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76화 (76/214)

제76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8)

나는 손가락을 튕겨 내 피 속에 새겨진 봉인 마법진을 잠재웠다.

예카트리체같이 지나치게 뛰어난 마법사에게 오랫동안 보여 주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아, 아앗!”

예카트리체는 마법진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아쉬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사계사재(四季四災)의 모든 정수가 집약된 마법진은 현자의 경지에 오른 그녀 또한 쉽사리 접할 수 없는 기연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마법진을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겨울나무의 현자가 새긴 마법진 하나를 파악하는 것도 벅찼을 시간이다.

“제 피로 계승된 마법진은 비석의 봉인을 지키는 축이자 그 자체로 열쇠가 되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로 사용하기 위해선 당신을 죽여야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내가 죽고 다음 봉인 계승자에게 마법진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빈틈을 비집고 마법진을 낚아채 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법진을 채내 가도 봉인은 세계 곳곳에 되어 있었으니 바로 봉인을 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는 아르카나의 전력을 쏟아 부어도 3년 이상의 준비가 필요했다.

물론 내 피에 새겨진 마법진을 열쇠 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법이라 정공법으로 봉인을 푸는 방법도 존재했다.

실제로 아르카나는 두 가지 모두 사용하고 있었는데, 정공법은 약 350년에 걸쳐 현재 진행 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공법을 완성하는 것도 아마 얼마 남지 않았다.

소설 속에선 아르카나가 편법으로 봉인을 풀었기 때문에, 그저 편법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오래 남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아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습니다. 제 몸에 새겨진 봉인은 제 일행들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내가 에둘러 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알겠습니다. 달랑타에게, 아니 다른 사계의 현자들에게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굳이 아르카나가 내 몸에 봉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만약 알렸다가는 다른 사계의 현자들이 날 죽이려 들 수도 있었다. 예카트리체는 그러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봉인을 낚아채는 것에도 준비가 꽤나 필요했다.

아르카나가 대비하기 전에 날 죽여 봉인을 무작위 전이시켜 버린다면, 봉인은 무수히 많은 시조의 후손들 사이로 다시 파묻히게 되는 셈이 된다.

“어떻습니까? 제가 아르카나와 적이라는 게 증명되었습니까?”

내 장난기 섞인 미소에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사과했다.

“증명되었습니다. 은인께 괜한 의심을 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내가 죽음의 운명을 비튼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방식이든 아르카나와 붙어먹지 않았다는 사실만 증명하면 되었으니 되었다.

“의심하신 것까지 해서 두둑이 갚으시면 됩니다.”

내 진담에 그녀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재미있다며 웃었다.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농담 아닌데? 강제로 살려서라도 뽑아먹을 건데?

* * *

예카트리체의 공방에서 단둘이 이야기하고 나오자 다들 씻고 멀끔한 모습으로 나와 예카트리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냐?”

달랑타는 마법으로 따뜻한 식사를 식탁 위로 옮기며 물었고, 예카트리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겨울나무의 현자의 이름을 걸고 보증할게. 이분은 적이 아니야.”

현자의 이름을 걸자 제이드는 놀라서 자신의 스승을 바라봤다.

현자의 이름이란 그리 쉽사리 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예카트리체는 제자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언했다.

“제이드. 나는, 아니 우리는 유안 씨께 쉽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니 방금 전과 같이 은공(恩公)이나 은공의 일행에게 무례를 저지른다면 널 용서하지 않겠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어안이 벙벙해졌는지 멍 때리던 제이드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식사나 하자고.”

달랑타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다.

제이드와 내 일행들은 아직도 나와 예카트리체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식사를 했다.

어색하고 과묵한 분위기가 식사 자리를 짓누르자 분위기를 참지 못한 달랑타는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과거에 있었던 괴물을 퇴치한 이야기나, 전쟁터에서 있었던 웃긴 일을 비롯한 각종 모험담에 나는 맞장구를 쳐주며 식사를 이어갔다.

