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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74화 (74/214)

제74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6)

“와, 산사태인가?”

갑자기 울리는 굉음에 창밖을 내다보자 저 멀리 보이는 산이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멀리 있지만 꽤나 장엄한 풍경에 나는 칵테일을 홀짝이며 감탄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면 마냥 웃을 수도 없겠지만 이곳은 사람이 살 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역시 자연의 신비란 무섭고도 아름다운 법이다.

“음? 어디 가십니까?”

나는 갑자기 급하게 주방에서 나오는 예카트리체를 보며 물었다.

“잠시 급하게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고는 그녀는 빠르게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봉인의 마석을 삼킨 대마수라도 출몰했나?

아니, 그 괴물들은 여기 오면 죽을 걸 알아서 근처에 오지도 않을 텐데.

“뭐 별일 아니겠지."

그렇게 느긋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예카트리체가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세 사람과 웬 노인을 데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세 사람의 꼬락서니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프레시아는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프레시아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꼴을 보아하니 길버트는 프레시아와 제이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보고 말리러 따라갔다 휘말린 모양이었다.

저 두 괴물을 말리기엔 아직 길버트의 실력은 한참 부족했다.

프레시아나 제이드도 또래의 호적수를 만나는 건 처음일 테니 고작 대련하는 것 정도는 혼낼 일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해야지.

하지만 얼어붙고 찢어진 옷가지를 걸친 프레시아와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투성이에 옷이 해진 제이드의 몰골.

그리고 예카트리체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저 대련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방금 산사태도 둘이 싸우다 생긴 여파야?”

“…네.”

명백히 대련에 쓸 만한 기술이 아니잖아!

순간 혈압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지만 일단 심호흡을 하며 진정했다.

최우선 포섭 대상인 제이드와 프레시아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어떻게 화해시키지? 그래도 제대로 싸워 봤다니까 서로의 실력을 인정시키는 방향으로 해볼까?

제길, 골치가 아파왔다.

“프레시….”

콰아앙-!

그때 오두막 내부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오두막의 일부가 붕괴하는 게 창밖으로 보였다.

“으아앙! 살려줘요! 유안 오빠! 프레시아 언니!”

창밖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병사 무더기가 마법 사슬에 묶인 채 질리안 오리지널에게 업혀 도망치는 실루아를 쫓고 있었다.

“앗! 방위 마법이!”

예카트리체가 놀라며 급하게 얼음 병사들의 동력을 끊고 실루아를 안으로 들였다.

“히잉~! 죄송해요. 실수로 마법을 잘못 건드는 바람에….”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넘어지려는 나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그런 손길을 거부하고 울컥해서 외쳤다.

“야! 이 새끼들아! 다 엎드려뻗쳐!”

이것들은 갑자기 왜 안 치던 사고를 연달아 치는 건데!

오랜만에 옛 성질이 터져 나왔다.

* * *

“죄송합니다.”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서로 치고받고 싸운 거야 쌍방 폭행이고, 제이드의 잘못도 있을 테니 딱히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루아의 일은 달랐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이 관리 감독 소홀인 내 잘못이었다.

내 사과에 예카트리체는 오히려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 제자도 같이 사고를 쳤고, 실루아에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저인데요. 오히려 아이가 돌아다니는데도 방위 마법을 꺼두지 않은 제 잘못입니다.”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는지 많이 온순해졌다.

옛날 성질 같았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랑의 쇠 파이프로 사회 정의를 구현했을 텐데, 고작 무릎 꿇고 손들게만 시키다니.

물론 지금의 내 연약한 팔로는 저 초인들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웬 노인은 낄낄거리며 옆에서 벌을 서고 있는 제이드와 프레시아, 실루아에게 잔소리를 했다.

“보거라, 이 우둔한 아이들아. 너희 때문에 스승이고 도련님이고 자존심을 버려가며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으냐. 쯧쯧, 이런 한심한 녀석들.”

노인의 말에 세 사람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분은 뉘신지?”

내 물음에 예카트리체는 소개가 늦었다며 노인을 소개했다.

“이 늙은이는 제 오랜 친구인 봄꽃의 현자 달랑타 디 위즐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노인, 달랑타는 키득거리며 장난스럽게 딴죽을 걸었다.

“예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나보고만 늙은이래! 너랑 나랑 별로 나이 차이도 안 나잖아. 그리고 ‘전대’ 봄꽃의 현자다. ‘전대’를 빼먹지 말라고. 너랑 달리 난 은퇴했어!”

전대라. 이미 제자에게 봄꽃의 현자 자리를 계승하고 난 다음인가?

그렇다면 달랑타의 제자인 ‘아샤 스테이폴로’가 봄꽃의 현자겠군.

달랑타의 소개에 나는 짐작했으면서도 몰랐던 척하며 감탄을 가장했다.

“달랑타 디 위즐이시라면 그 위즐 백작가의 초대 백작 아니십니까? 마법 학교의 설립자이시기도 하고요.”

내가 그를 알아보자 달랑타는 의외라는 듯이 날 바라봤다.

“젊은이, 날 아는가? 허허, 나 같은 옛날 사람도 기억해 주니 기쁘긴 하군.”

보통은 달랑타란 이름을 들어도 마법 명문가인 위즐 백작가의 초대 백작을 떠올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상식적으로 누가 저 정정한 노인네를 보고 115년 전 전쟁 영웅이라 하겠는가.

“어르신께서 남기신 마도구를 잘 사용하고 있거든요.”

