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봉인과 대마수 (1)
나는 대량으로 요리하고 소분하는 달랑타를 보며 물었다.
“어제 늦게 오시더니 바로 가시는 겁니까?”
제이드의 말에 따르면 달랑타가 이렇게 대량으로 요리하는 건 이곳을 떠날 때 하는 행동이라 한다.
요리를 못하는 예카트리체와 제이드를 위해 보존식을 만들어두는 거다.
내 물음에 봄꽃의 현자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가야지. 왜, 내가 젊은이가 주장한 대마수 토벌을 돕지 않아 섭섭한가?”
“그보다는 영감님이 갓 만든 요리를 더 못 먹는 게 섭섭하군요.”
아무리 예카트리체의 마법으로 급속 냉동한다 하더라도 갓 만든 밥과 비교할 순 없다.
요리사의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냉동된 것을 해동시키는 것과 차이가 컸다.
물론 해동시킨 음식도 어지간한 요리사는 엄두도 못 낼 만큼 맛있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내 대답에 달랑타는 유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핫! 요리사로서는 최고의 찬사군! 다들 내게 마법만 찾지, 요리는 뒷전이라 서운했는데 말이야.”
역시 스스로를 마법사보다는 요리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다운 말이었다.
달랑타의 말에 옆에서 열심히 주워 먹, 아니 간을 보던 예카트리체가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외쳤다.
“난 아니야! 꿀꺽! 나는 네 마법보다 요리가 더 필요해! 마법은 필요 없고 평생 내 식사를 차려줬으면 좋겠어!”
“그야 넌 요리를 못하니까 그렇지! 내가 그렇게 요리를 가르쳐 준다고 했는데도 맨날 공방에 처박혀서 마법만 판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올 때마다 이렇게 요리를 하고 가는 거라고!”
달랑타가 예카트리체의 귀를 잡아당기자 예카트리체는 울상을 지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아! 아파!”
“그리고 좀 아껴 먹으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내가 언제 다시 올 줄 알고 그렇게 먹는 거냐!”
“그치만 맛있는걸!”
달랑타는 오랜 친구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의지해 주는 게 싫지는 않은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 많은 아버지와 늦둥이 딸처럼 보였지만 둘의 나이 차이는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예카트리체의 귀를 놓아준 달랑타는 날 보며 말했다.
“도와주지 못하고 가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긴 조금 그렇지만, 대마수 토벌을 쉽게 보지 말거라.”
“알고 있습니다. 대마수가 잡기 쉬웠으면 진작 잡았겠죠.”
이계의 구멍이 열리고 지난 6백여 년간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지만 아직까지 잡지 못한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알고 있다면 다행이다만, 뭐 대마수 중 최강이라 불린 붉은 눈을 토벌한 당사자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말한 달랑타는 장난스럽게 “데미웨이, 그 꼬맹이와 힘을 합쳤겠지만.”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블란츠바그령의 인형 군단의 힘과 최후에 데미웨이가 이끄는 토벌대가 없었으면 그 영악한 괴물을 끝내 놓쳤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프레시아 혼자 도착했다면 프레시아는 내 안전을 가장 우선하느라 도망치는 붉은 눈을 쫓지 않았을 테니까.
“젊은이가 짠 작전이란 게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도 바쁜 사람이라 이만 가봐야겠군. 평소보다 훨씬 많이 요리해 뒀으니 마음 놓고 오래 머물게.”
얼마 전에 왔다 갔다고 했는데도 요리를 더 하고 가는 이유가 나와 내 일행들 때문이었나.
“그거 감사한 말씀이군요.”
“감사할 것 없네. 예카트리체나 제이드도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종종 산맥 아래로 내려가지만, 마법사란 족속답게 틀어박히기만 해서 걱정이라 말이야. 젊은이가 오래 머물면서 사회성이란 것 좀 넣어주게.”
예카트리체는 마법으로 음식을 얼리고 냉동 보관소로 집어넣으며 달랑타의 말에 투덜거렸다.
“괜한 참견이야. 휙휙!”
빨리 꺼지라는 듯 예카트리체가 손을 내젓자 달랑타는 키득거리며 마법 지팡이와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는 내게 작은 메달 하나를 건넸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위즐 백작가로 한번 찾아오게. 이걸 보여주면 푸대접하지는 않을 거야.”
이 메달은 귀족 가문에서 가문의 귀빈에게 주는 손님패 같은 거였다.
초대장 같은 것과 달리 특별한 일이 없어도 환영하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는 물건이다.
당연히 위세가 높은 대귀족인 위즐 백작가의 손님패는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마법명가인 만큼 마법사라면 천만금을 줘서라도 얻고 싶어 할 터였다.
“그런데 은퇴하신 분이 이런 거 막 뿌려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예카트리체의 은인이면 내 은인이기도 하니까. 메달에 걸어둔 마법 때문에 누가 줬는지 바로 알아볼 테니까. 가주 녀석이 내 손에 다리몽둥이가 부러지기 싫으면 환대하겠지.”
어차피 나중에 마법을 되찾은 아바스엘과 합류하면 위즐 백작가에 방문할 생각이었으니 귀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
행방불명되었던 이가 갑자기 찾아가는 것보다는 손님패를 가진 손님이 찾아가는 게 훨씬 조용할 테니까.
그의 말에 나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꼭 방문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가보마. 조심해라.”
달랑타가 떠나가며 한 말에 예카트리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달랑타가 떠나고 프레시아와 예카트리체, 제이드와 함께 중앙 거실에 모였다.
제이드는 고민이 심했던 건지, 아니면 잠을 설쳐 피곤한 건지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심하게 내려앉았다.
“왜 그러느냐?”