“이 소스 진짜 맛있네요. 석류로 만든 겁니까?”

“오, 알겠냐? 화이트스톡과 브라운스톡을 배합한 다음, 주정을 강화한 석류 와인으로 포인트를 줬지.”

“달콤하면서 산미가 감도는 게 고기 요리랑 잘 어울리네요.”

내가 요리 재료를 맞히자 달랑타는 신이 나서 요리법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예카트리체도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타입이 아닌 탓에 식사 내내 나와 달랑타만 떠들어댔다.

“이렇게 만족스런 식사는 오랜만입니다.”

“자네도 꽤나 요리에 식견이 있구만. 마음에 들었어.”

덕분에 달랑타의 호감도만 실컷 올렸다. 그래도 요리가 맛있던 건 사실이었다.

나중에 레시피 좀 알려달라고 할까?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달랑타는 예카트리체와 할 말이 있는지 둘이 어딘가로 향했고, 나는 거실에서 질리안 45호가 타주는 홍차를 마시며 길버트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던졌다.

“길버트, 이거 받아.”

상자를 받은 길버트는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은색 반점이 있는 검은 환약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뭡니까? 저번에 도련님께서 드시던 거랑 비슷하게 생겼네요.”

그야 같은 거니까 그렇지.

눈썰미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블란츠바그 후작가의 비전 영약, 실버 블룸이야.”

“와, 이게 그 유명한 검귀를 만들어낸 영약이에요?”

길버트는 신기한지 영약을 바라봤다.

“그게 만들어낸 건 아니겠지만 한 몫은 했겠지.”

“그런데 이건 왜 주시는 겁니까?”

순진무구한 그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기사에게 기사 전용 영약을 왜 주겠어? 당연히 먹으라고 주는 거지.”

“아하, 먹으라고… 네?”

길버트는 놀라서 날 돌아봤다.

“이 귀한 걸 제게요?! 아니, 그래도 저보다는 프레시아 경이 먹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물음은 언뜻 올발랐다. 약한 자신보다야 강한 프레시아가 먹는 것이 더 효율이 좋지 않겠냐는 기특하고도 바보 같은 양보였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먹어. 명령이야.”

“하지만….”

길버트는 프레시아를 흘끔 바라봤다. 그녀가 더 오랫동안 날 보필했으니 눈치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길버트, 사람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어. 프레시아가 없을 때는 너 혼자 날 지켜야 한다. 안 그러느냐?”

내가 동의를 구하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강해져야 날 지킬 수 있지 않겠어?”

“그렇습니다.”

“길버트,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건 좋아. 하지만 지금부터 남에게 강해지는 것을 양보하는 건 나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해라. 그 누구보다 강해져서 날 지키는 것만 생각해.”

길버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방에 들어가면 바로 복용해. 프레시아, 너는 길버트가 영약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줘.”

“예, 알겠습니다.”

나는 섭섭해할 수도 있는 프레시아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네 것도 준비는 되어 있다. 당장 주지 않는 건 네 잘못에 대한 벌이라 생각해라.”

너무 과격하게 싸우긴 했지만, 진심으로 악감정을 가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 아마 호승심을 주체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괜히 혼내서 성장 동력을 저해하는 것보다는 그냥 넘어가는 게 좋다.

“벌을 내렸으니 제이드와 싸운 건 이것으로 넘어가마. 아, 그리고 실루아는 내일 밤까지 반성문 써와.”

“네?!”

갑자기 불똥을 맞은 실루아는 놀라서 날 바라봤다.

“반성문 안 써오면 혼날 줄 알아.”

“프레시아 언니는 그냥 넘어가셨으면서!”

“프레시아는 그래도 서로 동의하에 싸운 거고 큰 피해 없이 끝났지만, 넌 남의 집을 날려먹을 뻔했잖아! 쓰읍! 혼난다!”

