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겨울나무 숲의 현자 (1)
만연한 봄 날씨에 소녀는 조심스레 문 밖으로 발걸음을 나섰다.
시장 골목 인근에 위치한 집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소녀가 전에 살던 허름한 판자로 이루어진 단칸방보다는 훨씬 나았다.
소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시장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깊게 숨을 들이쉬면 폐가 찢어질 듯이 아파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호흡뿐만 아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녀는 기뻐했다.
“로니아! 오랜만이구나.”
이른 오전의 시장 골목을 거닐던 소녀를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 사내가 불러 세웠다.
“아, 소장님! 안녕하세요!”
소녀, 로니아 아산은 사내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조실부모한 소녀와 소녀의 오빠가 딱딱한 빵과 감자로나마 먹고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오빠에게 작은 일이라도 주는 그 덕분이었다는 걸 로니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많이 건강해진 것 같아 다행이구나. 길버트도 좋아하겠어.”
인력사무소의 소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로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소장님 덕분이에요.”
로니아의 감사 인사는 진심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병이 아니라 진작 굶어 죽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 길버트가 돈 벌러 떠난 사이에 담배 가게 할머니 밑에서 지낸다고 했던가?”
로니아의 오빠인 길버트는 왕자의 호위 기사가 되어 떠났지만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저 길버트가 외지로 돈을 벌러 가면서 어린 동생이 걱정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로니아는 그런 인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오빠가 기사가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주변 어른들에게는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억지로밖에 들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아직 일을 하기에는 몸이 약하지만 그래도 가게 일을 도울 게 있으면 도우려고요!”
그녀의 씩씩한 말에 인력소장은 흐뭇해하면서도 주의를 줬다.
“로니아, 마음은 예쁘다만 어린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나는 게 어른들을 돕는 거란다. 무리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길버트가 많이 슬퍼할 거다.”
“네, 주의할게요!”
“그래, 나중에 약쟁이 영감님께 찾아뵐 때 보자꾸나.”
씩씩한 로니아의 대답에 인력소장은 웃으며 그의 일터인 강변으로 향했다.
로니아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산책하듯 담배 가게로 걸었다.
아라드리네는 담배 연기가 어린아이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걱정했지만 네드리안은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흠흠음~ 흐음~”
로니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분주한 상인들로 가득한 시장 거리를 구경했다.
오랫동안 누워서 창밖의 구름만 관찰하던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로니아! 아침은 먹었니? 사과 하나 먹고 가렴!”
“로니아, 담배 가게 가는 거니? 이거 그 집 할머니와 함께 먹어라.”
시장 상인들은 로니아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로니아는 인사를 받으며 사과나 식빵 등을 주는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오랫동안 외출을 못 했던 로니아가 시장 상인들과 잘 알고 지내는 이유는 모두 길버트 덕분이었다.
좋게 말하면 모두에게 친절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넓은 길버트는 발이 넓었다.
사람과 잘 만나지 않아 사람을 대하는 게 어색한 로니아였지만 오빠인 길버트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녀와 오빠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던 것도 시장 상인들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도와줬기 때문이란 걸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장 길을 지나 담배 가게로 향하는 골목으로 발길을 옮긴 로니아는 낡은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노인이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거렁뱅이 같아 보이는 노인을 눈앞에 둔 로니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자신의 오빠였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테니까.
“…배, 고….”
“배고프시다고요?”
로니아는 방금 청과물 아줌마에게 받은 사과를 노인에게 건넸다.
어차피 호의로 받은 것이니 선의를 베푸는데 사용해도 청과물 아줌마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과를 받아 든 노인은 허겁지겁 먹었다.
“으하~! 살겠다! 고마우이, 꼬마 아가씨. 여행객인데 마침 돈과 식량이 똑 떨어졌지 뭐야. 달랑타 녀석과 헤어질 때 녀석한테 먹을 것 좀 넉넉하게 받아놨어야 했는데 말이야.”
수더분하게 웃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이건 고맙다는 의미로 주는 거야, 꼬마 아가씨.”
노인은 반짝이는 수정을 건넸다.
한눈에 봐도 귀해 보이는 수정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한 보물이었다.
로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수정을 거부했다.
“아니에요. 고작 사과로 그렇게 귀해 보이는 건 받을 수 없어요.”
