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봉인과 대마수 (5)
깊게 판 얼음 동굴 속에서 자반과 아리사는 모닥불에 의지하며 추위와 싸웠다.
두 사람이 있는 위치는 겨울나무의 현자의 수 킬로미터가 넘는 감지 권역에서 아슬아슬하게 밖이었지만, 조심하느라 제대로 된 방한 마법도 사용하지 못했다.
“아기 새 양? 너무 춥지 않아? 내 품 안으로 긴급 피난 오지 않겠어?”
멀끔한 중년의 사내 자반이 아리사에게 윙크하자 아리사는 조소를 날렸다.
“냐하하하! 성희롱이야! 죽어! 변태 늙은이!”
“성희롱이라니, 아기 새 양~! 순수한 내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거 아니양~?”
그렇게 말한 자반은 방금 재미있는 압운(押韻:Rhyme) 아니었냐며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리사는 웃기지도 않는다며 혀를 찼다.
“압운(押殞:눌러 죽이다)시켜 버리기 전에 닥치는 게 좋을 거야. 냐하하핫!”
“오! 아기 새 양! 방금 말장난 아주 좋았어! 점수가 높아!”
“말장난 같아?”
아리사는 으르렁거리고 자반은 웃어넘기기를 반복하던 그때, 얼음 동굴 앞으로 기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무기를 들며 긴장했다.
이곳은 적지 한복판이었다.
“너무 대놓고 살기를 날리는군, ‘죽음’. ‘광대’를 본받아라. 경계하면서도 전혀 기세를 느낄 수 없지 않느냐.”
중저음의 근엄한 목소리에 아리사는 마법 지팡이를 내리며 투덜거렸다.
“그거야 이 변태 늙은이가 너무 약해 빠졌으니 그런 거 아니야?”
아리사의 말에 동굴 안으로 알록달록한 깃털을 자랑하는 앵무새 수인(獸人)이 들어오며 화려한 날개를 퍼덕였다.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
그의 말에 자반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손등을 이마에 가져다 대며 비련의 주인공 행세를 했다.
“아아…! ‘전차’까지! 너무해!”
자반의 항의에도 아리사와 앵무새 수인, 로툴러스 필리드라이온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냐하하하! 어서 와.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나 언데드가 되어 버렸을지도?”
“작전 일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을 터. 그리고 죽음, 자네는 목이 빠지는 것 정도로는 안 죽지 않나?”
“에이, 아무리 그래도 죽긴 죽는다고? 그나저나 다른 녀석들은?”
아리사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기 전에 들은 소식으로는 ‘매달린 사람’과 ‘악마’는 거의 도착했다. 다만 ‘연인’은 온천욕을 즐기러 떠나 불참한다더군.”
“온천욕?!”
“그래, 어차피 이번 임무에 대한 중요도는 그렇게 높지 않느냐며 자기들쯤 빠진다고 문제가 되겠냐고 하더군.”
로툴러스의 말에 아리사와 자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자신들이 할 일은 봉인을 공격하는 것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겨울나무의 현자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부상을 입히면 좋았지만 그들에게 이번 작전을 내린 그들의 주인도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야? 당장 족치러, 냐하하핫! 설득을 하러 갈 테니까.”
“음… 거기가 어디였더라? 마? 마? 마어쩌구 산 근처에 있는 온천 마을이라고 했는데.”
로툴러스가 연인이 떠난 온천 여행지를 기억하지 못하자 아리사와 자반은 속으로 새 대가리라고 로툴러스를 욕했다.
“가뜩이나 위험한 임무에 둘이나 빠졌다고 한탄해야 할까, 아니면 다섯 명이라도 확실히 모인다고 좋아해야 할까 모르겠네.”
자반이 쓰게 웃자 로툴러스가 모닥불 앞에 앉으며 말했다.
“긍정적으로 후자라 생각했으면 좋겠군. 나야 강자와 싸울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만.”
수인족 용병인 로툴러스는 불을 쬐며 혀로 부리를 핥았다.
“강자도 보통 강자여야지, 겨울나무의 현자가 병이라도 걸려 있었으면 좋겠군.”
자반의 푸념에 아리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냐하하하핫! 악마의 능력 말이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통하겠어? 그 괴물이 병이라니, 냐하하하!”
“부질없는 희망 사항이지만, 꿈꾸는 자는 아름답다잖아. 그리고 의외로 마법사의 사인 중에서 병사(病死)는 많다고? 아기 새 양?”
“정말 부질없는 희망 사항이군. 그건 그 허약한 놈들이 맨날 환기도 안 시키는 공방에 처박혀 있으니 몸이 쇠약해져서잖나.”
세 사람은 곧 도착할 이들을 기다리며 모닥불에 최대한 몸을 녹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서쪽에서 계속 강한 기세가 격돌하는 것 같은데, 악마와 매달린 사람이 싸우는 건 아니겠지?”
자반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잠시 멈칫했다.
“……설마.”
그도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 * *
우리가 외뿔과 그 무리를 사냥해 가져오자 예카트리체는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날 와락 끌어안았다.
왠지 달콤한 향기가 났다.
향수는 아닌 거 같고 마법 시약 냄새인가?
“남쪽뿐만 아니라 서쪽의 대마수까지! 정말로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그녀의 반응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산맥을 지배하는 다섯 대마수의 마석을 모아 이계의 구멍을 막는 것은 그녀를 포함한 역대 겨울나무의 현자들의 비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역대 현자들이라고 해도 구멍이 열린 이후, 겨울나무의 현자는 그녀를 포함해 다섯 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스승님! 드디어 스승님의 소원을 이룰 때가 다가왔습니다!”
예카트리체는 정말로 감격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외인데?
“그만 도련님께 떨어져 주세요.”
