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봉인과 대마수 (4)
흉흉한 살기가 담긴 울음소리에 프레시아는 외뿔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쳇! 얕았나.”
프레시아는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며 크게 물러났다.
프레시아가 있던 곳으로 검기가 둘러진 외뿔의 뿔이 지나갔다.
외뿔의 어깻죽지는 프레시아의 검에 베여 피가 뿜어져 나왔다.
초음속으로 날아든 화살촉이 외뿔의 두꺼운 가죽을 뚫고 두개골에 박힌 충격으로 일순 정신을 잃은 찰나 베어진 탓에 상당한 중상이었다.
“크르르르르!”
외뿔은 생존 본능에 살기를 내뿜으며 낮게 울었다.
방금은 정말 위험했다.
그대로 목이 베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화살촉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흔들다 우연히 프레시아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외뿔에게 있어 그야말로 천운이었으나 프레시아에게는 아쉬운 일격이었다.
“깽! 깽!”
“으르르르! 컹! 컹!”
외뿔과 무리를 가른 두껍고 거대한 얼음 장벽 너머에서 외뿔의 자식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뿔이 난 늑대 무리는 외뿔과 동종의 암컷 늑대와 외뿔의 자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미 늑대들은 평범한 중대형의 몬스터였지만 외뿔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대형 몬스터라 할 만큼 거대하고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뿔의 자식들은 길버트의 검에 가죽과 살이 베이고 뿔이 부서졌다.
외뿔이 지닌 힘의 원천은 봉인의 마석에서 나오기에 아무리 외뿔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그저 한낱 몬스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핫! 몸이 가벼워. 힘이 넘친다!”
길버트는 블란츠바그의 비전 영약으로 힘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에 맺힌 마력이 단순히 검의 강도와 예기를 높이는 수준에서 벗어나, 흩어지지 않고 검을 감싸는 날카로운 칼날을 형성했다.
진정한 기사의 능력이라 불리는 검기(劍氣)였다.
“길버트 오빠! 유안 오빠가 가급적 죽이지 말라고 했어요!”
상처 입은 짐승은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 생각하는 곳으로 가기 마련이다.
만약에 외뿔을 놓치더라도 무리에 상처를 입혀 보다 확실한 생활권을 특정할 생각이었다.
화살촉에는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화살촉이 박히지 않거나 외뿔이 화살촉을 제거할 경우도 생각한 작전이었다.
“알았어!”
실루아의 외침에 길버트는 자신의 검에 맺힌 검기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늑대 무리를 상대해야 했다.
실루아가 네임드 인형 열 체를 조종하며 외뿔의 무리가 얼음 장벽을 넘어 외뿔을 돕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았다.
“울려 퍼져라, 백 년의 슬픔이여! 얼어붙어라, 천 년의 빙루여! 통곡의 장벽!”
두 사람이 외뿔의 무리를 상대하는 사이 제이드는 사방을 날아다니며 외뿔의 퇴로가 될 만한 곳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역대 겨울나무의 현자가 대마수 토벌에 실패한 이유의 절반이 넓은 산맥에서 대마수를 찾지 못해서라면, 나머지 절반은 도주하는 대마수를 놓쳐서였다.
넓은 분지 지역인 만큼 자연스럽게 거대한 얼음 돔의 형태가 되어갔다.
심각한 중상에 퇴로까지 차단되어 가자 외뿔은 다급해졌다.
얼음 장벽으로 갈라진 자신의 자식들도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르!”
외뿔은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전력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외뿔과 일대일로 대치한 프레시아는 긴장하며 외뿔과 신경전을 벌였다.
검기를 넘어 강기가 맺힌 외뿔의 뿔은 위협적인 것을 넘어 무시무시하기까지 했다.
“와라! 한낱 짐승아!”
프레시아도 한껏 투기를 끌어 올리며 검에 강기를 두른 채 외뿔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외뿔의 뿔과 프레시아의 검이 전력으로 맞부딪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일합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며 땅을 가르고 하늘의 구름을 흐트러트렸다.
당연히 무리와 외뿔을 가르던 얼음 장벽도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져 내릴 뻔했다.