“아니다. 사막에서는 그 흔한 물도 값비싼 보석보다 귀한 법이란다. 사흘은 내리 굶은 내게 그 사과는 천금과도 같은….”
웃으며 말을 하던 노인은 로니아를 갑자기 뚫어져라 쳐다봤다.
“꼬마 아가씨. 혹시 과거에 많이 아프지 않았니?”
“네? …네, 그런데요.”
“혹시 절맥증?”
노인의 추측에 로니아는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 아가씨,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열…세 살인데요.”
로니아는 노인의 물음에 뭔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잠시 실례하마.”
노인은 로니아의 손목을 잡았다.
“이, 이거 놓으세요!”
로니아는 갑자기 추레한 노숙자 노인이 자신의 손목을 잡자 놀라서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의 힘은 어지간한 성인보다 강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어리고 완벽한 육체가 있다니.”
노인의 감탄에 로니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 싫어요! 안 돼요! 도와주세요!”
“어? 아, 아니다! 오해란다!”
로니아의 외침에 노인은 당황했다.
그때 담배 가게 문이 열리며 네드리안이 달려 나왔다.
네드리안은 로니아의 손목을 틀어쥔 추레한 노인의 모습을 보고 분노했다.
“로니아를 놔! 이 변태 노친네야!!”
네드리안은 노인을 향해 단검을 던졌고 노인은 로니아의 손을 놓으며 네드리안의 단검을 피했다.
네드리안의 외침에 가게를 열 준비를 하던 시장 상인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네드리안은 재빨리 로니아를 챙기며 외쳤다.
“저 변태 노친네가 로니아를 납치하려 했어요!”
유년시절부터 오랜 시간 도주 생활을 했던 네드리안은 자연스럽게 납치를 떠올렸다.
“아니야! 나, 나는 여름 열매의 현자로서 그저…!”
노인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시장 상인들은 네드리안의 말에 분노했다.
“납치!?”
“저 작은 아이를 납치해?!”
“길버트 동생을 납치해?!”
시장 상인들은 나무판자며 몽둥이를 들고 노인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소란이 일자 마침 순찰을 돌던 병사가 나타났다.
“무슨 소란입니까!”
병사를 보자 노인은 잘됐다며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저 변태 늙은이가 로니아를 납치하려 했어!”
청과물 아줌마의 외침에 병사는 놀라서 외쳤다.
“길버트 동생을 납치하려 했다고요?!”
“아, 아닐세! 나는!”
노인이 변명하기도 전에 병사는 창날에 두른 가죽집을 벗기며 노인에게 겨눴다.
“감히 백주대낮에 납치라니!”
“오해라니까!”
노인의 기백이 느껴지는 외침에 병사는 주춤하더니 로니아를 바라봤다.
“오해니?”
병사의 물음에 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 할아버지가 저보고 어리고 완벽한 육체라고 했어요!”
사실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당황했다. 그 말은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마법을 익히기 완벽한 육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의도와는 달리 로니아의 진술에 병사와 시장 상인들은 분노했다.
“저런 어린아이에게!”
“저저! 단매에 쳐 죽일 놈을 봤나!”
시장 상인들은 땅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 노인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었지만, 다수가 한꺼번에 돌팔매질을 하니 노인도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손가락을 튕겨 마법 방어막을 사용하자 시장 상인들은 경악하며 외쳤다.
“마법사?! 마법사가 왜?”
“흑마법사다! 흑마법사가 아이를 납치해 제물로 사용하려는 게 분명해!”
“과연! 완벽한 육체라는 말도 제물로서 완벽하다는 말이었군!”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마법사는 무서운 존재였다.
당연히 그런 만큼 마법사가 아이를 납치한다니 자연스럽게 흑마법으로 생각이 뻗어나갔다.
“아, 아니야! 난 그저 이 아이를 제자로…!”
뿌우우우-!
마법사의 변명을 듣기도 전에 병사는 비상 나팔을 불었다.
비상 나팔 소리에 인근에 있던 치안 초소에서 병사들이 몰려왔다.
통행량이 많은 시장 인근이라 경비병들이 머무는 치안 초소가 가까운 덕분이었다.
“흑마법사가 길버트의 동생을 납치하려 한다!”