내가 손가락에서 식자재 창고를 빼내서 보여주자 달랑타는 놀랐다.

“어?! 자네, 이걸 어디서 발견했나? 나도 어디다 뒀는지 까먹었는데.”

“어르신께서 젊었던 시절 일하던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왕실 주방이요.”

내 대답에 기억이 떠올랐는지 달랑타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내가 전쟁터로 끌려가기 전에 감자 포대 끈으로 사용했었지. 이제 기억이 나는구만. 전쟁이다, 가문이다로 바삐 보내다 보니 깜빡했네.”

달랑타는 자신의 마도구를 확인하더니 다시 내게 건넸다.

“그런데 내가 왕실 주방에서 일했던 건 어떻게 알았지?”

“어… 뭐, 제가 책을 좀 가까이하는 편이라서요.”

“그런가? 의외군. 내 아들 녀석은 내가 한낱 요리사였다는 걸 부끄러이 여겨서 최대한 숨겼을 텐데 말이야.”

책에서 읽어서 알고 있긴 했지.

그 책이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읽은 책이지만.

“뭐, ‘식자재 창고’는 꽤나 추억이 담긴 물건이긴 하지만 잃어버린 지 백 년도 더 지난 물건을 돌려달라고 할 순 없겠지. 이건 자네 것이네.”

그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아, 그래도 그 안에 식칼은 요리 용도 외에는 사용하지 말게. 그럼 슬플 테니까.”

나는 다시 반지를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쇼. 이 부실한 팔로 어디 칼을 휘두르겠습니까?”

내 진담 섞인 농담에 예카트리체와 달랑타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재미있는 젊은이군!”

“그러게 말이야.”

다행히 둘 다 연륜이 많아서 그런지 앞선 사건사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나 같았으면 묵사발을 낸 다음에 내쫓았을 텐데 참 다행이었다.

나는 벌을 서고 있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일단 저녁 식사 전에 다들 씻어야겠군요. 저 꼴로 식사할 순 없으니 말입니다.”

열심히 싸우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쓴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물론, 폭발에 휘말린 실루아도 꽤나 지저분했다.

내 말에 예카트리체도 동의하며 제이드에게 손을 내리고 씻고 오라 말했다.

“너희도 씻고 와. 잔소리는… 하아~! 나중에 하자. 피곤하다.”

내 한숨에 프레시아와 실루아는 시무룩해져서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길버트, 너도 씻고 와.”

내 뒤에 호위처럼 서 있던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런데 두 사람을 너무 꾸중하진 말아 주십시오. 둘 다 나름대로 도련님을 위해 열심히 하다 실수를 한 걸 겁니다.”

날 위하다가? 프레시아는 그저 처음 보는 또래의 호적수를 봐서 호승심에 날뛴 것 같은데.

내 앞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내숭을 떨고 있지만 애초에 호승심이 없었으면 그렇게 강해지지도 못했을 거다.

그리고 실루아는 복잡하고 새로운 마법에 호기심을 느끼고 실수한 거고.

길버트의 두둔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봐서 적당히 하지.”

“감사합니다.”

그래도 길버트가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다고 어른스럽기는 했다.

어린 동생이 있어서 그런가, 동생들을 챙기는 큰오빠 같네.

길버트도 자리를 떠나자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제 일행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일단 실루아가 부순 오두막 값부터 갈음하죠.”

내 말에 예카트리체와 달랑타는 날 만류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보수 비용이 한두 푼도 아니고. 대륙 5대 상단주쯤 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거다.”

두 사람의 만류에 나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재료값은 둘째 치고 인건비를 생각하면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돈으로 갚을 생각 없습니다. 대신 이걸 받으시죠.”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원래는 괜찮은 마도구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넘겨줄 생각이었는데 그냥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예카트리체와 거래할 것은 차고 넘쳤다.

“이 정도면 수리 비용으로는 차고 넘칠 겁니다.”

내 말에 달랑타는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책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낡은 책은 제목도, 책의 내용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나무의 현자인 예카트리체는 달랐다.

“이, 이건 설마!”

“예. 듀플리온 왕국의 태조와 그 당시 겨울나무의 현자가 거래하며 반쯤 빼앗긴 겨울나무의 현자의 비전서입니다.”

정확히는 사계의 현자와 대칭되는 사재(四災)의 마녀 중 한 사람인 아퀼라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이긴 했다.

아퀼라의 마도서에 적힌 일기에 따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계의 현자와 사재의 마녀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어째서 아퀼라가 겨울나무의 현자의 비전 마법을 강탈했는지 자세히 알 방법은 없었지만, 그녀가 벌인 일인 만큼 현재는 계승되지 못하고 실전된 마법이었다.

“이걸 어디서?”

책장을 넘기는 예카트리체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면 내용물은 진짜인 듯했다.

“왕실 서고에서 발견했습니다. 내용물은 제가 읽을 수 없어서 제대로 가져온 게 맞나 불안했는데 잘 가져온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 책은 내가 시조의 유산과 아퀼라의 마력회로, 그리고 나비를 얻을 때 같이 찾은 물건이었다.

“확실히 이 비전서라면 충분히 갈음하고도… 아니, 값을 매긴다면 오히려 제가 은혜를 갚아야 할 지경이군요.”

책을 덮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확실히 한다라.

내가 이 책을 얻은 경위? 내 정체? 아니면 내가 이곳에 온 다른 목적?

예카트리체의 입에서 나온 물음은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물음이었다.

“진작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을 당신은 어떻게 살아 있는 겁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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