“히잉~!”

실루아는 울상을 지으며 펜과 종이를 들고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울상을 짓는다고 오냐오냐할 생각은 없다. 원래 오냐자식이 후레자식이 되는 법이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실루아의 뒷모습에 프레시아는 내게 말했다.

“도련님, 실루아의 말이 맞습니다. 도련님께 허락을 맡지 않고 호승심에 사사로운 싸움을 했으니, 제대로 된 벌을 주세요.”

그냥 넘어가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벌을 청하다니 의외였다.

나 같았으면 좋다고 넘어갔을 텐데 말이다.

그녀의 부탁에 나는 물음으로 답했다.

“프레시아, 제이드와 싸운 것은 호승심 때문이었나?”

“…예, 그렇습니다.”

“악감정은?”

“….”

프레시아는 침묵했다.

“왜 대답이 없어?”

“없…습니다. 다만 느끼한 면상이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그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제이드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충분히 미소년이었다.

다만 웃는 모습이 느끼한 게 재수 없긴 했다.

내가 동의하자 프레시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에서 두 사람은 연인이 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래도 앞으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 봐. 친해져서 나쁜 건 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벌을 원한다면… 너도 반성문이나 써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생각해 봐.”

“제가 해야 할 일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어서 방으로 가 길버트에게 실버 블룸이나 먹이라고 손을 내저었다.

애를 가르치는 선생도 아니고 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물론 애들 나이를 생각하면 딱 사춘기 무렵이니 별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나는 홀로 거실에 남아 홍차에 브랜디를 섞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무슨 볼일 있습니까?”

내 물음에 기둥 뒤에서 제이드가 나왔다.

“아하하하,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면서 느끼한 면상이 재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원래 남의 말을 엿듣다 보면 뒷담화도 듣는 법입니다. 감안해야죠.”

아마 프레시아도 제이드가 엿듣고 있다는 걸 알고 그냥 이야기한 걸 테지.

제이드는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 말씀 편하게 하십쇼. 스승님께서 유안 씨를 은공이라고 칭하시기도 하셨고, 나이도 저보다 많으시니까요.”

“고작 한 살 차이 가지고 유난은. 그럼 난 편하게 말을 놓을 테니 너도 놓고 싶으면 놔, 제이드.”

내 권유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리 오래 살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평생을 존댓말을 하고 살아서 그런지 반말은 어색하네요.”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말도 습관이다. 주변에 또래가 있어야 반말도 나오는 법이었다.

나는 술병을 들며 제이드에게 권했다.

“술 한잔할래?”

권유을 들은 제이드는 호기심이 동했는지 침을 삼키며 고민하다가 거절했다.

“술이란 게 궁금하기는 하지만, 혼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술까지 마시면 스승님께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래서 내가 혼자 남기까지 기다렸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 물음에 제이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이계의 구멍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제가 마력으로 압박했던 걸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겨울나무의 현자님께서 내게 사과하고 오래?”

내가 짓궂게 묻자 제이드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한번 혼내신 일을 다시 꺼내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저 프레시아 양과 한 바탕 싸워보고 나니 제가 괜한 자존심을 부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싸움에 있어 호승심이 앞선 순간 스승을 위한다는 마음은 전부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고 씁쓸하게 웃어 보인 제이드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유안 씨가 은공이라서가 아니라, 무례를 저지른 한 사람으로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역시 근본적으로 성실한 녀석이었다. 아아, 또 안 좋은 습관이 나올 것 같다.

그의 사과에 나는 브랜디가 들어간 홍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말을 편하게 하라고는 안 할 테니 존대는 빼고 그냥 유안이라고 불러. 그럼 사과를 받지.”

내 말에 제이드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유안.”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내가 이어서 한 말에 표정이 굳었다.

“그런데, 제이드. 네 스승님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나?”

나는 악동같이 미소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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