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붉은 눈 토벌전 (1)
나는 인형 보관소로 돌아가며 편지를 확인했다.
온갖 고상한 잡소리로 수놓아진 왕의 편지는 현재 수도의 상황을 꽤나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이야기의 절반은 호레이즌을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고, 절반은 블란츠바그 후작을 회유하기 위한 사과의 말이었다.
“제국의 후작이 오다니.”
과연 왕이 호레이즌을 보내지 못할 만했다.
제국의 다른 귀족도 아니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권신이자 제국이 자랑하는 일곱 초인 중 한 명인 아사자하드 후작이 직접 왔으니 말이다.
제국에서는 그녀를 포함한 일곱 초인에, 초인이라 부르기 한참 부족한 기사 다섯을 더해 12기사로 불렀다.
나머지 다섯은 그냥 장식으로, 흔한 허장성세였다.
여하튼 아사자하드 후작은 여자의 몸으로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탓에 평가 절하 당할 때가 많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무려 ‘아르카나 03, 여제(女帝)’였으니까.
“여제라….”
그런데 이상하다.
제국과 왕국의 거리를 보면 아사자하드 후작이 도착한 시간이 애매했다.
이 날짜에 도착했다면 내가 암살자들에게 조작해 놓은 왕후의 명령서를 확인하고 출발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정보를 전달하는 데 시간이 드는 것은 물론, 그녀를 움직이기 위해선 황제를 설득할 시간도 필요했다.
물론 마법이나 사제들의 신성술로 시간을 단축할 방법은 있어 확신할 순 없다.
혹시 내 조작을 확인하고 보낸 게 아니라면 ‘아르카나 10, 수레바퀴’가 예언이라도 한 건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좋겠군.”
예언이나 예지는 제약이 굉장히 많았는데, 제약 중 하나는 한 번 미래를 본 다음에는 장시간 미래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아르카나 10이 예언을 했다면 앞으로 당분간은 내 위치에 대한 예언은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의미 없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로는 추론할 수 있는 게 너무 적다. 망상이나 다를 바 없는 추측이군.
편지를 읽으며 인형 보관소에 도착하니 젊은 청년 하나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게오르의 마법을 훔쳐보기 위해 기웃거리는 마법사인가 하고 봤더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 유안 경, 이제 오는 겁니까?”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었더니 긴급 군사 회의에 참석했던 천인장 중 하나였다.
천인장들 중 유독 젊기에 눈에 띈 사람이었다.
“제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천인장님.”
장군으로 취급되는 천인장쯤 되면 일개 말단 왕실 기사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또래라 그런지, 아니면 왕실 소속이라 그런지 다들 존대를 해줬다.
내가 이름 없이 그냥 천인장이라 부르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자기소개를 했다.
“이런, 소개가 늦었습니다. 쥴라트 디 블란츠바그라 합니다.”
“블란츠바그? 혹시 사령관님과는?”
내 물음에 쥴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입니다. 그래도 부담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이곳은 실력이 없으면 다들 인정을 안 해주는 곳이니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유안이라 합니다.”
인사를 받은 쥴라트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웨이와는 많이 닮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의 어머니와 더 닮은 듯했다.
소설 속 쥴라트는 데미웨이의 장남으로서 후계자로 촉망받지만, 아르카나의 음모에 휘말려 죽는 인물이었다.
꽤 먼 훗날의 일이라 소설대로 사건에 휘말리게 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경을 만나러 왔는데 이 질리안이란 인형들이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더군요.”
그가 불만인 듯 무표정한 질리안 13호를 가리켰다.
“하하, 쥴라트 천인장께서 이해해 주십쇼. 마법사란 자신의 마법에 민감하지 않습니까.”
“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내 물음에 쥴라트는 주머니에서 작은 목함 하나를 꺼냈다.
“사령관님께서 경에게 이걸 전할 것을 명하셔서요.”
“이건.”
“경이 바란 도움입니다. 사령관께서 말씀하시길 당돌하게 요구하였다 들었습니다.”
