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봉인과 대마수 (3)
순간 예카트리체의 눈에는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아무리 세상을 위한다고 해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을 리 없다.
게다가 내게 은혜를 입었으니 날 죽이지는 못할 거다.
그럼에도 그녀가 갈등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내 차가운 시선에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떻게 은공을 죽이겠습니까.”
“하지만 아르카나가 제 몸 안에 봉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사정이 다르죠. 당신은 아마 제 자유를 박탈하고 감시하려 할 겁니다.”
“…!”
내 추측에 예카트리체는 부정하지 못했다.
차마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감시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녀가 하는 고민은 평생을 이곳에 붙잡아 두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갈등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당장 죽이지만 않는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마법사 하나 구워삶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제가 1왕자냐 물었죠? 맞습니다. 제가 듀플리온 왕국의 1왕자, 유안입니다.”
내가 1왕자임을 시인하자 예카트리체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여유롭게 마법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물었다.
“제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확인할 것이요?”
“당신의 운명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일 년? 이 년? 삼 년은 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데 맞습니까?”
내 물음에 예카트리체는 놀라서 날 바라봤다.
“어떻게…!”
“운명을 비틀려면 그 운명을 알아야 하는 법이죠.”
그녀는 내가 진작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는 걸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일 년 남짓할 겁니다. 예지가 아니라 점성술에 근간한 거라 정확한 날은 알 수 없습니다.”
그녀의 긍정에 나는 끓인 물에 홍차를 집어넣었다.
“그럼 일 년 뒤 죽고 난 다음엔, 제이드가 당신의 뒤를 이어 이 고독한 땅에 홀로 머물며 봉인을 지키게 되겠군요. 아니, 제 토벌 계획이 성공한다면 봉인이 아니라 저를 지키게 되는 건가요?”
“….”
“토벌이 성공해도, 실패해도 이 혹한의 땅에서 아직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앞날이 창창한 소년이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나는 뜸을 들이듯 찻잔을 기울여 홍차를 따르고 그녀에게 건넸다.
“그게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겁니까?”
그녀는 침묵하며 앞에 놓인 홍차를 내려다봤다.
제이드가 자신처럼 이 땅에 묶인 채 평생을 보내는 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닐 거다.
그녀야 봉인이 아니더라도 ‘별을 읽는 자’로서의 숙명 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만 했지만, 제이드는 아니다.
역대 겨울나무의 현자가 그랬듯이 제자에게만큼은 자유를 선물하고 싶을 거다.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새로운 짐을 더하고 싶지 않을 테지.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날이 서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느긋하게 홍차를 마셨다.
“그저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당연히! …당연히 원할 리 없잖습니까. 자식 같은 제자입니다. 제가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입니다. 저 때문에!”
“그만하시죠.”
나는 흥분해서 자책하는 예카트리체를 말렸다.
“더 이상 말해봤자 의미 없이 상처 입을 뿐입니다.”
정말로 의미 없는 후회다.
제자도, 스승도 서로를 위하는 생각이 갸륵하지만, 내가 둘 사이에 끼이는 건 사양이다.
“자, 그럼 확인도 끝났으니 다시 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아니, 제이드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야 할까요?”
나는 예카트리체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미 그녀의 귓가에는 내 달콤한 독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 * *
“으으, 더럽게 춥네!”
나는 두꺼운 털가죽 옷을 부여잡으며 덜덜 떨었다.
결계 안인 겨울나무 숲은 그나마 따뜻했는데 결계를 벗어나자마자 죽을 만큼 추웠다.
자정이 넘어서 그런가?
그래도 제이드의 마법 덕분인지, 처음 결계 근처로 다가왔을 때처럼 맛이 갈 만큼 춥진 않았다.
따뜻하게 해주는 마법은 아니고, 냉기 저항력을 높이는 마법이라 기온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기온이 올라갈 겁니다.”
제이드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그 올라간 기온도 영하권이라 내 허약한 몸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빨리 외뿔의 서식 구역으로 가고 싶네.”
외뿔의 서식 구역은 제국의 영토와 인접한 곳으로 왕국과는 꽤 떨어져 있었다.
