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7)
순간 동요했다. 맥이 빠르게 뛰었고, 온갖 가능성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두근, 두근, 두근.
‘진작’ ‘죽었어야’ ‘운명’ ‘당신’ ‘어떻게’ ‘살아 있는’
나는 심장이 세 번 뛸 사이 예카트리체의 말을 해체하고 내가 가진 수많은 정보와 대조해 세 가지 가설을 추렸다.
첫 번째 가설, 예카트리체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얻은 미지의 죽을 만한 요소를 발견해 냈고, 그 요소는 날 진작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다.
두 번째 가설, 예카트리체는 미래 예지나 관상 등으로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고, 소설의 내용인 내 죽음을 읽어냈다.
세 번째 가설, 예카트리체는 아르카나가 날 죽이려 한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어째서 내가 살아 있느냐 물었다.
나는 목에 걸린 로사리오를 만지작거리며 세 가지 가설을 검토했다.
첫 번째 가설의 경우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운명’이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을 거다.
놀리는 게 아니라 순전히 걱정하는 거라면 무슨 이유 때문에 위험하다고 직설적으로 말했겠지.
두 번째 가설의 경우 가능성이 크다.
소설 속의 제이드는 종종 스승을 회상할 때 스승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고 했다.
제이드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지만, 천문이나 관상으로 사람의 운명을 읽어낼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가설의 경우 다시 세 가지 가능성으로 나뉜다.
예카트리체가 내가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의 협력자였을 경우.
적으로서 아르카나의 정보를 세세히 알아냈을 경우.
…그리고 그녀도 나처럼 소설 <겨울나무의 현자>를 읽었을 경우.
나는 평정을 가장하며 물었다.
“제가 죽었어야 할 운명이라, 흥미롭군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세 가설 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이용하면 그만이다.
예카트리체는 내 물음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불쾌하게 들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제게는 별을 통해 사람의 운명을 읽는 능력이 있습니다.”
“별을 읽는 자.”
내 말에 예카트리체는 놀라서 날 바라봤다.
“아십니까?”
“예, 제가 책을 꽤 읽어서요.”
별을 읽는 자, 악마의 속삭임을 듣는 자, 죽음을 읊는 자 등 부르는 호칭은 많았지만 모두 하나같이 극히 희귀하게 태어나는 선천적 예지 능력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아르카나의 예언가 아르카나 10, ‘수레바퀴’ 또한 별을 읽는 자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가설이 맞는 건가?
알 수 없다. 그녀가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핫리딩과 바넘 효과를 이용해 예언가 노릇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설령 거짓이 없다고 해도 정보를 의도적으로 은폐해 속여 넘기는 건 흔하다 못해 고전적이었다.
“별을 읽는 자는 단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래를 아는 것은 그만한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죠."
예언가는 단 한 번의 예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선천적 예언가는 자신이 미래를 보고 싶지 않다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살 수 있었던 건 전대 겨울나무의 현자이셨던 스승님께 거둬져 제 선천적인 힘을 봉인하는 법을 익히고, 타인과의 만남을 극단적으로 줄인 덕분이죠.”
예카트리체는 지금까지 봉인을 풀고 예지를 사용한 것은 후계자감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딱 한 번뿐이라 했다.
그렇게 찾은 후계자가 제이드란 말이군.
“물론 봉인이라 해도 멋대로 예지가 튀어나오지 않게 누름돌로 막아놓은 것에 불과한지라, 때때로 흘러나오는 힘으로 사람의 운명을 읽기도 합니다. 나름 통제하겠다고 점성술을 배우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게 죽었을 운명이라 하셨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왜 이걸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지는 이해했습니다.”
“…예? 아직 어째서 은혜와 당신의 운명이 상관있는지 설명을 다 안 했는데요?”
의아해하는 예카트리체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요는 제가 ‘아르카나’, 그 개새끼들과 붙어먹었는지 궁금하시다는 것 아닙니까?”
내 직설적인 말에 예카트리체와 달랑타는 놀라서 날 쳐다봤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사람의 운명을 뒤트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한 녀석들은 아르카나 정도밖에 없으니, 제가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아르카나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르카나에게도 사람의 운명을 뒤트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날 죽이려 드는 거고.
사실 운명을 비틀 만한 괴물들은 아르카나 외에도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자.
예카트리체는 놀라는 한편 흥미로운 듯한 시선으로 날 훑었다.
“말씀대로입니다. 당신은 6백여 년 전 이곳에 이계의 구멍을 뚫은 자들, 아르카나와 적이라 밝혔습니다만 의심이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의심이 가는 사람을 잘도 안으로 들였습니다?”
내 물음에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그야 당신이 가진 붉은 눈의 마석은 진짜였으니까요. 그리고 이 땅은 겨울나무의 현자가 지배하는 땅입니다.”
그녀의 시선 끝에 투명한 얼음 같은 살의가 맺혔다.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은 막 이곳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압박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적이라 판명되었으면 나와 내 일행들을 죽일 생각이었군.
붉은 눈의 마석을 가져오길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이렇게 대화도 못 해보고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좋습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내가 활짝 웃자 예카트리체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벙찐 얼굴을 하다 웃었다.
“후후후후, 당신은 재미있는 분이군요. 나름 위협한 건데 말이죠.”
“그러니 마음에 든 겁니다. 당신이 아르카나와 확실히 적대적이란 말이니까요. 더더욱 이계의 구멍을 닫고 당신을 자유롭게 풀어 줘야겠습니다.”
