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붉은 눈 토벌전 (10)
프레시아에 의해 팔이 잘린 붉은 눈은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갸아아아아아!!”
바로 앞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내가 내상을 입는 일은 없었다.
“이 미물이 어디 앞이라고 감히 천박한 괴성을 지르는 것이냐!”
프레시아가 기세를 끌어올려 날 보호해 준 덕분이었다.
프레시아에 의해 살기가 억눌리자 붉은 눈은 당황하며 주춤했다.
뒤에는 일곱 체의 네임드 인형이, 앞에는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막았다.
길버트는 아직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투기를 끌어 올리며 당당히 붉은 눈앞에 섰다.
호위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니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눈은 날 죽이고 싶다는 살의와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본능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리고 그 갈등이 붉은 눈의 삶의 행방을 결정했다.
서걱!
갑자기 붉은 눈이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오른쪽 위 팔이 잘려나갔다.
“호오, 역시 붉은 눈이군. 기습으로 목을 딸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어느새 도착한 데미웨이는 검에 묻은 끈적한 검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뒤늦게 토벌대가 붉은 눈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프레시아가 늦은 이유도 다 함께 오느라 발이 늦어져서였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토벌대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토벌단원들은 처참한 꼴의 붉은 눈을 보며 경악했다.
“유안 경이 붉은 눈을 저 꼴로 만든 겁니까?”
특무대장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잡담은 토벌이 끝난 다음에 하시죠.”
내 말에 데미웨이가 외쳤다.
“붉은 눈을 죽여라!”
외침에 토벌대원 열여섯이 사슬추를 꺼내 붉은 눈의 움직임을 막고, 열두 명의 토벌대원들이 검을 뽑아 공격했다.
“갸아아! 갸아아아아!!”
붉은 눈은 극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사슬에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토벌대원들을 압도했다.
사슬추를 들고 있는 이들은 붉은 눈의 힘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며 검을 든 이들은 검기를 두른 검으로 두꺼운 가죽을 뚫기 위해 노력했다.
특무대장은 다섯 명의 토벌대원을 데리고 멀리서 화살을 쐈다.
붉은 눈의 몸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건 특무대장을 포함해 일곱 명뿐이었다.
“완전 괴물이군.”
데미웨이가 선별한 토벌대가 약한 게 아니다.
토벌대의 주된 역할은 데미웨이의 보조와 주변 정리라지만 저들은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붉은 눈이 너무 강한 괴물이었다.
도대체 소설 속의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3년간 회복한 붉은 눈을 어떻게 쓰러트린 거지?
아무리 바스타유 산맥이 겨울나무의 현자의 공방이나 마찬가지인 공간이라지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데미웨이는 토벌대의 움직임을 보고 평했다.
“기껏 훈련하고 챙겨온 비장의 수단을 쓸 일이 없어졌군. 아쉽지만 좋은 일이다.”
그렇게 말한 데미웨이는 날 바라봤다.
“뭐, 다 제 공 아니겠습니까.”
내 사실 그대로의 말에 데미웨이는 혀를 찼다.
“자네의 그런 성격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꽤나 호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내가 능글맞게 웃자 데미웨이는 꼴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데미웨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그의 손에 붉은 눈의 흉한 수급이 들려 있었다.
“오늘! 붉은 눈의 전설은 끝났다!”
바스타유 산맥 인근 영지에 공포의 상징으로서 전설처럼 회자되던 붉은 눈이 사망하자 토벌대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환호하며 기뻐하는 그들 사이를 지나친 데미웨이가 내게 악수를 건넸다.
“유안 경, 경의 말대로 모두 경의 공이다. 블란츠바그의 사령관으로서, 그리고 이 일대의 영지의 맹주로서 경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겠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딱히 감동에 손이 떨리는 건 아니었다.
“경은 영웅이다.”
“그거 감사한….”
인사치레를 하려는데 눈앞이 흐릿해지며 멍해졌다.
“도련님!”
“도련님!”
“유안 오빠!”
프레시아와 길버트, 실루아가 놀란 눈으로 내게 달려왔다.
