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80화 (80/214)

제80화. 봉인과 대마수 (2)

숨결을 따라 하얀 입김이 코끝을 스쳐간다.

온통 새하얀 세상에 분홍 머리의 소녀, 일리우 아리사는 유쾌하게 웃었다.

“냐하하하하! 너무 춥잖아! 여기 정말 사람이 사는 거 맞아? 사람은커녕 몬스터도 제대로 못 살 것 같은데!”

봄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는 5월의 어느 날, 바스타유 산맥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나무의 현자가 지키는 봉인에 가까워진 탓이었다.

바스타유 산맥의 중심지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극한의 땅이었다.

“웃지 말고 빠, 빨리 굴을 파줬으면 좋, 좋겠는데, 우리 귀여운 아기 새 양.”

아리사의 뒤에 한껏 웅크린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는 덜덜 떨면서 느끼하게 윙크했다.

사내의 간절한 부탁에 아리사도 덜덜 떨며 말했다.

“지금 열심히 파고 있잖아. 냐하하핫! 기다려!”

아리사의 앞에선 새하얀 백골 병정들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 피난처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빨리 파고 싶으면 삽이라도 들고 도우라고! 늙은이!”

“어흠! 이 연약한 팔로 삽질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늙은이라니. 내게는 자반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그런 슬픈 소린 하지 말아줘. 우리 귀여운 아기 새 양.”

정 아니면 코드네임인 ‘아르카나 00, 광대’라 불러주길 바랐다.

그런 자반의 바람에도 아리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냐하하하하! 가뜩이나 추운데 소름 돋게 아기 새라고 부르지 말라고! 냐하하- 엣취! 추워! 다른 녀석들은 언제 오는 거야!”

아리사의 외침에 자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일단 오겠다고 확실히 답을 준 건 ‘연인’, ‘전차’, ‘매달린 사람’, ‘악마’정도지만, 다들 워낙 시간관념이 없고 제멋대로인 녀석들이라 모르겠군.”

어쩌면 일이 다 끝나면 올지도 모른다며 자반은 자조했다.

“쳇, 그나마 ‘탑’이랑 ‘마술사’, ‘여교황’, ‘여제’, ‘정의’가 빠릿하고 괜찮은데. 왜 하필 그런 비협조적인 녀석들로 배정된 거지?”

“‘탑’인 니벨을 비롯해 ‘마술사’, ‘여제’는 아직도 해결 못 한 왕후 탄핵 건으로 발을 못 빼지 않나. ‘여교황’이야 다른 일이 있고 말이야.”

특히 니벨은 본거지인 그림자 탑이 갑자기 위즐 백작의 공격을 받아 곤란한 처지였다.

“정의는? 그 녀석에게도 작전을 실행하라는 공문이 갔을 텐데?”

아리사의 물음에 자반은 고개를 저었다.

“이계의 구멍을 막은 봉인을 부수는 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라고 거절했다더군. 정의가 좀 정의롭지 않나.”

그렇게 말한 자반은 꽤나 괜찮은 말장난이었다며 스스로의 무릎을 쳤다.

“냐하하하핫! 그럼 누구는 세상을 위하지 않는다는 거야? 이기적인 녀석이네.”

“뭐, 우리 아기 새 양은 딱히 정의로 활동하는 건 아니지 않나?”

자반이 자조 섞어 묻는 말을 아리사는 깔끔히 무시했다.

“그럼 작전을 최대 일곱 명이 하는 건가?”

‘연인’은 두 사람이었으니 자반과 아리사를 포함해서 일곱 명이었다.

“그렇지. 다만 작전을 실행하는 것은 최소 네 명이 모였을 시점이라 일곱 명이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냐하하하하! 이 땅에서 네 명으로 겨울나무의 현자와 싸워야 한다니, 최악의 자살행위네.”

일곱 명이 불시에 기습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절반 이상은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넷은 의미 없는 자살 특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하하하, 그래서 개인적인 연줄로 ‘힘’과 ‘달’에게도 지원 요청을 했지. 물론 우리 주군의 명령도 씹어대는 녀석들이라 올지는, 푸엣취! 미지수지만 말이야. 크읍!”

어깨를 으쓱인 자반은 손수건으로 콧물을 닦으며 빨리 피난처를 완성하라 닦달했다.

아리사는 도와줄 게 아니라면 닥치라고 말하며 열심히 백골 병정들을 움직여 얼음 굴을 팠다.

* * *

내 설명이 끝나자 얌전히 내 말을 듣던 세 사람은 내게 할 말이 있어보였다.

가장 먼저 프레시아가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작전대로라면 제 역할이 가장 중요한데… 괜찮겠습니까?”

프레시아는 내 작전의 중역을 맡자 부담스러운지 망설였다.

하기야, 소설 속에서는 좋든 싫든 3년간의 처절한 실전을 경험했다.

왕자 유안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그 경험은 충분한 양분이 되어주었다.

지금의 프레시아는 그런 경험이 없으니 자신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괜찮아, 실수해도 길버트와 실루아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걸 감안해서 ‘외뿔’을 첫 타겟으로 잡은 거야. 외뿔 사냥으로 경험을 쌓아두라고.”

내 작전의 핵심은 대마수가 도망가지 못하게 발을 얼마나 오랫동안 붙잡느냐였다.

그동안 역대 사계의 현자들이 대마수를 잡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나치게 넓은 영역을 가진 대마수의 근거지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점.

다른 하나는 마력 반응에 민감한 대마수들이 현자의 접근을 쉽게 알아차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강하고 뛰어난 마법사라도 숙련된 사냥꾼만 못한 것이 마수 사냥의 본질이었다.

