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10)
예카트리체는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명상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콜록! 콜록! 벌써 아침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잠이 사라지니 큰일이군.”
잔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외투를 걸치며 일과처럼 봉인과 결계를 점검했다.
평생을 지켜온 봉인과 결계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후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마도서를 집필했다.
“음, 역시 은공께 은혜를 갚으려면 마도구를 만들어 드리는 게 좋으려나.”
제자와 후대를 위한 마도서를 써 내려가면서 동시에 유안에게 줄 만한 마도구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붉은 눈의 마석과 실전되었던 비전서에 대한 값을 치를 만한 마도구가 없었다.
있다면 자신이 제이드에게 현자의 자리를 계승할 때 물려줄 마법 지팡이나 다른 비전서 정도인데, 비전서 값을 비전서로 갚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새로 만들어야 하나? 하지만 시간이….”
고민하던 예카트리체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우왕좌왕하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집필하던 마도서를 덮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프레시아 경?”
문 앞을 서성이던 사람은 유안의 호위 기사, 프레시아였다.
프레시아는 제자 또래였지만 예카트리체는 정중하게 대했다.
유안의 말에 따르면 프레시아 또한 붉은 눈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으니 그녀 또한 은인 중 한 사람이었다.
문이 열리자 프레시아는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늦었지만 어제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죄송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예카트리체는 프레시아가 무슨 사과를 할 만한 일을 했는지 몰라 눈을 굴렸다.
“아! 제이드와 싸운 것 말인가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제 제자의 잘못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니요, 물론 그것도 죄송하지만, 그 전에 무례하게 투기로 위협한 걸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응? 아! 그거 말인가요?”
프레시아의 말을 이해한 예카트리체는 그만 웃어버렸다.
“푸훗! 아, 실례했습니다. 그 일이라면 당신이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먼저 무례했던 건 저희였고, 당신은 호위로서 당연한 조치를 한 것이니까요.”
너무나 당연히 프레시아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 일로 사과를 할 거라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하러 온 건 당신의 도련님이 시켜서입니까?”
그렇다면 유안에게 직접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려 했다.
하지만 프레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도련님께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럼?”
“…어제 현자님의 제자분과 싸우고 나서 의문이 들더군요. 저는 과연 도련님을 위해서 싸운 것이 맞는가? 그저 호승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전에 나섰던 것은 그저 무례함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이요.”
스스로의 충성심에 확신이 들지 않는지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프레시아를 보며 예카트리체는 미소를 지었다.
“프레시아 경,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그녀의 물음에 프레시아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열다섯 살입니다.”
“그렇군요, 그 나이대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고민이에요. 프레시아 경, 사람은 하나의 감정으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랍니다. 마음속에서 서로 상반된 감정이 싸울 때, 자신이 옳다 생각한 감정만이 옳다는 확증 편향의 오류에 빠진 겁니다.”
보통은 신경질적인 형태로 발현되어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흔히 사춘기라 부르는 그 나이대의 감정의 모순이었다.
프레시아는 다소 온순한 형태로 사춘기가 발현되었을 뿐이다.
“확증 편향이요?”
프레시아가 이해를 못 하자 예카트리체는 눈앞에 서 있는 어린 소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했다.
“당신이 제 제자와 싸운 이유가 호승심 때문이라 해도, 당신의 도련님을 위하는 마음이 부정당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이 처음 화를 냈을 때도 저나 제 제자와 싸우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나요?”
“…아니요.”
그저 화가 났을 뿐이었다.
아무리 갑자기 온 손님이라도 자신의 주군을 추궁하듯 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신의 도련님께서도 당신을 꾸중했다면 제이드와 싸운 것을 꾸중했지, 제게 뭐라 한 것을 꾸중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맞나요?”
유안은 제이드와 싸운 것도 꾸중하지 않았다.
그저 악감정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와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당신이 화를 낸 것은 옳은 일이었어요. 오히려 그때 제 제자가 나선 것이 무례한 일이었죠. 당신이 반성해야 할 점은 젊은 혈기와 호승심을 주체하지 못했다는 점뿐입니다.”
사실 크게 잘못이라 할 순 없었다.
제이드나 프레시아가 보통의 사춘기 소년소녀였다면 말이다.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건 그 힘을 통제할 책임 또한 지고 있는 법이었다.
“혼란스러울 때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보세요. 사유(思惟)는 시야를 넓히고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니까요.”
예카트리체의 부드러운 말에 프레시아는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과가 아니라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도련님께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요? 그러고 보면 은공, 유안 씨는 몇 살이시죠?”
“얼마 전에 열일곱 살 되셨습니다.”
열일곱 살이란 말에 예카트리체는 속으로 놀랐다.
유안과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사회에서 구를 대로 구른 사람 같았는데, 자신의 제자 또래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괜찮아요. 주변에 또래 남자들 밖에 없으면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법이죠. 프레시아 경 또한 제 은인 중 한 분이니 언제든 편히 찾아오세요.”
연륜이 느껴지는 예카트리체의 말에 프레시아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부끄러운지 급하게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예카트리체는 왠지 자신의 제자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후후후, 딸이 있었어도 좋았겠어.”