누군가의 외침에 달려오던 병사들은 창과 검을 뽑아 들었다.
“길버트의 동생을?!”
“그 착한 애의 동생을?!”
“대(對) 마법 방패 앞으로! 위험하니까 시민들을 물려!”
착실히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마법사인 노인을 상대하기 위해 방진을 짰고 노인은 눈물을 머금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흑마법사가 날아서 도망간다!”
“길버트같이 착한 녀석의 동생을 노리다니!”
“놓치지 마! 흑마법사를 잡아라!”
“사악한 마법사!”
노인은 자신을 추격하는 병사들을 보며 억울함에 분통이 터졌다.
“제길, 나도 달랑타랑 예카트리체처럼 후계자감을 간신히 찾았는데! 은퇴할 수 있었는데!”
위대한 사계의 현자 중 한 사람, 여름 열매의 현자 드미트리크론 자프카는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 * *
왕궁은 그야말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왕후를 탄핵하려는 왕실파와 왕후를 지키려는 귀족파, 그 줄다리기 속에서 간을 보는 중립파 사이에서 제국의 후작 아사자하드는 내정 간섭이 되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귀족파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아사자하드 후작이 대놓고 귀족파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다면 왕도 가만히 있지 않고 정치적 공세를 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은 지적하기에는 너무나 미묘했다.
아사자하드 후작이 한 일이라고는 귀족파의 귀족들이 연 연회에 잠시 얼굴을 비추거나, 스스로 가르침을 구한 기사들의 지도를 한 것 정도였다.
왕도 사절단의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지만 그때마다 귀족파의 귀족 또한 자연스레 참가해 의미를 퇴색시켰다.
물론 왕실파의 귀족들 또한 귀족파의 연회에 참석해 의미를 퇴색시키려 했지만, 아사자하드 후작은 왕실파의 귀족들이 연 연회는 정중히 거절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지켰다.
“능구렁이 같은 여자군.”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니 황제의 총애를 받는구나 싶었다.
왕의 곁을 지키는 호레이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행동과는 달리 상당히 뛰어난 실력자입니다.”
“그런가? 경이나 블란츠바그 후작과 비교하면 어떻지?”
왕의 물음에 호레이즌은 피식 웃었다.
“한참 밑이죠. 아무리 초인이라도 그렇지 어딜 비교하십니까.”
확신에 찬 대답에 왕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호국공(護國公)이나 푸른 발톱, 황혼검(黃昏劍)과 비교하면 아사자하드 후작이 더 뛰어날 듯합니다.”
호레이즌이 언급한 세 명은 검호와 검귀의 뒤를 잇는 왕국의 초인들이었다.
“호국공이야 연세가 연세니 전성기가 한참 전에 지났다지만, 다른 둘은 젊지 않은가.”
황혼검은 젊다 못해 어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시절 ‘붉은 이빨’ 호레이즌과 쌍벽을 이뤘던 기사 ‘푸른 발톱’은 무시할 수 없는 강자라 생각했다.
“뭐, 얼추 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둘 다 감추고 있는 게 있을 테니 길고 짧은 건 대봐야죠.”
호레이즌은 주군의 심기를 위해 한발 물러났지만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잠시 잡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지만 왕은 현재 사태에 고민이 깊었다.
왕후 탄핵 건에 중립파의 과반수가 귀족파로 넘어갈 경우 탄핵은커녕 왕후의 입지가 역으로 넓어지는 일이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결국에는 정치는 파벌 간의 힘겨루기였으니 말이다.
고민이 깊어가던 와중 북방에서 파발 하나가 도착했다.
얼마 전 호레이즌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던 블란츠바그 후작의 서신을 가져온 파발이었다.
파발의 도착에 왕은 순간 걱정이 앞섰다.
블란츠바그 후작은 대표적인 중립파의 거두였다. 그런 그가 이번 건으로 귀족파의 손을 들면 왕실파는 크게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왕의 걱정과는 달리 환호할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왕이 파견한 ‘왕실 기사’의 도움으로 무려 ‘붉은 눈’을 토벌하였으니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 서신은 블란츠바그 후작이 왕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는 한편 의아해했다.
“왕실 기사라고?”
그는 기사를 파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후를 둘러싼 정국이 한층 더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