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72화 (72/214)

제72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4)

나는 따뜻한 집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따뜻한 커피를 홀짝였다.

내 옆에 날 감시하듯 바라보는 내 일행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하기야, 나 같아도 그 혹한의 땅에서 덥다고 난리 치며 옷을 벗으려 했으면 이런 시선으로 감시했을 것 같았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회색 머리의 소년, 겨울나무의 현자 제이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따뜻하게 덥힌 커피가 담긴 주전자를 들었다.

이곳은 겨울나무 현자가 지키는 봉인의 땅이니, 이곳에 있는 소년은 제이드 하이트필뿐일 거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잔을 비우고 다시 내밀며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찾아와 자기소개할 정신도 없었군요. 저는 유안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일행들은 이어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도련님의 호위 기사인 길버트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호위 기사인 프레시아라고 합니다.”

“저는 실루아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일행들의 인사에 제이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저는 제이드입니다. 방금까지 저와 함께 있던 분은 제 스승님으로, 저는 이곳에서 마법을 배우고 있죠.”

마법을 배운다는 말에 실루아는 호기심을 보였다.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 겨울나무의 현자가 되기 위한 것들을 배우고 있겠지.

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덕분에 살았습니다. 설마 거기서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올 줄이야.”

사람은 너무 극한의 환경에 치달으면 정반대의 행동을 할 때가 있다.

한겨울의 고산 지대를 등반하던 동사자(凍死者)가 이따금 헐벗은 모습으로 발견되는 이유가 나처럼 덥다고 옷을 벗어서였다.

“오호, 중추신경계라. 신기한 이론이군요. 그러고 보면 최근에 본 의학서에서 그런 이야기를 본 것 같습니다. 분명 뇌가 감각 신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제이드는 머릿속에는 있지만 잘 설명을 못하겠는지 허공에 손을 굴렸다.

그때 친화력 좋은 길버트가 웃으며 물었다.

“마법사이신데 의학서도 읽으십니까? 아, 그러고 보면 도련님께서도 마법도 의술도 뛰어나셨죠?”

“그렇습니까? 마법을 익히고 계신 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 의학에도 조예가 있으셨군요!”

소년은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봤다.

“아니요, 뛰어나다까지는 아닙니다.”

“도련님께선 제 동생의 절맥증도 치료해 주신걸요!”

길버트의 말에 제이드는 더더욱 내게 관심을 보였다.

“겸손이 아닙니다. 의술은 그저 관련 책을 조금 읽은 것뿐이고, 마법은 가르쳐준 분께 아직 베네티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 소리 들었거든요.”

그에게 호감을 사는 건 좋지만, 지나친 기대를 사는 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절맥증이면 극히 희귀한 병이라 들었습니다. 어떻게….”

“제이드, 그만하거라.”

“아, 스승님.”

제이드는 흑발의 미녀가 밖에서 들어오자 스승님이라 부르며 반겼다.

스승이라면 전대 겨울나무의 현자 예카트리체 하이트필인가.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제이드는 아직 계승하지 않았고, 당대 겨울나무의 현자가 그녀일 수도 있겠다.

물론 사계의 현자는 딱히 죽어야 넘겨주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자리를 넘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이드가 현자의 자리를 물려받은 건 그녀가 죽기 직전이었다는 소설 속의 묘사를 생각하면 아직 겨울나무의 현자는 그녀일 터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의술 같은 게 아니야. 그런 건 나중에 천천히 물어도 된다.”

의술 같은 게 중요하지 않다니. 예카트리체는 아마 2년 안에 병으로 죽을 텐데?

정확히는 부상 탓으로 인한 병세의 악화로 사망한다.

“괜찮아진 듯하니 다행입니다. 저는 겨울나무의 현자, 예카트리체라고 합니다.”

인사를 한 예카트리체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곳까지 남쪽의 대마수의 마석을 가지고 온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저 결계 앞에서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초인종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죠?”

경계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나는 싱긋 웃었다.

나나 실루아의 마법으로는 겨울나무의 현자가 대대로 구축한 결계를 뚫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나는 결계 앞에서 붉은 눈의 마석을 이용해 붉은 눈이 온 것처럼 속여 제이드가 알아서 나오도록 한 것이다.