스승의 걱정에 제이드는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별것 아닙니다. 그냥, 그, 흥미로운 마법 술식을 봐서요! 네! 그래서 밤을 새워 버렸습니다!”
“흥미로운 마법 술식? 여기에 내가 모르는 술식도 있었나?”
예카트리체가 의아해하자 제이드는 다급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그의 시선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제 저와 마법에 관해 대화하다가 제가 익힌 마법 술식을 보고 설친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제자가 흥미로워할 정도라니. 저도 봐도 괜찮겠습니까?”
예카트리체는 눈을 반짝이며 궁금해했다.
제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짓말이 금방 탄로 나는 것 아니냐는 듯이 날 바라보자 나는 허공에 마법 술식 하나를 그렸다.
“기초 수준이지만 꽤나 파고들 만한 요소가 많아서 현자님도 해석에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허공에 그린 마법 술식에 제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이건, 대단히 정교하군요.”
“그러게요. 그러면서 간단하고 상징물의 배치가 절묘하네요.”
예카트리체와 제이드가 감탄하며 살폈다.
아퀼라의 마법 술식이니 흥미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제이드, 네가 한 거짓말을 커버하는 건데 그런 반응을 보이면 안 되지!
그러나 마법 술식에 빠진 예카트리체는 제이드의 반응에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술식을 지웠다.
“앗!”
“앗!”
집중하던 두 사제는 눈앞에서 술식이 사라지자 아까운지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은 봉인의 술식을 삼키고 도주한 대마수를 어떻게 잡을지 작전을 논의할 시간입니다.”
“그, 그렇죠. 그게 중요하죠.”
“그, 그렇습니다.”
두 사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눈에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간식에 눈이 돌아간 강아지같이 구는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고 테이블 위로 산맥 지도를 깔았다.
“바스타유 산맥 전도(全圖)입니다.”
내가 펼친 지도를 본 예카트리체와 제이드는 감탄했다.
“꽤 상세하군요. 등고선까지 제대로 된 걸 보면 축적도 잘 지킨 모양입니다.”
“약간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자세한 지도는 처음 봅니다.”
두 사람은 굳이 지도를 만들지 않아도 지리를 알았으나 지도로 보는 건 처음인 듯했다.
약간 다른 부분이 있는 건 지금부터 3년, 정확히는 2년 7개월 뒤의 지도라 그렇다.
1권 마지막 부록에 있는 지도를 그대로 그린 그림이었다.
“잡아야 할 대마수는 4마리. 북쪽, 서쪽, 동쪽, 중앙의 대마수입니다. 제 나름 조사한 대마수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세 사람에게 정리한 서류를 건넸다.
북쪽의 대마수, ‘번개 걸음’은 최고 시속 25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는 설표로, 가장 빠른 대마수다.
서쪽의 대마수, ‘외뿔’은 자신의 이마에 난 기다란 외뿔을 검처럼 사용하는 거대한 늑대로, 검술은 초인과 맞먹는다.
동쪽의 대마수, ‘안개’는 안개화가 가능한 거대한 박쥐로,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중앙의 대마수, ‘철갑’은 거대한 전갈로, 외골격이 너무 두꺼워 방어력이 높은 데다 독을 뿜어대서 접근조차 쉽지 않다.
“남쪽의 대마수, ‘붉은 눈’은 최강의 육신을 가진 거대 토끼였지만 이미 토벌했으니 넘어가죠.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추정 위치는 이 정도입니다.”
나는 지도 위에 각 대마수의 영역과 주요 서식지를 표시했다.
내 표시를 본 예카트리체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도 지난 5년간 점성술과 예지를 통해 간신히 알아낸 정보인데 이 정보를 어떻게?”
벌써 준비하고 있었나.
지난 6백여 년간 대마수를 잡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대마수들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한번 도망치면 따라잡기도 힘들 뿐더러, 경계를 하느라 적어도 10년 이상은 죽은 듯이 숨어 보내니 그동안은 이 넓은 산맥에서 대마수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대마수를 제이드와 프레시아가 소설 초반에 전부 잡을 수 있던 건 죽은 예카트리체가 대마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사냥 준비를 끝내놨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길러낸 그녀의 마지막 소망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제이드의 자유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글쎄요, 어쩌면 제 눈도 별의 끝에 걸렸는지도 모르죠.”
내 장난기 섞인 웃음에 예카트리체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지는 위험합니다! 특히나 단기간에 많은 미래의 정보를 얻는 건…!”
나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녀를 조용히 시켰다.
“걱정하시는 것처럼 위험한 수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진정하세요. 우선 제가 파악한 것과 현자님께서 파악한 것이 일치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말에 예카트리체는 잔소리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참으며 지도를 살폈다.
“…얼추 비슷합니다. 오히려 제가 파악한 것보다 자세하군요.”
당연하다. 이 정보는 그녀의 삶이 다하는 순간, 모든 제약을 풀어버린 최후의 예지로 알아낸 정보였으니까.
방대한 마력으로 억누른 틈 사이로 흘러나온 힘으로 점을 치는 것과 정보의 질이 다를 수밖에.
“그럼 이 정보를 기준으로 토벌 작전을 수립해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동의를 구하자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제가 몇 년을 더 들여도 이 정보보다 나을 거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은공께서 이계의 구멍을 닫겠다는 말씀이 허언이 아니셨군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당당히 선언했다.
“그럼요, 저는 허언은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이다.
나는 성격 나쁜 진성 거짓말쟁이다. 필요하다면 남들을 속이는 짓 따위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할 수 있다.
“자, 그럼 제가 구상한 토벌 작전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 타겟은 서쪽의 대마수, ‘외뿔’입니다.”
나는 소설 속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사용한 작전에 살을 붙여 설명을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