내가 사령관실에서 나가자마자 아들을 불러 심부름을 시킨 모양이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영약이었으니 믿을 수 있는 아들을 시키는 것도 당연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영약을 탐낼 리 없으니까.
“그런데 어쩌다 심부름으로 금고까지 갔다 온 나보다 늦게 온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아, 파발이 가져온 수도 소식을 읽으며 와서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도 왕실 기사인데 수도 소식을 알 수 있다면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검은색에 은빛의 반점이 반짝이는 환약이 있었다.
“그 약은 저도 먹기 힘든 약입니다. 그나저나 유안 경은 마법사라 들었는데, 경이 먹는 겁니까?”
마치 기사인 프레시아나 길버트가 먹으면 좋지 않느냐는 듯이 들렸다.
아니,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겠지.
“확실히 귀한 것이긴 하죠. 그래도 공을 세우면 포상으로 또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대답에 쥴라트는 흥미롭다는 듯이 날 보며 웃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그만큼 만병의 현자가 남긴 인형을 다룰 자신이 있다 보면 되겠습니까?”
“뭐, 그건 해봐야 아는 거긴 한데. 이건 제가 얻은 것이고, 제 동료들은 각자 알아서 얻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뭐든 스스로 쟁취한 게 값어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떻게든 챙겨줄 생각이긴 했다. 프레시아는 몰라도 길버트는 먹을 필요가 있다.
“아하하하! 그 말이 옳습니다! 뭐든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법이죠!”
쥴라트는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아버지인 데미웨이와 달리 속에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죠.”
쥴라트는 웃으며 일을 하러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검귀 못지않은 강자로 성장할 인재였다.
탐나는 인재지만, 지금은 데미웨이 밑에 있는 게 성장에 가장 도움이 될 테니 당장 끌어들이는 건 자중하기로 하자.
* * *
질리안 시리즈는 열심히 인형을 재조립하고 있었고, 실루아는 여전히 인형 설계도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싸우고 돌아와 회복 마법진 위에서 체력을 회복하며 연공과 동시에 단련 중이었다.
검귀의 요람이라 불리는 요새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렌치.”
내가 손을 뻗자 프레시아는 공구함에서 렌치를 꺼내 내게 쥐여줬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렌치로 볼트를 조이며 프레시아에게 물었다.
“프레시아, 안 쉬어도 괜찮아?”
연일 몬스터가 몰려오는 횟수가 늘어가는 중이라 프레시아도 몇 시간에 한 번씩 전투를 치러야 했다.
길버트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회복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데, 프레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날 보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걸 보면 살짝 걱정이 됐다.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쉬고 있습니다.”
“날 도와주는 게?”
“이 정도면 쉬는 겁니다. 그리고 전투라고 해봤자 잔챙이뿐이고,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 말에 나는 구석에서 열심히 연공하며 마력을 다시 채우고 있는 길버트를 바라봤다.
그 잔챙이를 상대하고 나서 기진맥진해하는 녀석이 있는데 말이지.
내 보조를 하는 건 질리안 시리즈로도 충분했지만 굳이 프레시아의 도움을 거절하진 않았다.
질리안 시리즈는 하나라도 더 인형 조립에 투입하는 게 효율이 좋았다.
내 옆에 서서 날 지켜보던 프레시아는 말했다.
“싸우면서 며칠 전에 하신 도련님의 말씀을 생각해 봤습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싸우다 보면 저는 다른 사람을 모른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그래? 네가 해석한 의미는 뭐지?”
“다른 사람들은 제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는 겁니다.”
머뭇거리며 대답한 프레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스스로 말하고도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정확히는 비효율적으로 느껴지지?”
“…예, 그렇습니다.”
프레시아는 10의 힘으로 100의 성과를 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10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힘을 모두 활용하는 건 쉽지 않다.
대부분 10의 힘으로 1, 2의 성과를 내는 게 보통이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4, 5 정도의 성과를 내겠지.