“아예 속셈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붉은 눈’, 아! 붉은 눈은 블란츠바그령에서 부르는 남쪽 대마수의 이름입니다. 여하튼 붉은 눈의 마석을 가져온 건 겨울나무의 현자가 지키고 있는 이계의 구멍을 완전히 닫기 위해서입니다.”

약 6백여 년 전, 이 땅에 이계와 연결된 구멍이 열리고, 각종 이계의 몬스터들이 튀어나오자 당시의 겨울나무의 현자는 마법을 다섯 개의 마석에 나눠 담아 구멍을 닫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방해로 빈틈이 생겼고, 그 틈을 타 다섯 마리의 몬스터가 마석을 삼켜 도주했다.

그 몬스터들은 마석에 담긴 힘을 흡수해 일대를 지배하는 대마수로 거듭났고, 붉은 눈도 그중 하나였다.

내 대답에 예카트리체와 제이드는 놀라서 날 바라봤다.

“이계의 구멍을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아직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옛 문헌을 뒤적이다 알았다. 지금은 이 정도로 답을 하죠.”

실제로도 이계의 구멍을 언급한 옛 문헌이 존재하기는 한다.

왕국은 아니고, 제국 쪽에 있다.

내 대답에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마력회로가 개발되어서인지 그들에게서 은은하게 발산되는 경계심 섞인 마력파가 느껴졌다.

현자급 두 사람이 노려보니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럼 구멍을 닫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나는 커피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겨울나무의 현자가, 정확히는 사계의 현자가 자유로이 움직이길 바랍니다.”

사실은 제이드를 동료로 꼬시기 위해서다.

지금은 그의 스승인 예카트리체도 꼬실 생각이었다.

“어째서죠?”

“제 적이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의 적이라면?”

“6백여 년 전 이곳에 이계의 구멍을 연 놈들이죠.”

이곳에 이계의 구멍을 연 녀석들의 정체는 아르카나였다.

그 당시에는 아르카나라는 이름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당시의 아르카나는 사계의 현자에게 큰 위협을 느꼈고, 견제하기 위해 여러 수작을 부렸다.

이계의 구멍은 그 수작질 중 하나였다. 그 결과, 겨울나무의 현자는 대대로 이 땅을 지키며 구멍을 닫기 위해 노력해 왔다.

“구멍을 연….”

예카트리체의 물음이 이어지기 전에 프레시아가 허리춤의 검을 풀고 검집째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감히 도련님을 추궁하는 겁니까?”

프레시아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살벌한 기세를 흘리자 제이드는 프레시아를 노려보며 마력을 방출해 대응했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무례입니까!”

이런, 두 사람의 만남은 이래선 곤란한데.

내가 나서기 전에 예카트리체가 제자를 말렸다.

“제이드, 물러나거라.”

“하지만 스승님!”

“제이드!”

예카트리체의 호통에 제이드는 움찔하더니 방출했던 마력을 회수하며 한 걸음 크게 물러났다.

“프레시아, 너도 그만해. 이곳은 저분들이 지켜온 땅이고 우리는 불청객이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마.”

내가 주의를 주자 프레시아는 혼난 강아지같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기세를 잠재웠다.

“실례했습니다. 제 걱정이 많은 아이라.”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갑작스러워서 봉인의 마석을 가져와 주신 은인께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추궁보다는 먼저 감사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그녀의 사과에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저라도 느닷없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계의 구멍을 언급했으면 경계했을 겁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하는 말에 예카트리체는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반면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서로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노려봤다.

원래라면 제이드는 프레시아의 생명의 은인이라 서로 살갑게 대해야 했는데 일이 틀어졌다.

하기야 그때는 서로 주군인 유안과 스승인 예카트리체를 잃고 방황하던 시기라 공감대가 형성돼서 빠르게 친해진 것도 있었다.

“쉽지 않군요.”

“그러게요.”

나와 예카트리체는 서로의 호위 기사와 제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와 일행들은 겨울나무의 현자 예카트리체의 호의로 며칠간 머물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오두막집이었지만 마법으로 만들어진 집이라 그런지 내부는 무슨 대저택처럼 넓었다.