“외뿔은 다른 대마수와 비교했을 때 그렇게 빠르지 않아. 마력을 감추고 접근한다면 도망치기 전에 충분히 잡을 수 있어.”

가장 빠른 ‘번개 걸음’도 그렇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안개’나 땅을 파고 도망칠 수 있는 ‘철갑’도 잡기 힘들었다.

반면 외뿔은 늑대답게 무리를 이루고 있어 도망이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무리를 이루는 건 생존에 유리한 방식이었지만, 표적이 되었을 때 압도적인 강자에게 무리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외뿔의 검술이 초인에 필적하는 게 문제야. 예카트리체 씨가 나서준다면 문제없겠지만.”

예카트리체라면 혼자서도 초인에 이른 기사를 죽일 수 있다.

이 혹한의 땅에서 겨울나무의 현자는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달랑타가 경고하길, 아르카나의 습격에 대비하라 했습니다. 제 젊었을 때의 경험을 떠올리면 적어도 셋 이상의 간부가 기습해 올 겁니다.”

역시 그런가.

예카트리체가 봉인을 떠날 수 없다면 역시 대마수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건 프레시아와 제이드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대마수의 발목을 잡기에 제이드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실제로 프레시아와 격하게 대련했을 때 제이드는 방심하다 일격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역시 제대로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는 게 너밖에 없다, 프레시아.”

아마 외뿔의 능력은 한껏 약해져 있었던 붉은 눈보다는 강할 거다.

하지만 3년간 회복할 대로 회복한 소설 속에서의 붉은 눈보다는 확실히 약하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프레시아라도 실루아와 제이드의 보조가 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철저하게 외뿔의 무리를 배제하고 1대 1 상황을 만들어줄 테니까 마음껏 날뛰어.”

내 격려에도 프레시아는 긴장했다.

“작전 시작은 야행성인 외뿔의 무리가 잠들 무렵인 동이 틀 무렵. 서식지까지 이동하는 걸 감안하면 자정쯤 출발할 테니 두 사람은 그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해둬.”

자정쯤 되면 길버트도 영약을 다 소화해 낼 거고, 실루아도 충분히 회복한 다음일 테니 움직이기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프레시아는 휴식을 취하란 말에 알겠다면서도 몸을 풀겠다고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하루 이틀쯤은 자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체력을 지녔으니 크게 문제는 없겠지.

“저기… 아닙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죠.”

제이드는 내게 뭔가 말하려다 수면을 취해 두겠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퀴블러로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에 따르면 감정은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순서로 진행된다고 한다.

아마 한창 스승의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애쓰는 중일 거다.

거실에 나와 예카트리체 둘만 남자 예카트리체는 머뭇거리며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아, 실패했을 때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실패하게 되더라도 외뿔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어 상대적으로 추적이 쉽습니다. 그럼 제가 아는 초인이 한 명 있으니 불러서 돕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검귀를 이용할 수 있는 명령권 하나를 소모해야 했지만, 그래도 네 번이나 더 이용해 먹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대마수 토벌 때마다 데미웨이를 써먹기 위해 여유롭게 다섯 번이나 부릴 수 있는 권리를 받아둔 거니 아끼지 않고 사용할 생각이었다.

네 번이나 사용해도 한 번이 남으니 원래 데미웨이의 도움을 받을 일에 사용할 수 있다.

내 설명에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는데 실패했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프레시아 경의 실력은 제 제자와 싸운 흔적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그 어린 나이에 초인의 경지에 오른 건 놀랍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쓰게 웃었다.

“역대 겨울나무의 현자 중 당대 천하십검을 동원해 토벌을 시도한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패하더라도 별수 없는 거죠.”

물론 지금의 여건이 그 당시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천하십검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곳에 몇 개월이고 머물지는 않았을 테지만 나는 몇 개월이 되었든, 몇 년이 되었든 머물 각오가 되어 있다.

게다가 다른 사계의 현자와 달리 실루아라면 상성 문제에서 자유로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대마수의 저력을 무시할 수 없는 데다 아르카나의 공격까지 조심해야 하니 마냥 낙관할 수 없다.

“제가 은공께 묻고 싶은 건 다른 겁니다.”

“다른 거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라면 죄송합니다만, 혹시… 당신은 1왕자입니까?”

그 물음에 나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딱히 내 이름 외에 알려준 게 없으니 내가 1왕자라는 예카트리체의 추측은 달랑타의 정보에서 기인한 것일 터다.

그렇다면 달랑타는 1왕자에 대해 언급을 왜 했을까?

막혔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자.

달랑타는 아르카나의 공격을 예견했다. 즉, 아르카나의 정보를 입수할 루트가 있다.

그렇군. 그렇다면 달랑타는 그 정보 루트를 통해 아르카나가 1왕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르게 말하자면 아르카나가 1왕자를 암살하려 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결론을 내리자면 달랑타는 1왕자가 봉인을 계승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예카트리체에게 공유했다.

나는 예카트리체를 설득하기 위해 봉인을 보여줬으니 내가 1왕자라는 추론을 했다는 말이 된다.

위기다. 어쩌면 당장 예카트리체의 손에 죽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녀였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여 봉인을 다시 파묻어 버렸을 거다.

아르카나의 손에 봉인이 넘어갈 바에는 은인을 죽여 혹시 모를 사태를 예방하는 것이 현명했다.

은혜 따위 알 바 아니지 않은가.

그 죽어 나자빠질 은인이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

그녀가 날 죽이지 못할 이유를 생각하자.

…나는 계산을 마치고 싱긋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은 오히려 이용해 먹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 겁니까? 절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내 물음에 예카트리체의 표정이 굳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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