어딘가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코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렀다.
아, 코피….
* * *
“아, 낯선 천장이다.”
흔한 도입부 같은 감상을 읊으며 몸을 일으켰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유안 오빠! 걱정했어!”
세 사람이 엉겨 붙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앓는 소리를 내며 탭을 하자 세 사람을 떨어졌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또 일주일?”
일주일이었으면 숙소에서 깨어났을 텐데 여기는 꽤나 살풍경이었다.
나무로 지은 오두막인가?
“아닙니다. 두 시간 정도 기절해 계셨습니다. 여긴 레인저 초소 중 하나입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군.”
일주일을 기절했던 때는 내 몸뚱어리를 개조하는 것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런 이득이 없을 때 오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사양이었다.
“일어났나?”
데미웨이가 뜨거운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시게. 난로에 불을 놓았지만 아직 추울 걸세. 산맥의 밤은 한여름이어도 종종 영하로 떨어질 때가 있으니 말이야.”
창밖에는 어느새 어두컴컴했다. 토벌대는 초소 밖에 천막을 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나는 흔쾌히 커피 잔을 받아 홀짝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니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데미웨이는 내 일행들에게도 커피를 나눠주며 말했다.
“붉은 눈이 그렇게 날뛰었는데도 산맥 아래로 도망친 몬스터는 드물다는 보고가 있었다. 경이 이 일대 몬스터의 씨를 말려준 덕분이지.”
“전체 작전의 60퍼센트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토벌했을 뿐입니다.”
내 겸손에 데미웨이는 피식 웃었다.
맨날 인상 쓴 얼굴만 본 것 같은데 웃으니 이상했다.
“나머지는 아마 산맥 위쪽으로 도망갔을 거야.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듯 토벌했더군.”
“그게 피해가 덜하니 말입니다. 붉은 눈을 잡느라 인형을 꽤 많이 파손시켰습니다.”
“붉은 눈의 목에 비하면 싼 값이지.”
그건 그랬다. 이대로 붉은 눈을 놓쳤으면…. 아니, 놓쳤어도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토벌했을 테니 별 피해는 없었겠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미웨이는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경에게는 감사하고 있네. 솔직히 가문의 원수를 죽이는데 마지막 일격만 가한 것 같아 허전한 느낌이지만, 놓쳤을 때 병사들과 영민들이 입을 피해를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지.”
그는 공명심보다 실리를 중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은 싫지 않았다.
데미웨이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 일행들에게 말했다.
“잠시 유안 경과 둘이서 할 말이 있는데 자리를 비켜주겠나?”
데미웨이의 부탁에 길버트와 실루아는 내 눈치를 봤지만 프레시아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어딘가 모르게 데미웨이에게 화가 난 듯 보였다.
나는 그런 프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들 나가봐. 뭐, 사령관님께서 하실 말이야 뻔하니 너희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하니까 경계를 서줘.”
내 지시에 프레시아는 별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들이 밖으로 나가자 데미웨이는 프레시아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 뭡니까? 인형 보수 값이랑 전공(戰功)은 안 깎아드릴 겁니다.”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데미웨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 아니, 아니진 않은가. 나중에 깎을 것도 부탁할 것이긴 하지만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야.”
깎아달라고 할 건가.
“경은… 대체 누구지?”
데미웨이의 물음에 나는 쓰게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아셨군요. 토벌 작전이 끝날 때쯤 보고받으실 줄 알았는데.”
데미웨이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느닷없이 와서는 왕실 기사라고 주장한다고 그렇구나 넘길 위인이 아니었다.
부하에게 내 신상 조사를 시켰을 거다.
“보고를 받은 건 이틀 전이었다. 수도에 경의 이름을 아는 기사나 병사가 없다더군. 이상한 일이야, 왕실 기사패는 진짜였으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신원 미상의 인원을 작전에 투입하셨습니까?”
“나는 경이 왕실 기사라서 작전에 투입한 게 아니라 현자 게오르의 제자로서 투입한 거니까. 다른 건 몰라도 실루아가 다루던 네임드 인형은 만병의 현자의 것이었고, 질리안은 경을 ‘주인 대리’라 불렀다.”