프레시아가 눈치를 주자 예카트리체는 얼굴을 붉히며 떨어졌다.
그리고는 눈물을 닦아내며 당황했다.
“실례했습니다. 갑자기 스승님 생각이 나서. 이 나이에 주책이었군요.”
젊어 보이는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반백년은 더 전에 죽은 사람일 거다.
‘별을 읽는 자’라는 그녀의 특성상 아주 어렸을 때 거두어졌을 테니 부모처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부끄러워하실 건 없습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죠.”
특히 그녀처럼 일생 동안 은둔한 사람은 더더욱 그렇겠지.
“그리고 사냥은 프레시아가 했지, 저는 별것 안 했습니다.”
내 말에 프레시아가 가당치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두개골을 부수지 않았으면 훨씬 힘들었을 겁니다!”
확실히 그 자리에서 해체한 외뿔의 두개골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아마도 내 화살촉이 두개골에 박히며 금을 만들었고, 프레시아와 싸우면서 금을 따라 부서진 듯했다.
그렇게 치면 나도 한몫했다고 주장할 순 있었다.
예카트리체는 프레시아의 양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프레시아 경.”
그리고는 길버트와 실루아에게도 똑같이 손을 마주 잡고 감사 인사를 했다.
앞으로 대마수 토벌은 세 번이나 할 텐데 인사가 좀 과한 느낌이었다.
“우선 부산물에 대해서 말인데….”
“아, 저희는 봉인의 마석이면 충분합니다.”
내가 운을 떼자 예카트리체는 당연하다는 듯이 모든 부산물을 내게 넘겼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제이드도 꽤나 고생했는데요.”
퇴로 차단은 대마수 토벌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 천지가 울리는 결투에 퇴로 차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생이었다.
내가 제이드를 바라보자 제이드는 싱긋 웃어 보였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괜찮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갚아야 할 처지에 부산물까지 요구할 순 없죠.”
제이드의 말에 예카트리체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다분히 호구 기질이 있다.
역시 동료가 되면 단단히 고삐를 매야겠다.
소설 속에서도 저 호구 기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에 휘말렸던가.
그때 예카트리체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손뼉을 쳤다.
“아! 은공께서는 마법사이시니 외뿔의 뿔로 마법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이 뿔이라면 최상급의 마법 지팡이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 제안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미 좋은 마법 지팡이는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퀼라의 마도서는 무려 드래곤도 탐내는 장비였다.
예카트리체는 아퀼라와 견주어도 결코 아래가 아닌 만큼 동급이니, 그 이상의 마법 지팡이를 만들려면 충분히 만들 순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뿔이 좋은 재료여도 아퀼라의 마도서를 능가할 만한 마법 지팡이를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동급이라면 굳이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부산물로는 제 전속 인형을 만들 생각입니다. 뿔은 그 인형에게 줄 검을 만들면 좋겠군요.”
뿔로 만든 검을 길버트에게 줄 생각도 해봤지만, 너무 과하게 좋은 검은 실력을 좀먹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인형에 주기로 했다. 물론 인형을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실루아다.
내 말에 실루아는 자신만 믿으라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아… 그렇습니까?”
예카트리체는 아쉬워하며 시무룩해 했다.
“보상을 하고 싶으신 거라면 대마수들을 다 토벌한 다음에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 부탁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외쳤다.
“말만 하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주 좋다.
고급 인력을 얻었으니 바스타유 산맥에서 파밍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얻고 가야지.
예카트리체와 제이드의 도움만 있다면 산맥 전역을 갈아엎을 수도 있다.
“말씀만으로도 든든합니다. 아, 그전에 달랑타 영감님이 경고했던 아르카나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했습니다.”
“대비책이요?”
예카트리체는 ‘굳이?’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확실히 바스타유 산맥에서의 그녀는 아르카나의 모든 간부가 덤벼들어도 절반 가까이는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병을 얻기 전이라면 말이다.
아르카나 간부 중에는 질병과 저주에 특화된 주술사가 있다.
‘아르카나 15, 악마’. 디지즈 마스터(Disease Master) 말레콥 제프리즈.
주술사이자 의원인 그는 모든 병자(病者)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예카트리체처럼 병이 심화되면 치명적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게다가 여기서 효과적으로 아르카나를 붙잡아 두면 대마수 토벌이 방해받을 위험도 사라지고요.”
내 첨언에 예카트리체는 간단히 수긍했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의 자유가 걸린 봉인의 마석이지, 날파리 같은 아르카나의 자객이 아니었다.
내가 아르카나의 주인이라면 반드시 아르카나 15를 보낼 거다.
간부 중에는 예카트리체처럼 별을 읽는 자, ‘아르카나 10, 수레바퀴’가 있으니까.
최악은 악마지만, 주의해야 할 놈은 악마뿐만이 아니다.
올 것으로 예상 되는 놈들로는 온갖 환상과 기교를 부리는 ‘아르카나 00, 광대’.
그림자 마탑주이자 슈프림 메이지인 ‘아르카나 01, 마술사’.
둘이서 하나인 ‘아르카나 06, 연인’.
초인으로 유명한 오색의 용병왕인 ‘아르카나 07, 전차’.
은신술과 암살의 대가 ‘아르카나 09, 은둔자’.
죽음의 군대를 이끄는 ‘아르카나 13, 죽음’.
만병(萬兵)의 계보를 잇는 마스터 메이지인 ‘아르카나 16, 탑’.
대충 올 것으로 예상되는 녀석들이 이 정도다.
물론 내 예상을 벗어나 다른 녀석들도 올지 모른다.
“대비했다고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
어느 놈이 오건 상관없다.
어떤 놈이건 제일 기분 X같이 만들 방법을 알고 있거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