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검귀의 요람 (9)
나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읏차차차! 아이고, 뻐근해라.”
몇 시간이고 핵과 구동 마법진을 고치느라 가만히 앉아 있으니 온 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핵심 부품 수리는 마쳤으니 이제 분해했던 것들을 조립하는 것만 남았다.
솔직히 지난 사흘간 망가진 부품을 고치는 것보다 인형들을 분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조립은 부품 청소와 기름칠까지 해야 하니 지금부터 닷새는 더 걸릴 터였다.
물론 조립 같은 건 질리안 시리즈가 할 테니 나와 실루아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프레시아는 어느새 간식을 얻어 왔는지 비스킷과 홍차를 가져왔다.
“고마워. 야, 길버트! 그만 졸고 너도 먹어.”
내 부름에 인형 보관소 구석에서 졸다 못해 숙면을 취하고 있던 길버트가 일어나며 입가의 침을 닦았다.
“아…! 예! 부르셨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웃으며 잠에서 덜 깬 길버트에게 비스킷을 건넸다.
“먹으라고.”
“아! 감사합니다.”
길버트는 비스킷을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데미웨이는 내가 작정한 계산서를 받아 들고 식겁하고 있을 거다.
계산서에 적힌 것들은 대부분 그대로 작성했지만 핵심 부품에 들어가는 것들은 살짝 부풀려 적었기에 총액이 껑충 뛰었다.
핵심 부품은 모두 값비싼 마법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데미웨이가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 사기 치기 딱 좋은 품목이었다.
아주 조금씩만 부풀렸기에 어지간히 계산이 빠른 마법사들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내가 슬며시 미소 짓자 프레시아는 무언가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도련님, 또 뭘 꾸미시고 계신가요?”
“무슨 소리야? 내가 뭘 또 꾸민다고.”
내가 부정하자 프레시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렇습니까? 왠지 지금 웃으시는 게, 꼭 인형의 숲에 처음 들어갔을 때 저와 길버트를 방위 인형들이 있는 곳에 밀어 넣으실 때와 비슷한 것 같아서요.”
왠지 날이 갈수록 눈치가 빨라지는 것 같았다.
프레시아의 말에 길버트는 비스킷을 집으려던 걸 멈추고 내게서 떨어졌다.
아무래도 길버트에게 있어서 살짝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반응에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화재를 돌렸다.
“크흠! 그러고 보면 몬스터와의 실전은 처음이었을 텐데 둘 다 어땠어?”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프레시아의 말에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길버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음, 티 나?”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웃음을 몇 번이나 봤는데 못 알아보겠어요?”
“내가 그렇게 많이 티를 냈나?”
“제가 본 것만 해도 도련님께서 2왕자를 도발할 때, 디벳 영감님을 도발할 때, 디벳 영감님의 손녀를 인질로 잡았을 때, 왕후의 부름에 응했을 때, 왕후와 만났다는 알리바이 조작할 때, 암살자들을 처리하고 증거를 조작할….”
끊임없이 쏟아지는 증언에 나는 항복하듯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난 항상 똑같이 웃었을 텐데 어떻게 구분하는 거지?
살짝 무서운데.
“일단 이번에 내가 노리는 건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내 말에 길버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프레시아는 날카롭게 지적했지만 난 모르는 척했다.
“어흠! 별것 아니야. 그저 블란츠바그 사령관이 내게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하도록 미끼를 던졌을 뿐이야.”
내가 노리는 건 데미웨이가 내게 빚을 지게 하는 거였다.
정확히는 빚이라기보다는 부채감에 가깝다.
자금적 여유가 부족한 데미웨이는 나와 협상을 하려 할 거다.
그럼 나는 선심 쓰는 척하며 깎아주고, 나중에 그의 힘이 필요할 때 도움을 약속받을 생각이었다.
마법 계약을 통한 구속력까지 더하면 좋겠지만 검귀 정도쯤 되면 검으로 계약 자체를 베어낼 수 있을 테니 의미는 없겠지.
검 같은 철 쪼가리로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계약을 베어낸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천하십검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태연하게 하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몬스터 무리와 싸워본 경험은 어때? 인형들과 싸웠던 경험이 도움은 좀 됐어?”
내 물음에 길버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예에…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는데, 이상한 습관이 들었습니다.”
길버트는 목을 베고도 심장과 팔다리까지 베어버리는 습관이 생겼다며 울상을 지었다.
“어… 그건 나도 생각 못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습관이었다.
최대한 강렬한 경험을 심어주는 것으로 속성 교육을 시키려던 게 이런 식으로 부작용이 나타날 줄이야.
“그래도 인형들을 상대한 경험이 없었으면 10마리도 상대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뭐, 확인 사살하는 습관이 나쁜 건 아니니까.”
팔다리까지 베어내는 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프레시아가 교정해 주겠지.
내가 그런 의미에서 프레시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시아는 어땠어?”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침묵에 나는 싱긋 웃었다.
