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3)
우리의, 정확히는 나의 목적지는 겨울나무의 현자가 대대로 지키는 봉인된 땅이었다.
그곳에 겨울나무의 현자 제이드가 살고 있을 테니 만나러 가는 거다.
실루아는 봉인된 땅이란 말에 관심을 보였다.
“무엇이 봉인되어 있는 건가요?”
“이계(異界)와의 통로. 봉인이 풀리면 그 안에 있는 괴물들이 튀어나온다고 해.”
먼 옛날, 산맥 중심에 이계와 연결된 구멍이 열리자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괴물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 바스타유 산맥 전체에 분포해 있는 몬스터들은 그 이계 괴물들의 후손쯤 된다.
내 대답을 들은 실루아는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지만 나는 그녀를 말렸다.
“네 호기심에 대한 정답은 나보다 저 안에 봉인을 지키는 마법사가 더 잘 알 테니까 질문은 나중에 하렴. 지금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우선이야.”
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겨울나무의 현자가 쳐놓은 결계까지는 접근해야 했는데, 살벌하게 추운 날씨 탓에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떻게 추위를 버티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와 실루아는 고민하며 머리를 모았다.
아쉽게도 길버트와 프레시아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프레시아 혼자라면 이 추위를 뚫고 가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내가 들어가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바람은 나비의 힘으로 막는다고 해도 추위 자체가 문제네.”
이글루 밖의 온도는 영하 20도에 육박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온도는 급격히 떨어질 테니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는 온도로 만드는 게 중요했다.
“화염 마법으로는 한계가 있겠죠?”
“가다가 마력 고갈로 미라가 될 거야.”
“그럼 유안 오빠가 화염 정령을 소환해 계약하는 건요?”
“불의 정령을 소환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안 좋아. 아! 인형이 마차를 끄는 건 어때? 마차라면 불은 못 피워도 맨몸으로 가는 것보다 보온성이 좋을 테니까.”
“지금이라면 모를까,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인형 내부의 부동액도 얼어붙을 거예요.”
나와 실루아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답이 안 보인다. 차라리 실루아의 말처럼 불의 정령을 소환할까?
아니, 내 마력으로는 환경적 요인을 무시하고 소환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때 길버트가 불을 쬐며 말했다.
“이 공간째로는 못 움직이나요?”
길버트의 물음에 실루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버트 오빠, 공간 마법은 여타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숙련도와 마력이 필요해요. 아버지라면 모를까 저희는….”
“아니, 잠깐.”
내가 실루아의 말을 멈추자 다들 날 바라봤다.
“그래, 공간째로 움직인다. 좋은 방법이야. 가능하겠어.”
“네? 하지만 공간 마법은….”
“공간 마법이 아니야. 이 얼음 굴 자체로 골렘을 만들어 움직이면 되는 거야. 그럼 공간째로 움직이는 게 되잖아.”
내 말에 실루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네요!”
얼음 골렘이라면 인형과 달리 얼어붙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얼음으로 외벽을 두껍게 한다면 보온성도 충분하다.
협곡을 막는 수준의 거대한 골렘이 아니라 큰 마차 수준의 크기라면 마석을 소비하는 부담도 없다.
문제가 있다면 환기인데. 그건 나비가 있으니 내부의 이산화탄소와 외부의 산소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냉기를 안으로 들이지 않을 수 있다.
“잘했다, 길버트!”
“의외네요! 길버트 오빠!”
갑자기 칭찬을 받은 길버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자.”
“네! 유안 오빠!”
나와 실루아는 프레시아가 판 이글루 곳곳에 골렘이 되도록 마법식을 그려 넣었다.
“프레시아, 여기 작은 구멍 좀 뚫어줄래? 손톱만 한 크기로 스무 개 정도.”
“네, 알겠습니다.”
프레시아는 검을 뽑아 내가 가리킨 곳에 숨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손바닥 크기로.”
이어서 시야용 구멍을 만들었다.
“람아, 물 막을 만들어줘.”
