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77화 (77/214)

제77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9)

예카트리체는 겨울나무 숲에서 구한 약초로 차를 우려 달랑타에게 건넸다.

“향이 좋네. 맨드레이크의 세 번째 꽃잎을 우린 차인가?”

“이 땅은 음기가 맺히기 쉬운 덕분에 구하기 쉽잖아.”

그녀의 말에 달랑타는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다른 건 다 안 부러운데 희귀 재료를 쉽게 수급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부럽네.”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바스타유에는 각종 희귀한 마법 재료가 자라났다.

하지만 산맥이 워낙 넓어 재료가 있는 곳을 찾기 힘든 탓에 예카트리체는 일부러 환경을 조성해 희귀한 재료를 수급했다.

“후후후, 유일한 장점이지.”

제자나 손님 없이 단둘이 모인 오랜 친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봉인을 지키는 예카트리체에게는 제자를 길러내는 것 외에는 특별한 화젯거리가 없었지만, 세상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달랑타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넘쳐났다.

달랑타는 이 지루하고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봉인을 지켜오는 예카트리체를 위해 항상 신기한 것들을 기록하고 챙겨왔다.

이계의 봉인을 지키는 일은 사계의 현자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일이었으나, 여러 이유로 대대로 겨울나무의 현자가 책임지고 지켜왔다는 부채감도 있었다.

그런 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예카트리체는 불평 없이 항상 재미있게 달랑타의 여행기를 들어줬다.

“음, 이번에는 식사 중에 할 이야기를 대부분 해버려서 곤란하네.”

“저번에 방문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까.”

달랑타의 엄살 섞인 한숨에 예카트리체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맨드레이크 꽃잎차를 음미하며 물었다.

“그래서 연락도 없이 갑자기 방문한 이유는 뭐야?”

그녀의 물음에 달랑타는 웃음기를 지웠다.

“드미트리크론이 아르카나에 대한 정보를 물어 왔어.”

아르카나의 이름이 나오자 예카트리체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해졌다.

“천공 도시에서 잘 내려오지 않는 드미트리크론이? 역시 아르카나의 마수가 거기까지 미쳤나.”

“그건 예상했던 바잖아. 마법사의 성지라 불리는 도시니 유능한 마법사를 포섭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 그래서 드미트리크론이 무슨 정보를 물었는데?”

예카트리체의 물음에 달랑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르카나에서 ‘판도라’의 봉인을 계승한 듀플리온의 혈족을 찾은 것 같아.”

달랑타의 말에 예카트리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봉인을 계승한 혈족이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랑타는 친구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지례짐작하며 말했다.

“네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해. 아르카나 녀석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으니. 드미트리크론의 귀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정말 봉인의 혈족을 찾은 게 확실해?”

예카트리체가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자 달랑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나도 처음 드미트리크론에게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었어. 하지만 정황 증거가 너무 명확해.”

“정황 증거? 너랑 드미트리크론도 누가 봉인을 계승한지 안 거야?”

예카트리체의 물음에 달랑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듀플리온 왕국의 제 1왕자다.”

“1왕자?”

“그래, 올해 초에 1왕자를 노린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어. 그것도 왕궁에서 말이야.”

경비가 삼엄하다 못해 검호 호레이즌이 지키는 왕궁에 암살자가 잠입한다는 건 보통 조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자 암살은 역사상으로 봤을 때 꽤 흔한 일이잖아.”

예카트리체의 반론에 달랑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왕자가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왕위 계승이 유력한 경우에나 그렇지, 현 1왕자는 뒷배가 전혀 없는 데다 세력도 없다.”

게다가 유약하고 야망이 없기로 유명해서, 왕세자가 정해지면 쫓겨나 시골에서 근근이 살다 죽을 전형적이고 평범한 왕자라 덧붙였다.

달랑타의 말에 예카트리체는 더 혼란스러웠다.

유약하다니, 그녀가 본 유안의 인간상과는 전혀 달랐다. 때문에 예카트리체는 그가 잘못 알고 있거나 아르카나가 잘못 짚은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왕자는 약 두 달 전 요양을 위해 휴양 도시로 향하다가 왕후가 보낸 암살자들과 교전 후 실종 중이야.”

“1왕자가 실종?”

“암살자의 시체에서 왕후의 인장이 찍혀 있는 명령서가 발견되었어. 그로 인해 현재 왕궁은 왕후의 탄핵을 놓고 정치적 혼란으로 가득하다고 하더군. 제국에 심어져 있는 아르카나가 황제를 어떻게 구슬렸는지, 제국의 후작도 정쟁에 개입한 모양이야.”

달랑타의 말은 평생을 은둔하며 살아온 예카트리체에게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아무튼, 드미트리크론도 1왕자의 실종과 아르카나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해 수도로 급하게 향했어. 아마 지금쯤이면 수도에 있는 우리 집에 머물면서 조사 중이겠지.”

한숨을 내쉰 달랑타는 맨드레이크 꽃잎차를 마시며 말했다.

“1왕자가 아르카나의 손에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아마 실종된 것도 그들이 납치한 걸 거야. 그래도 완전히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이 들 테니 중요한 건 다른 거야.”

“중요한 게 다른 거라고?”

“그래, 드미트리크론은 1왕자의 실종으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막기 위해 아르카나가 손을 쓸 거라 예견했어.”