결혼 따위는 해본 적도 없지만, 제이드를 기르며 아들을 키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은근 무뚝뚝한 녀석보다는 딸같이 살가운 제자를 들여보고 싶었다.
“뭐, 불가능하겠지만.”
그녀가 읽은 자신의 시간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 * *
나는 하품하며 방을 나섰다.
어제는 피곤했는지 생각보다 늦게 일어난 탓에 벌써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프레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아, 좋은 아침…이라기에는 조금 늦나?”
“아니요, 그래도 아직은 오전이니까요.”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전은 오전이었다.
“뭔가 표정이 밝아 보이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어제까지만 해도 왠지 죄책감에 시달리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평소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시선을 슬쩍 피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은 있어 보였지만 기분은 좋아 보이니 별일은 아니겠지 싶었다.
어제 사고를 치고도 또 사고를 치진 않았겠지.
“길버트는?”
내가 길버트를 찾자 프레시아는 길버트가 머무는 방 쪽을 보며 대답했다.
“어제 복용한 영약을 아직 소화 중입니다. 과연 블란츠바그 후작가의 비전 영약이더군요. 제대로 소화하려면 하루 종일 걸릴 것 같습니다.”
그게 그 정도로 좋은 약이었나?
프레시아가 감탄할 정도면 길버트의 성장을 기대해 볼 만할 것 같다.
“우으으… 일어나셨어요…?”
실루아는 방에서 나오며 지친 얼굴로 인사했다.
“밤새웠어?”
아니, 고작 밤을 새운다고 실루아가 지칠 리는 없는데?
실루아는 어지간해서 수면이 필요 없는 마법 생명체다.
“하아아암~! 네에…. 머리를 과하게 썼더니 피곤하네요. 여기 반성문이요.”
실루아는 한 손으로 들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종이 뭉치를 내게 건넸다.
“이게 반성문이라고?”
“네! 열심히 썼어요!”
아니, 어떻게 써야 반성문이 전공 서적 서너 권 분량이 되는 거지?
난 많아야 한 장 가득 써올 거라 생각했는데.
어디 보자, 한번 읽어볼까?
-제목 : 마법 분해 연산 실패에 대한 반성점 분석과 공간계 방위 마법의 재구축 방법론에 대한 고찰
반성문에 제목을 다는 것은 둘째 치고, 무슨 제목이 논문 같냐.
심지어 제목 아래에는 ‘목차’와 ‘소제목’이 달려 있었다.
-(전략)…그리하여 ‘겨울나무의 현자’의 방위 공간 구성은 시공간 동결성122)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은 공간계 마법의 대전제인 드미트리크론의 마력방정식123)과는 맞지 않는데, 이때 에슐론의 상징124)과 달리아나의 신성력 분석125)의 공간적 요소를 차용하면…(후략)
반성문에 마법식과 각주가 도대체 몇 개씩 달려 있는 거야?
대충 반성문을 훑어본 결과, 실루아가 예카트리체의 방위 마법을 어떻게 분석하다가 실수했는지, 어떤 식으로 했어야 실수를 막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무엇인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래서야 반성문이라기보다는 논문, 아니 마법서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이것만 있으면 예카트리체의 방위 마법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시공간 동결이라, 흥미롭긴 하네.
“어… 음, 고생했네.”
내가 원한 반성문은 아니었지만 일단 고생한 것 같아 노고를 인정해 줬다.
그러자 실루아는 스스로도 뿌듯한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유안 오빠예요. 처음에는 왜 이런 걸 시키는지 몰랐지만, 반성문을 쓰다 보니 제가 어느 부분에서 실패했는지 명확히 보이더라고요!”
아니, 뿌듯해하지 말고 반성하라고!
마법을 배우지 말고 집을 반쯤 날려먹은 걸 죄송해하란 말이야!
아이고, 머리야.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루아는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아암~! 그래도 시간이 너무 빠듯했어요. 저는 들어가서 잠깐 자도 될까요?”
“…그래, 수고했다. 다음에는 실수하지 마.”
“네~!”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실루아가 안으로 들어가자 타이밍 좋게 제이드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숙취?”
내가 너무 독한 술을 줬나?
싸구려 브랜디를 내가 한 번 더 증류한 술이라 가볍게 60도가 넘을 테니 주량을 모르면 숙취로 고생할 만했다.
“아닙니다! …그냥 수면 부족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술을 안 마셨다니, 아직 예카트리체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이드는 그런 말을 들었다고 바로 따져 물을 정도로 신중하지 못한 성격은 아니었지.
신중하다는 건 때로는 사서 고생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망설이기보다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저런, 고생이 많군.”
내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제이드는 마치 네 탓 아니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를 보며 말했다.
“마침 잘 나왔네. 슬슬 작전을 논의해야지.”
“작전이요? 무슨 작전을 논의합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마법 주전자를 꺼내 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무슨 작전이긴, 당연히 봉인의 마석을 삼키고 튄 대마수들을 사냥할 작전이지.”
내가 말했지 않았었나?
난 이계의 구멍을 닫기 위해 여기 온 거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