실루아가 다급하게 마법으로 보강하지 않았다면 분명 무너져 내렸을 터였다.
“칫!”
외뿔은 얼음 장벽이 무너져 내리지 않자 혀를 찼다.
자신의 무리를 미끼로 사용하고 도주할 생각이었는데 실패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영악한 짐승이구나!”
프레시아는 거대한 외뿔의 덩치로 생기는 사각을 노리고 안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초인에 버금가는 예민한 감각의 대마수는 쉽사리 거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외뿔은 네발의 뛰어난 각력을 이용해 프레시아를 압도하는 속도로 움직여 압박했다.
프레시아와 외뿔은 빠르게 움직이며 검과 뿔을 맞댔다.
콰앙! 콰앙! 콰앙!
강기가 둘러진 검과 뿔이 휘둘러질 때마다 토사가 솟아올랐고, 강기가 날려질 때마다 산사태가 일어났다.
“통곡의 장벽! 통곡의 장벽! 통곡의 장벽!”
산이 무너질 공격을 받는 건 제이드가 세운 얼음 장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공간에서 마석을 포대 자루째로 꺼내 마법에 사용하는데도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숫제 괴물들이 따로 없군요. 저래도 천하십검이 아니라는 거죠?”
제이드는 중얼거리며 천하십검이란 존재는 얼마나 괴물일까 고민했다.
두 괴물이 날뛰는 이 넓은 분지 전체를 커버하며 방벽을 유지하는 본인에 대해서는 전혀 괴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외뿔과 싸우는 데 끼어들고 싶었지만, 그의 동체 시력으로는 자칫 잘못했다간 프레시아를 공격할 위험이 있었다.
“크어어엉!”
“하아아압!”
외뿔이 프레시아의 심장을 노리고 뿔을 질렀다.
외뿔의 입장에선 압도적인 체격 차이로 프레시아를 노리기 힘들었지만, 반대로 프레시아에게 있어서도 너무나 거대한 뿔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프레시아는 쇄도하는 뿔 앞에서 담력을 발휘해 검으로 뿔을 맞대는 동시에 외뿔은 따라 할 수도 없는 기교를 부려 외뿔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저 사냥으로 검술을 익힌 외뿔은 배운 적 없을 뿐더러, 배운다 하더라도 목을 움직여야 뿔을 휘두를 수 있었기에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기예였다.
검으로 뿔을 훑으며 간격 안으로 파고든 프레시아는 유안에게 당한 상처에서 흐르는 피 탓에 시력을 잃은 외뿔의 오른쪽 눈을 베었다.
“캐앵!?”
눈이 베이자 당황한 외뿔은 크게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벌린 외뿔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이끄는 무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레시아와 싸우는 사이 분지를 얼음 돔이 둘러쌌다.
6백 년을 넘게 살아온 외뿔의 생존 본능은 요란하게 외쳤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
도망치지 못하면 죽는다.
하지만 동시에 생존 본능은 눈앞의 작은 인간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외치기도 했다.
등을 돌려 빈틈을 보이는 순간 자신의 목덜미에 저 날카로운 검이 박힐 터였다.
어쩌면 단숨에 목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다.
목덜미가 베인 순간에 진작 도망쳐야 했다.
외뿔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인간을 죽이거나, 최소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오오오오-!!”
외뿔은 찐득한 살기를 내뿜으며 전의를 다졌다.
콰아아앙-!!
수십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고 다시 한번 전력을 다한 검과 뿔이 격돌하자 이번에는 외뿔이 크게 물러났다.
태생적인 체격과 근력 차이에도 프레시아가 아니라 외뿔이 밀려난 이유는 하나였다.
유안의 화살촉이 두개골에 깊게 박히며 금을 냈기에, 더 이상 뿔을 지탱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격으로 산을 부수는 프레시아의 힘을 백 하고도 수십 번 넘게받아냈으니 멀쩡한 두개골이어도 상당한 부담이 왔을 터였다.
금이 간 두개골이 버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당장 뿔이 떨어져 나가지 않은 건 뿔을 지탱하는 근육의 힘 덕분이었다.
거기에 처음 기습으로 베인 목에서 계속해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탓인지 과다 출혈로 비틀거렸다.