바스타유 산맥이 워낙 넓어 북쪽으로는 국경이 붙어 있지도 않은 제국으로 바로 넘어가게 된다.
사람 사는 곳과 가까워 지금 시기에는 아무리 추워도 기온이 영상을 유지할 거다.
다르게 말하면 몬스터가 미친 듯이 활동적일 시기라, 보통 사람이라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래도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도련님, 그런데 작전 구역으로 내려가다 보면 제국군과 마주치지 않을까요?”
길버트의 궁금증대로 제국 쪽에도 왕국의 블란츠바그령처럼 바스타유 산맥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영지가 있었다.
“계속 가면 아즐란 백작령이 나오긴 하는데, 거기는 전전대 마도팔현 중 둘이 영지와 산맥을 십여 킬로미터 정도 갈라버려서 일부러 토벌하러 산맥에 들어오지 않아서 괜찮아.”
내 말에 제이드가 덧붙였다.
“바스타유 대협곡 말씀이시군요. 기하(幾何)의 현자 에슐론과 진동(振動)의 현자 유프라테스가 힘을 합쳐 만든 협곡은 비행형 몬스터 외에는 대부분 막아주는 방벽이죠.”
물론 몬스터들이 협곡을 우회하여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사례도 있어 아예 퇴치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블란츠바그만큼 적극적이지 않다.
우리는 결계까지 왔던 것처럼 실루아가 조종하는 얼음 골렘을 타고 서쪽으로 산을 내려갔다.
프레시아는 직접 외뿔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했는지 한구석에서 명상을 했고, 길버트도 지도를 보며 작전을 복기했다.
제이드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유안.”
“왜 제이드?”
“역시 어제, 아니 시간상으로는 이제 그제군요. 그제 한 말은… 절 놀리려는 거짓말이죠? 생각해 보면 그때 유안은 짓궂은 장난을 치는 사람 같았습니다.”
정확하게 잘 봤다. 성실한 사람만 보면 왠지 모르게 속을 긁어대고 싶단 말이지.
내 나쁜 버릇이었다.
그리 오래 산 건 아니라지만 반평생을 은둔한 녀석답지 않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말은 전부 사실이다.
“내가 용기의 물약을 줬잖아.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는 직접 확인해 봐. 내가 백날 사실이라고 말한들 믿지 않을 거면서.”
내 장난기 섞인 말에 제이드는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했다.
“그건…. 조금 덜 독한 술은 없습니까? 뚜껑을 열자마자 냄새로 취하는 줄 알았습니다.”
일단 마실 시도는 해본 모양이었다.
“크~! 그게 좋은 건데 뭘 모르네.”
하긴, 내가 준 술은 자기 주량도 모르는 애송이가 마시기에 너무 독한 술이긴 하지.
“고지식한 네겐 딱 알맞은 도수니까 한번 마셔봐. 독하고 뜨거운 게 속이 뚫리는 느낌이라니까?”
의외로 범생이가 술에 맛 들리면 책보다 술을 가까이하는 법이다.
잘만 하면 좋은 술친구를 얻을 수도 있겠다.
“유안, 당신은….”
내가 낄낄 웃자 제이드는 뭐라 한소리하려 했다. 하지만 실루아의 말에 이어지지 못했다.
“작전 지역에 도착했어요.”
실루아는 얼음 골렘의 움직임이 멈추고 마력이 새어나가지 않게 주의했다.
골렘이 멈추자 다들 침묵하며 내 지시를 기다렸다.
“우선 외뿔의 무리를 찾는다. 찾는 건 나와 실루아가 할 일이니 다른 사람들은 대기해.”
실루아는 사전에 준비해 둔 파리 형태의 초소형 정찰 인형을 대량으로 꺼냈다.
“나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실루아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부탁할게.”
“알겠어요!”
천 마리에 달하는 파리 떼가 얼음 골렘 밖으로 빠져나가며 바스타유 산맥 서부로 퍼져나갔다.
“역시 파리형은 화질이 너무 안 좋아.”
“크기를 줄인 탓에 어쩔 수 없어요. 무리하게 열 감지 마법도 추가하느라 더 그렇고요.”
