하지 않은 건 순전히 무서웠기 때문이란 걸.
제자에게 말로 뱉어버린 순간 이 소중한 순간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는 걸.
“…찾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스승님께서 죽지 않도록 방법을 찾을 겁니다!”
방을 박차고 나가는 제이드의 등을 본 예카트리체는 손을 뻗어 제자를 잡고 싶었다.
같이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해 다른 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일지라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제자를 붙잡지 못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스승의 방을 박차고 나온 제이드는 곧장 유안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 따위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 유안은 의외라는 듯이 제이드를 바라보다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장난기 가득한 악동처럼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흡사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악마처럼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엇을 원하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묻는 그 물음에 제이드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을 살리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쇼.”
제이드의 부탁에 기분 나쁠 정도로 상큼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잘 찾아왔어.”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에 스스로 발을 들이는 느낌이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 * *
갑자기 노크도 없이 제이드가 들어오자 놀랐지만 그의 붉은 눈가와 전신에 풍기는 술 냄새를 보아하니 예카트리체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온 듯했다.
제이드의 꼴을 보아하니 나중에 또 예카트리체를 찾아가서 달래 줘야겠군.
“잘 찾아왔어.”
나는 무릎 꿇은 제이드의 어깨를 다독이며 손을 건넸다.
“전력을 다해 도와줄 테니 일어나. 소중한 이를 위해 무릎을 꿇는 건 좋지만 바닥이 차다.”
“감사합니다.”
제이드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예카트리체 또한 동료로서 포섭할 생각이지만, 같이 움직일 동료는 역시 겨울나무의 현자를 계승받은 제이드였다.
그런 만큼 그를 직접 살살 구슬릴 필요가 있었다.
“바로 날 찾아온 걸 보니 네 스승님께 내가 죽음의 운명을 극복했다는 걸 들은 모양이지?”
“예?”
내 물음에 제이드는 벙찐 얼굴로 날 바라봤다.
“어? 못 들었어?”
“어? 죽음을 극복하셨습니까?”
예카트리체에게 듣고 온 게 아니라고?
그럼 얘는 내 뭘 보고 예카트리체를 살려달라고 빈 거야?
“너, 난 왜 찾아온 거냐?”
내 물음에 제이드는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 그러게요.”
뭐지? 이 녀석이 이렇게 얼빵한 캐릭터였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