10의 힘으로 10의 성과를 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유하자면 격투 게임에서 같은 성능과 같은 기술을 가진 동일한 캐릭터를 다루는데, 누구는 프레임 단위로 쪼개가며 공격하고 누구는 되는대로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다.
그러니 프레시아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10의 힘을 지닌 사람을 보고도 자신처럼 100의 성과를 이루는 사람처럼 봤기 때문이다.
천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프레시아, 곧 붉은 눈 토벌대가 구성될 거야. 너도 거기에 참가하도록 해.”
인형을 다뤄야 하는 나도 군사 회의에 참가하고 있다.
토벌대에 사람 한두 명 집어넣는 건 일도 아니다.
“도련님! 하지만!”
“알아. 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7번 나사 다섯 개랑 드라이버.”
프레시아는 대답 없이 내게 나사와 드라이버를 건넸다.
“지금까지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괴물들을 봐왔으니 이제 특별한 사람과 특별한 괴물을 봐야지.”
검귀 데미웨이와 대마수 붉은 눈은 프레시아의 성장에 좋은 영양제가 되어줄 거다.
토벌대에서 공을 세워주면 더 좋고.
나는 침묵하는 프레시아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길버트를 왜 훈련시켰어? 너도 네가 없는 상황에서 날 호위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단련시킨 것 아니야?”
“그, 그건 그렇지만 길버트는 아직….”
“프레시아, 그렇게 따지면 너도 호레이즌 경 눈에는 아직 혼자 걷는 것도 미숙해 보이겠지. 스승의 눈에는 제자가 다 그런 법이니까.”
물론 호레이즌은 프레시아를 걱정하는 거고, 프레시아는 날 걱정해서 그런 거겠지만.
“길버트는 잘해주고 있어. 내게는 정령들도 있고, 실루아도 있어.”
인형 설계도를 그리던 실루아는 지신의 이름이 불리자 손을 들며 외쳤다.
“유안 오빠는 제가 지킬게요!”
그 모습에 나는 키득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봐, 믿음직하잖아.”
“도련님….”
아직 미련을 보이는 프레시아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명령이야, 프레시아.”
“…알겠습니다. 명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완성한 거대한 성게 덩어리 같은 걸 높이 들어 던졌다.
“읏차! 완성이다!”
철컥! 철컥! 철컥!
높이 던져진 쇳덩이가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넓게 펴지며 성인 하나가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철망 구체(球體)가 되었다.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저 이상한 물건은 뭐냐는 듯이 날 바라봤지만 실루아는 눈을 반짝이며 구체로 쪼르르 달려와 관찰했다.
“와! 아버지의 마지막 연구가 완성되었군요!”
“맞아. 마력회로 개발을 위한 3차원 입체 마법진이야.”
얼기설기 얽힌 철망에는 게오르의 마법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새겨진 마법은 통각 차단, 혈관 수복, 지혈, 생명력 강화, 자연 회복력 강화 등등으로, 그 수가 세 자리 수에 육박했다.
나는 구체를 바로 세운 다음 구체 곳곳에 마석을 끼워 넣으며 중얼거렸다.
“완전 돈지랄이군.”
성능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마력회로를 개발하는 데 이만큼의 마석을 사용하는 건 낭비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사냥한 몬스터에서 나온 마석을 일당으로 받아서 식자재 창고에 있는 최상급 마석은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게오르의 이론에 따르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영약의 성능이 중요하지, 마석은 마법진을 구동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저 몸을 보호하는 용도로 실버블룸을 사용한다는 걸 데미웨이가 알았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낭비냐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옷을 벗고 마석을 갈아 넣은 먹물로 가슴과 양 팔다리에 마법술식을 그렸다.
그리고는 실버블룸을 입에 넣으며 철망 안으로 들어갔다.
“실루아, 마법진을 구동시켜.”
내 지시에 실루아는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통각 차단 마법도 있으니 아마 괜찮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