어두운 밤에 수색하는 거니 열 감지는 필수였다.
하지만 파리 인형이 보내오는 시각 정보에는 노이즈가 많이 끼어 있는 데다 숫자가 너무 많다.
역시 정찰에 편리한 인형은 어느 정도 크기가 있고, 마력파로 주변 지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박쥐형이었지만 이번 작전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대마수란 것들은 마력에 지나치게 민감한 탓에 경계심을 가지고 접근하기도 전에 도주해 버릴 수도 있다.
“유안 오빠가 수색 범위를 한정시키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겠어요.”
바스타유 산맥의 넓이는 어지간한 왕국 수준을 넘는다.
외뿔의 지배 영역만 해도 경기도 크기에 육박하니 주요 근거지를 파악해 두지 않는다면 파리 천 마리로는 수색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수색 범위는 어지간한 소도시 크기에 달한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실루아의 입에서 외뿔의 소식이 나왔다.
“외뿔 무리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검푸른 털과 발자국의 선명도로 보아 최대 2시간 이내 지나간 것 같아요.”
“위치는?”
“지도상 서(西), 3 다시 6 분면(分面). 아르스산 남동쪽 분지 지형이에요. 발자국의 방향은 북서쪽.”
“좋아, 내가 분지 북서쪽에서부터 수색지를 바꿀 테니 너는 남동쪽에서 올라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에 흐릿하지만 멀리서 이마에 기다란 뿔이 난 늑대 무리를 발견했다.
“찾았다.”
늑대 무리 사이, 어떤 개체보다 거대한 늑대가 보였다. 저 녀석이 대마수 ‘외뿔’이군.
흐릿한 형상으로는 외뿔의 위엄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외뿔의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주의하며 감시를 계속했다.
실루아는 파리 인형을 회수하며 얼음 골렘을 외뿔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외뿔을 찾았으니 작전을 시작한다. 다들 움직일 준비 해.”
내가 작전 시작을 선언하자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들 고생하자.”
내 말에 프레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교전이 시작되고 찻물을 끓이시면 식기 전에 수급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녀답지 않은 농담이었지만 당당히 웃는 그녀의 모습은 누구나 반해버릴 만큼 매력적이었다.
“기대하지.”
마력에 민감한 대마수답게 접근하기 위해선 마력을 완벽히 감추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프레시아는 실루아를, 길버트는 제이드를 업고 외뿔에게 접근했다.
마법사인 실루아와 제이드는 마법 없이 빠르게 움직일 수단이 없었다.
둘 다 제대로 단련한 덕분인지 순식간에 지근거리에 도착했다.
나도 질리안 오리지널에게 업혀 마력을 끌어 올려도 외뿔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한계선까지 접근했다.
감각이 뛰어난 외뿔이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최대 3킬로미터로 추정된다.
나는 실루아의 공방 설비로 개조한 코일건 석궁을 견착하고 광학 마법으로 외뿔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나비, 바람길 확인.”
-미야옹~!
“누니, 마력 최대.”
파지직!
두 정령이 내 마력을 매개로 포대자루에 담긴 마석을 집어삼켰다.
급성 마력 고갈 현상으로 살짝 현기증이 났다.
순간 외뿔이 놀라서 내 쪽을 바라봤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만큼 방대한 마력을 사용하면 눈치채는 모양이다.
하지만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격발!”
석궁에 걸린 마법 화살촉이 시위를 떠나며 코일을 지나 음속의 일곱 배 속도로 가속했다.
나비가 만들어둔 바람길을 따라 날아간 화살촉은 외뿔의 오른쪽 눈에 명중했다.
아니, 그 찰나의 순간 고개를 틀어 치명상을 피했다!
그 속도를 피하다니, 무슨 괴물인 거냐!
하지만 화살촉이 머리에 박힌 충격에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몸을 숨기며 접근했던 프레시아가 검을 들고 달려들어 외뿔을 공격했다.
동시에 제이드가 얼음 장벽으로 외뿔과 무리를 분리시켰고, 길버트와 실루아가 나머지 무리를 기습했다.
“아오오오오오-!”
산맥 전역에 외뿔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