원래 바이스 마스터라 불리던 것은 게오르의 아내 제이올린 뿐이었다.
그 당시의 게오르는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제이올린뿐이라 생각했던 거겠지.
데미웨이의 시선에 나는 기사패를 꺼냈다.
“보시다시피 기사패는 진짜입니다.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가진 것도 진짜죠. 조사를 할 때 제 이름만 조사하지는 않으셨죠?”
내 물음에 데미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길버트와 프레시아란 이름의 왕실 기사도 함께 조사했다. 길버트란 이름은 경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몰랐다.”
길버트는 아무도 모를 만했다.
출발 당일 내 호위 기사로 임명되었으니 아는 녀석이 있으면 이상했다.
“하지만 프레시아는 아니었겠죠.”
프레시아는 지금 열다섯 살, 몇 개월 뒤면 열여섯 살이 되는 어린 나이다.
오래 기사 생활을 하진 못했지만 어리고 여성이란 점은 충분히 눈에 띄는 요소였다.
게다가 호레이즌이 후견인이란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알게 모르게 프레시아는 왕실 기사들 사이에서 유명인이었다.
“프레시아가 모시는 사람이 누구였죠?”
“제 1왕자 유안…. 경과 같은 이름이군.”
데미웨이의 대답에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인사했다.
“원래라면 토벌이 완료되고 영지를 떠날 때 살짝 말씀드리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요. 다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블란츠바그 후작. 저는 이 나라의 1왕자 유안 델 아즈데미안 듀플리온입니다.”
내 자기소개에 데미웨이는 예상치 못한 것처럼 벙 찐 얼굴을 했다.
“…진짜?”
“진짜.”
“진짜 경이 1왕자라고?”
“예, 제가 진짜 1왕자입니다.”
조사를 했다길래 예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전하가 일부러 날 회유하기 위해 보낸 1왕자의 이름을 쓴 마법사가 아니라?”
“아하,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네.”
데미웨이의 추측은 이랬다.
호레이즌의 파병 요청을 들은 왕은 호레이즌은 보내지 못하지만 엇비슷하게나마 보조할 수 있는 마법사를 보내기로 한다.
파견할 마법사는 만병의 현자의 제자로 왕이 비장의 패로 숨겨둔 마법사였으니, 귀족파의 감시에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왕실 기사 신분으로 보내되 데미웨이가 눈치챌 수 있게 1왕자와 그 호위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거였다.
파발이 돌아오기보다 먼저 도착한 건, 마법 인형은 먹지도 쉬지도 않으니 당연한 거라 생각한 듯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날 바라보던 데미웨이는 내가 직계 왕족의 신분을 증명하는 왕실패를 꺼내 보이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님의 상상력이 이렇게 풍부한지 몰랐습니다.”
다분히 정치적이면서도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너무 놀리지 말… 마십쇼. 최우선 포섭 대상이 포섭 불가 대상이라 지금 심란하니 말입니다.”
데미웨이는 내게 존대를 했다.
장군이건, 후작이건 신분상으로는 왕자에게 하대할 수 있는 건 이 나라에서 왕뿐이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왕자로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니 편하게 대해주십쇼. 아시다시피 저는 실종 중이라 말이죠.”
아무리 변방인 블란츠바그라고 해도 정보력이 부족하진 않을 테니 내 소식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리하지.”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온 건 어디까지나 제 의지이니 나중에 지지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왕보다는 절 지지해 주십쇼. 뭐, 그럴 마음이 생긴다면 말입니다.”
붉은 눈 토벌로 데미웨이에게 큰 빚을 지워두긴 했지만 충성을 강요하기에는 부족했다.
지금은 빚을 지워두고 호감을 사는 정도로 충분했다.
내 말에 데미웨이는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왕자님을 지지하면… 좀 깎아주실 겁니까?”
그의 말에 나는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핫! 한번 협상을 해보시지요!”
내 미소에 데미웨이는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된통 잘못 걸렸다는 얼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