“크르르르르-!!”
외뿔은 필살의 살기를 담아 낮게 울었다.
평범한 몬스터였다면 외뿔이 내뿜는 살기만으로도 입에 거품을 물며 죽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프레시아는 담담히 살기를 받아 넘겼다.
이 일대의 지배자는 그녀가 자신의 최후의 상대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가진 모든 힘을 사용하여 육신을 강화하고 뿔 위로 십수 미터에 달하는 검강을 만들어냈다.
이 일합에서 이기든 지든 외뿔은 죽는다.
죽는 이유는 하나, 도망쳐야 할 때 싸우기를 선택한 것.
추하게 달아나는 것이 몇 시간이라도, 아니 몇 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는 길이란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칠 수 없었다.
외뿔에게는 스스로의 뿔을 갈고 닦은 긍지가 있었다.
강한 이와 뿔을 겨루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자신의 무리를 미끼로 사용하려 한 만큼 비정하고 야비했지만, 갈고 닦은 검술에서 만큼은 추해질 수 없었다.
외뿔과 프레시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뿔과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맞부딪쳤다.
그날, 산맥 서부를 지배하던 대마수 ‘외뿔’의 전설이 막을 내렸다.
* * *
나는 프레시아의 손에 연고를 발라주며 말했다.
“고생했다.”
외뿔 늑대들의 주요 서식지가 여기저기 패고 갈아엎어질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었던 탓인지, 아니면 멀리서 보았을 때 하늘이 갈라졌던 최후의 일합 때문인지. 프레시아의 손바닥은 피투성이였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프레시아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어린나이였음에도 굳은살로 가득했던 손이 찢어진 것은 꽤나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내가 밀어 넣은 전장에서 싸우다 다친 거니 더더욱 그랬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건 충실히 내 명에 따라준 프레시아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다치지 마. 명령이야.”
“예, 알겠습니다!”
상처가 꽤나 쓰라릴 텐데 프레시아는 활기차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초인에 필적하는 괴물인 외뿔과 겨뤄 이긴 게 기쁘긴 한가 보다.
디벳 영감의 연고니까 프레시아의 회복력을 생각했을 때 내일이면 다 나을 거다.
꽤나 심하게 찢어져서 흉터는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설 <겨울나무의 현자> 속에서 외뿔을 상대하다가 다친 것에 비하면 전혀 다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 다행이다.
1권 속 프레시아는 지금의 프레시아보다 더 경험도 많았고, 제이드도 겨울나무의 현자를 계승받으면서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외뿔이 이끄는 늑대 무리와 외뿔의 연계에 제이드는 그만 실수하게 되었고, 그 탓에 프레시아는 외뿔의 뿔에 찔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내가 사냥에 앞서 외뿔과 무리를 분리하는 데 중점을 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보통의 몬스터라면 외뿔과 어울려 봤자 방해만 될 테지만, 외뿔의 자식들은 아니었다.
외뿔의 마력과 외뿔의 자식들이 공명하며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기에 보통 위험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예비 계획들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입니다.”
제이드는 내게 깨끗한 붕대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계획대로 잘해준 덕분이지.”
나는 외뿔과 무리가 제대로 갈라지지 않았을 때.
외뿔에게 프레시아가 다쳤을 때.
제이드의 실수로 퇴로 차단이 실패했을 때.
외뿔이 초반부터 싸우지 않고 도망을 선택했을 때 등.
열다섯 가지 예비 플랜을 짜 놓았었다.
결국 소설 속의 외뿔은 제이드가 건 빙결의 저주에 걸려 동사하고, 프레시아는 제이드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하게 되지만, 흉터는 어쩔 수 없었다며 제이드는 자신의 오만을 후회한다.
생각해 보면 1권의 제이드는 꽤나 오만했는데 그건 고칠 필요가 있겠군.
나는 산맥 사이로 동이 트는 것을 보며 말했다.
“다음 사냥할 대마수는 동쪽의 ‘안개’야.”
물론 사냥하기에 앞서서 아르카나를 엿 먹일 작전 하나를 떠올렸다.
아니, 일곱 개쯤 되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