-삑삑!
람이가 구멍을 물로 막자 추위에 금세 얼어붙었다.
투명한 얼음으로 시야는 확보되면서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실루아는 즉석에서 만든 골렘 핵을 땅에 심으려 삽을 들었다.
깡! 깡!
얼어붙은 땅은 흠집조차 나질 않았다.
“잠시만 비키렴.”
프레시아는 실루아가 파려는 곳을 베어냈다.
“더 파줄까?”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고마워요, 프레시아 언니!”
골렘 핵이 심어지자 땅이 요동쳤다.
우르르르-!
프레시아가 만들어둔 입구가 무너져 내리더니 매끈한 벽으로 막혔다. 그러고는 스무 개의 다리가 생기며 얼음 움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종은 맡겨도 되지?”
“네! 저만 믿으세요!”
실루아는 능숙하게 골렘을 조종해 산맥 안으로 움직였다.
“으으, 구멍을 뚫으니 춥다. 땔감 좀 더 때자.”
나는 흐트러진 장작불 위로 장작을 더 얹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 * *
수도에 위치한 위즐 백작가의 정원에서 위즐 백작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핫!”
배를 부여잡으며 한참을 웃던 위즐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아하하하! 그래서 흑마법사로 오해받고 도망쳤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작의 물음에 여름 열매의 현자 드미트리크론은 인상을 구겼다.
“웃지 마라! 나는 지금 심각하다고!”
“푸하하하하하!”
백작은 웃지 말라는 말에 다시 폭소했다.
“푸히힛! 제자감을 발견하자마자, 푸하하핫! 변태 인신매매범으로 취급받고, 크흡! 흑마법사로 몰리다니. 진짜 어르신은 전설이십니다! 으하하하핫!”
드미트리크론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당장 눈앞의 건방진 녀석이 친구의 증손자만 아니었어도 비 오는 날 먼지 날리게 두들겨 팼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마법사들의 정점인 마도팔현의 한 사람인 백작이 순순히 맞아줄 리는 만무했다.
“시끄럽다! 내가 후계자를 찾기 위해 100년을 싸돌아다녔지만 그만한 재능은 처음이었단 말이다!”
“으하하하하! 후우~! 아,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배가 다 아프네. 그런데 어르신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번 보고 싶군요.”
백작의 말에 드미트리크론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내가 먼저 점찍은 아이다.”
“누가 빼앗는다고 했습니까? 그저 보고 싶다고 했을 뿐이잖습니까. 그래도 그 아이도 이름 모를 변태 흑마법사, 푸훗! 보다는 위즐 백작의 제자가 더 탐나겠죠.”
백작의 말에 드미트리크론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마법 관련 역사서에서나 잠깐 등장하는 마법계에서 은퇴한 지 오래된 이였고, 백작은 현 마법계에 군림하는 여덟 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비밀을 아는 마법계의 정점에 이른 극소수의 마법사들은 사계의 현자에게 극진한 예를 표하겠지만,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명성을 떨치는 백작의 제자가 되길 희망할 게 뻔했다.
그럼에도 드미트리크론이 백작에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네가 그 아이에게 내가 애들을 납치하는 흑마법사가 아니라고 좀 이야기해 주거라. 네 어렸을 때 내가 얼마나 잘해줬느냐.”
드미트리크론의 말에 백작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잘해 주셨다고요? 제 기억으로는 그렇게 마법 좀 가르쳐 달라고 사정해도 무시하던 기억밖에 없습니다만.”
“야! 그건 네가 내 마법을 네 친구랑 공유하려 해서 그런 거잖아! 그 이름이 뭐였더라? 아비? 이비엘?”
아바스엘에 대해 언급하자 백작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냉랭해졌다.
갑작스레 살기까지 느껴지는 표정 변화에 드미트리크론은 움찔했다.