같이 다니는 동료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녀는 확실히 내게 이롭게 움직일 거다.
“그거 고마운 말이군요. 하지만 그 전에 제 의심부터 풀어야 할 겁니다.”
“오해를 푸는 거야 간단한 일입니다. 다만 증명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했으면 합니다.”
내 부탁에 달랑타는 미간을 좁혔다.
“나는 못 믿겠다는 게냐? 자네가 예카트리체와 알게 된 것도 오늘이지 않나? 신용을 하자면 위즐 가문을 백작으로 만든 내가 더 신용을 받아야지.”
“아니요. 어르신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가급적 아는 사람이 적으면 좋은 일이라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타인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 없는 비전 같은 거라 이해하시면 됩니다.”
비전이라는 말에 달랑타는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물론 두 분이 정말로 서로를 신용하신다면 제 증명을 보시는 건 예카트리체 씨가 아닌 달랑타 씨여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제가 보여드리는 건 상대에게 비밀로 해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친구를 신용한다면 이유 여부에 상관없이 친구가 인정하면 인정해 달라는 말이었다.
내 말에 달랑타는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나는 주방에서 식은 요리나 데우고 있을 테니 둘이 알아서 해.”
달랑타가 자리를 비켜주자 예카트리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늙으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법이니 이해해 주세요.”
“하하하, 친구를 걱정하시는 거겠죠.”
“시끄럽다! 뒷담 까지 말고 빨리 결계나 치든, 방으로 들어가든 해!”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랑타의 외침에 예카트리체는 아공간에서 마법 지팡이를 꺼내 바닥을 살짝 찍었다.
그러자 나와 그녀는 처음 보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제 마도공방입니다. 이곳이라면 달랑타도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니 안심하세요.”
게오르의 공방은 각종 인형 부품과 기계가 가득한 공장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끝없이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 같은 느낌이었다.
공방도 마법사마다 분위기가 많이 다른 듯했다.
“대단하군요.”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감탄했다.
이곳에 있는 책들 하나하나가 방대한 마력을 담고 있는 마도서일 뿐만 아니라 이 공방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마법을 제대로 익히고 보니 장엄하고 정교한 건축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 공방은 저 혼자서 구축한 게 아니라 대대로 이어오며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 묘사된 제이드의 공방이 도서관 같다고 했었지.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제게 증명하실 겁니까? 유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입니다.”
유죄 추정을 근거로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흥미롭게 날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증명하기에 앞서 옛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이라는, 상투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보다도 조금 더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다 못해 매캐한 첫 연기 한 모금에 사레가 들려 고통스러운 기침을 할 만큼 오래된 시절.
사람들이 전설을 넘어 신화라 부르는 시대의 이야기다.
태초의 의지가 빛과 어둠, 하늘과 땅… 그러니까 대충 세상이 창조된 직후.
다분히 패륜적이고 저질적인, 신화적 서사의 끝에 세상은 자연물을 상징하는 일곱 신에 의해 질서가 정립되었다.
일곱 신이 지배하는 신화시대의 어느 날, 어느 한 목동(牧童)이 스스로가 주신인 태양신의 아들이라 참칭(僭稱)하였다.
일곱 신을 숭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동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였고, 일곱 신은 각각 목동에게 한 가지씩 커다란 시련을 내려 태양신의 자식임을 증명케 시킨다.
그렇게 더럽고, 치사하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곱 가지의 시련을 이겨낸 목동은 결과적으로 신위(神位)를 얻음으로써 스스로의 말을 증명한다.
그제 와서는 목동이 정말 태양신의 아들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아들이 아니었어도 주신으로서의 권위를 위해 태양신이 제 아들이라 주장해야 할 판이 된 것이다.
일곱 신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새로운 신이 될 목동을 축복하며 각각 소원을 들어줄 것을 약속하였고 그것을 석판에 새겨 목동에게 주었다.
전지전능한 소원권이 담긴 일곱 개의 석판을 받은 목동은 ‘현명하게도’ 그 석판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롭게 양을 치며 살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끝마치고 신계로 올라간다.
석판을 사람 사는 세상에 뿌려놓고 말이다.
일곱 신과 목동의 전지전능한 석판은 세상에 커다란 분란을 일으켰고, 몇 개의 나라가 지워지고 탄생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목자와 투쟁의 신에 대한 신화군요.”
“유명한 이야기죠.”
“그래서 그 신화가 당신의 증명과 무슨 상관인가요?”
예카트리체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주 큰 상관이 있죠.”
나의, 정확히는 ‘사재의 마녀 중 메마른 가뭄의 마녀 아퀼라의 마력회로를 계승한’ 나의 마력으로 시조가 피를 통해 계승시킨 봉인을 자극했다.
그러자 내 몸을 둘러싸고 여덟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이건!”
예카트리체는 내 몸 위로 떠 오른 마법진을 보고 경악했다.
여덟 마법진 중 하나는 머나먼 과거, 겨울나무의 현자가 새겨 넣은 봉인 마법진도 있었다.
“그렇습니다. 제 시조가 사계사재의 마법사와 힘을 합쳐 완성한 ‘일곱 신의 약속’을 새겨 넣은 비석, ‘판도라’를 봉인한 마법입니다.”
내 몸에는 전지전능한 소원권이 담겨진 일곱 비석의 봉인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봉인을 얻기 위해선 내가 반드시 죽어야 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봉인을 풀고 싶어 하는 건 운명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미치광이 집단, ‘아르카나’였다.
내가 절대 아르카나와 손을 잡을 수 없는 이유의 증명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