이 정도로 정교한 공간 마법은 처음인지 실루아는 눈을 반짝이며 질리안 오리지널을 데리고 저택 탐험에 나섰다.

“이것 참, 실루아에게는 주의를 주겠습니다.”

내 말에 예카트리체는 흐뭇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뛰어놀아야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군요. 제작자…라고 부르는 건 무례겠죠?”

예카트리체는 실루아가 마법 인형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예, 저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 아이니까요.”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생명 창조란 기적을 달성한 분이니 배로 낳는 것 이상의 고행이 따랐을 겁니다. 보통 사랑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녀는 실루아를 하나의 인격체이자 생명으로 인정하고 존중해 줬다.

“게오르 영감님이 들었으면 좋아했을 겁니다.”

“게오르라면, 만병의 현자 게오르 필립 말씀이십니까?”

예카트리체가 게오르에 대해 알자 나는 의외라며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친구가 종종 바깥소식을 가져와 줍니다. 골렘과 연금술의 결합인 인형술의 대종사라 들었습니다. 현재는 왕국 마탑의 주류 학파라지요?”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그녀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봉인을 지키느라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였으니 반쯤 포기에 가까운 체념이었다.

그런데 친구라. 누구지?

“아, 슬슬 저녁 식사를 해야죠.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녀의 환심을 사고자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요, 손님이신데 그럴 순 없죠. 그리고 부끄럽지만 제 친구가 만들어놓은 요리를 따뜻하게 덥히는 것에 불과해서 손을 빌릴 것도 없습니다.”

친구가 만들어놓은 요리?

아, 그 친구가 봄꽃의 현자 달랑타였나.

“다 차리면 마법으로 부를 테니 편히 계세요. 자세한 대화는 식사 후에 이어서 천천히 나누도록 하죠.”

예카트리체는 아직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듯했다.

나도 해줄 이야기나 줄 것이 꽤 있었으니, 느긋하게 대화를 하는 건 원하는 바였다.

그렇게 말한 예카트리체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다들 어디 간 거지?”

실루아야 탐험을 하고 있을 테니 넘어가더라도,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어디 있지?

그러고 보면 제이드도 안 보였다.

예카트리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디 간 거람?

“뭐, 밥시간 되면 알아서 오겠지.”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싸구려 보드카를 베이스로 즉석에서 레몬과 민트를 넣으며 칵테일을 만들어 음미했다.

“음~! 좋다.”

나중에 각설탕도 구해 둬야겠다. 큐라소 시럽도 있으면 좋겠는데 구하는 건 무리겠지?

* * *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오두막에서 떨어진 곳에 서로를 노려보며 살벌한 기세를 내뿜었다.

길버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두 사람을 말렸다.

“두 분 다 그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도련님도, 현자님도 싸우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길버트의 말에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움찔했지만 둘 다 살벌한 기세를 갈무리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봤다.

“저는 프레시아 씨가 스승님께 무례를 저지른 것에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제이드는 프레시아가 살벌한 기세로 스승을 위협한 걸 걸고 넘어갔다.

“저야말로 당신이 도련님께 추궁하듯 압박하고도 사과 한마디 없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두 사람 다 이렇게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린다는 걸 들키면 유안과 예카트리체에게 혼날 걸 알고 있었다.

제이드는 프레시아를 보며 정중히 경고했다.

“지금이라도 스승님께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저도 당신들의 도련님이란 분께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순서를 바꾸죠. 당신이 먼저 도련님께 사과하십쇼. 그럼 저도 당신의 스승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프레시아가 되받아치자 제이드의 눈썹이 움찔했다.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그쪽이야말로.”

각기 분야가 다르지만 두 사람은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둘 다 또래면서도 호승심을 자극하는 사람을 처음 본 탓인지 서로를 향해 투쟁심을 불태웠다.

“저, 저기요? 그냥 동시에 사과하면 되지 않나요?”

길버트의 중재에도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무시했다.

서로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나섰던 것이 점점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되어 갔다.

프레시아는 검을, 제이드는 마법 지팡이를 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