그 말에 예카트리체는 미간을 좁혔다.

“사계의 현자들은 각자 다른 문제들을 떠안고 있지만 겨울처럼 표적지가 대놓고 노출되어 있지는 않아. 녀석들이 가장 먼저 노린다면….”

“이곳이겠지. 지난 역사가 증명하는 바야.”

애초에 이계의 구멍을 연 것도 아르카나다.

역사적으로 아르카나는 사계의 현자의 견제가 두려울 때면 항상 사계의 현자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 봉인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른 현자들은 적극적으로 돕지 못했다.

“이 땅의 결계가 강하다고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한탄해야 할지 모르겠다.”

6백여 년 간 대대로 계승하며 쌓아온 결계의 힘은 너무 비대해졌다.

봉인을 보호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이 땅에서 다른 계절의 현자들은 예카트리체의 허락 없이는 숨도 쉬기 힘들 정도였다.

달랑타는 그나마 겨울을 누르는 봄이라 저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예 상극인 여름 열매의 현자인 드미트리크론이나 겨울에 눌리는 가을 낙엽의 현자는 저항조차 불가능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아르카나가 노린다면 이곳만은 아닐 거야. 델레브리온은 괜찮아?”

델레브리온은 현재 봄꽃의 현자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무는 지역이었다.

“그곳 문제는 거의 다 해결해서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다시 가봐야지. 아샤에게 봄꽃을 계승했어도 제자는 언제나 부족해 보이는 법이더군.”

“마찬가지야. 나도 제이드에게 겨울나무를 계승해야 하는데 말이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 공감하며 웃었다.

“뭐, 후계자감도 못 찾은 드미트리크론이 들으면 화내겠지만.”

“후후후, 그러게.”

다 식어가는 찻잔을 비운 달랑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해, 예카트리체. 감이 좋지 않아. 어쩌면… 아니, 아니야. 미안하다.”

말을 하던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예카트리체는 자신의 친구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곧 그녀가 내다본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달랑타는 이번에 일어날지도 모를 아르카나의 공격이 그 운명의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몸조리 잘해. 제이드가 잔기침이 심해졌다고 걱정하더라.”

“알았어, 조심할게.”

예카트리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 끝에는 작은 혼란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창밖은 어두웠고, 날은 매섭도록 추웠다. 봄이 오지 않는 이 땅에 봄은 언제 찾아올 것인가.

아침이 되거든 손님과 대화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 * *

제이드는 굳은 표정으로 날 노려보듯 바라봤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이 심하십니다.”

그래도 방금 사과를 해놓고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생각은 없는지 불편한 심기만 내보일 뿐이었다.

“글쎄, 과연 농담일까?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마시던 브랜디 섞은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물음에 물음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 통성명할 때 의술서를 본다고 했지? 열심히 배워두면 좋긴 하지만 아직 겨울나무의 현자를 계승받지 못했는데 마법 외에 다른 데에 한눈팔아도 괜찮나?”

내 질문이 다소 뜬금없었는지 제이드는 미간을 좁혔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저는 이미 토대를 다 쌓았으니 그 위에 의지를 세우는 건 제 뜻에 달렸다 하셨습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말 한번 어렵게 하네. 기초는 다 배웠으니 응용은 스스로 익히란 말 아니야?”

“그렇게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나는 웃으며 아공간 마도구 식자재 창고에서 독한 싸구려 술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 가지 묻겠는데, 의술을 익히기 시작한 건 네 의지냐? 아니, 네 의지였을 게 분명하니 괜한 물음이었군. 네 스승님이 굳이 익히게 시켰을 리는 없으니까.”

춥다고 계속 술을 마셨더니 나도 살짝 취한 모양이다. 주의해야지.

“그게 무슨…?”

제이드는 이해하지 못한 듯 날 바라봤다.

“너도 사실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네 스승의 병을 가만히 두면 위험하다는 걸 말이야. 직감하고 있으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그저 외면하고 싶어서 눈을 돌리고 있는 거지.”

그럼에도 성실한 그는 의술을 익혔다.

본능적인 깨달음인지, 아니면 간절한 발버둥인지는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이대로 직시하지 못하면 끝에 남는 건 후회뿐이다.

“네 스승님은 이미 스스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계시다. 그리고 굳이 스스로의 운명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려는 분도 아니시지.”

그건 나보다도 제이드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제이드라는 재능 넘치고 성실한 후계자를 길러냈으니, 예카트리체라면 충분히 오래 살았다며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테지.

“네 스승님과 모든 걸 내려놓고 진솔한 대화를 나눠봐. 그러지 않으면 분명 후회할 테니까.”

적어도 소설 속의 제이드는 후회했다.

조금 더 진솔하게 스승과 이야기했어야 했다고, 당신을 그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어머니로 생각했다고. 어머니께 사랑한다 말했어야 했다고 말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싸구려 독주를 제이드에게 밀었다.

“용기의 물약이다. 무언가 두려울 때 마시면 아주 효과가 좋지. 아, 떨린다고 너무 과용하지는 마. 마법사가 이성을 잃어서야 되겠어?”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혼이 나거든 날 찾아와. 네 스승님을 살릴 방법을 같이 고민해 줄게.”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정말 그렇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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