“왜, 왜 그러느냐? 그때 마법을 안 가르쳐줘서 화났느냐?”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고작 그런 일로 화났겠습니까? 지금 와서는 어르신의 마법이 아무에게나 전수되어선 안 될 마법이란 걸 잘 아는데요.”
“…그럼?”
백작은 물음에 답하기보다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정원 바닥에서 유리관 몇 개가 솟아올랐다.
“이, 이건!”
드미트리크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관 안에는 사람이 매달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 실험? 아니, 이건 순전히 고문을 위한 거군.”
여름 열매의 현자다운 통찰에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뭐, 실험도 겸사겸사하기는 했지만요.”
“어찌 이런 잔인한 짓을 한 게냐? 저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들은 그림자 탑의 마법사들입니다.”
백작의 말에 드미트리크론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림자 탑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는 마법 발전을 위한 일이니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바쳐야지요. 저 멍청이들이 무고한 양민들을 납치해 심혈을 기울여 실험하는 것보다는 제가 저들을 고문하는 겸 간단히 실험하는 게 마법계에 더 큰 발전이 있을 테니까요.”
드미트리크론은 그 말에는 그 누구도 반론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유리관에 갇혀 고문받는 이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평범한 마법사의 비전 실험보다 현자의 기초 실험이 더 가치 있다는 건 마법계의 상식이었다.
“아니, 그래도….”
“저들이 제 하나뿐인 친구의 삶을 망쳤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친구였습니다. 분명히 현자의 자리에 오를, 그런 친구였습니다. 마법의 발전을 위한다고 떠들면서 감히! 저 머저리 같은 놈들 따위는 수천, 수만 마리가 머리를 마주 모아도 발끝에도 못 미칠 친구였단 말입니다!”
분노 어린 외침에 드미트리크론은 침묵했다.
백작의 친구 아바스엘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백작에게 있어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고독하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이걸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있겠지?”
드미트리크론의 물음에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께서 탐내는 제자 후보에게 얼마든지 입발림 소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원한다면 가르치는 데 대대적인 지원을 해드리죠.”
아바스엘을 나락으로 보낸 이름 모를 마녀를 아직 잡지 못했다고 이를 갈며 부탁했다.
“그러니 마도성지(魔道聖地)인 천공도시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림자 탑 놈들을 잡아내는 걸 도와주십쇼. 전전대 마탑주님.”
당신보다 마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세상 누구보다도 권태로웠던 백작의 눈에는 광기 어린 분노로 번들거렸다.
* * *
“훌륭하다. 그대로 하거라.”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며 마력을 수련하던 제이드는 스승의 칭찬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는데요, 뭐.”
“후후후, 네 나이에 벌써 마력 수련을 하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네 재능이 날 뛰어넘었다는 증거다. 언제든 내 자리를 내주어도 되겠어.”
지금 당장 자신이 죽어도 겨울나무의 현자의 맥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예카트리체는 자신의 제자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 속내를 모르는 제이드는 스승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에게 스승은 자신의 우상이자 목표였다.
제이드의 수련을 돕던 예카트리체는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아 서쪽을 바라봤다.
“스승님!”
앉아서 수련하던 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 지팡이를 들자 예카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운은 남쪽의 대마수, 드래곤 킬러다.”
“이렇게까지 다가오다니, 절대 놓쳐선 안 될 기회입니다!”
제이드의 외침에 그녀도 긍정하며 아공간에서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하늘을 날아 봉인지를 지키는 결계인 겨울나무의 숲을 나섰다.
단숨에 기운이 느껴지는 숲 외곽까지 날아온 두 사제는 벙찐 얼굴을 했다.
“아으으으… 더, 더워….”
“도련님! 도련님!”
“덥다고! 으아아!”
“안 돼요! 정신 차리세요! 여기서 옷 벗으면 정말로 죽어요!”
연약한 인상의 소년이 옷을 벗으려는 걸 붉은 머리의 소녀가 제압해 막고 있었다.
“더워! 타 죽을 것 같아!”
이 혹한의 날씨에 소년은 옷을 벗기 위해 발버둥 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