“생각보다 많이 쉬웠지? 마음만 먹으면 혼자 몰살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황스러웠어?”
내 예상을 들은 프레시아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부끄럽게도 그런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프레시아는 아직 모든 힘을 사용해 싸워본 적이 없었다.
물론 왕궁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육체적, 마력적 한계에 달할 정도의 수련을 거듭했다.
호레이즌의 가르침이라면서 매일같이 자신의 한계치를 측정하고 그 한계를 넘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몰랐다.
“아니, 건방진 생각이 아니야.”
그녀의 비교군은 언제나 어린 시절 보아왔던 자신의 스승이었기에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바스타유에 오려는 목적 중 하나는 프레시아, 네게 비교 대상을 보여주고 싶어서야.”
“비교 대상 말씀이십니까?”
프레시아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 너는 네 자신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잘 모르기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고 그 신중함은 언젠가 독으로 작용하게 되겠지.”
사실 서커스에서 날 위협한다고 네크로맨서인 아리사의 모가지를 대뜸 썰어버렸던 걸 떠올리면 그렇게까지 신중한 것 같진 않지만, 타인과 자신을 제대로 비교하는 경험은 필요했다.
<겨울나무의 현자>에서 여주인공 프레시아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붉은 눈을 추적하는 특무대에서 동료들을 잃고 큰 부상을 입게 된 이유는 과한 신중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신중함은 자신을 동료들, 그리고 적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위치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겼다고 훗날의 그녀는 회고한다.
물론 3년이나 이곳에 있으면서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못한 이유는 왕자 유안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발버둥 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가 컸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이곳에는 비교 대상이 많아. 전 대륙을 뒤져보아도 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 근위 기사단인 황금사자 기사단을 제치고 왕국 최강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설표 기사단, 그리고 천하십검의 한 사람인 검귀까지. 네 성장을 위한 무대로서 이곳만 한 장소가 없지.”
때마침 붉은 눈이라는 대마수 또한 활동을 시작했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살짝 긴장하며 뺨이 발그레해졌다.
아니, 긴장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인한 흥분인가?
어쩌면 호승심일 수도 있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스타유 산맥과 인접한 이곳이 그녀에게 있어 최적의 훈련장임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 인형 보관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인장 한스입니다! 이 얼굴 똑같이 생긴 여자들이 들어가는 걸 막는데, 들어가게 해주십쇼! 급한 일입니다!”
한스가 입구를 지키는 질리안 12호와 13호에게 막혀서 들어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실루아, 인형 설계는 나중에 마저 하고 일단 정리하자.”
“네에~!”
내 말에 실루아는 아쉬워하며 설계도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질리안 시리즈에게 정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나는 문을 살짝 열고 한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나오자 한스의 얼굴이 밝아지며 급하게 말했다.
“사령관님께서 빨리 오시랍니다!”
“사령관님께서요? 무슨 일입니까?”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내 물음에 한스는 내 팔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질리안 12호에게 저지당했다.
“바이스 마스터께 허락받지 않은 신체 접촉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질리안 13호는 검을 뽑아 들며 경고했다.
“비허가 신체 접촉은 제재당할 수 있음을 경고드립니다.”
질리안 13호의 경고에 순간 한스의 기세가 날카로워졌지만, 이내 진정하며 양손을 들었다.
“하하,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령관님께서 긴급 군사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특히 유안 경을 급히 모셔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긴급 군사 회의를 소집했는데 날 불러?
왜일까…. 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수도에서 좋지 못한 소식이 온 모양이다.
“회의를 여는 이유는 아십니까?”
“아뇨, 전 백인장이라 회의에 참가하지 못해서 그런 것까지는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내 말에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따라가겠다고 일어났지만 손을 들어 막았다.
“제 동료들은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휴식이 필요합니다. 저만 가도 괜찮겠죠?”
“그건….”
“사령관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험한 곳도 아니고 꽤나 지루한 자리가 될 텐데 굳이 따라와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 * *
한스의 안내를 따라 사령관실에 도착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특무대장이 바로 문을 열었다.
“유안 경이 도착했습니다, 사령관 님.”
특무대장의 말에 사령관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
사령관실에는 총 열세 명의 천인장과 각기 다른 문장이 새겨진 기사단 제복을 입은 기사 다섯, 그리고 로브 차림의 마법사 셋이 데미웨이를 중심으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사령관 각하.”
내 인사에 데미웨이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그런데 자네 동료들은 어디 있나?”
“전투 후 휴식 중이라 저만 왔습니다. 휴식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동의를 구하자 데미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러 미안하게 생각하네.”
“이해합니다. 긴급한 일이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데미웨이의 사과를 가볍게 받아들이자 데미웨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연하다? 내가 무슨 일로 불렀는지 알고 있나?”
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추측할 뿐이죠.”
“추측이라…. 그 추측을 들을 수 있겠나?”
데미웨이는 날 시험하듯 노려봤다. 시도 때도 없이 노려보는 걸 보면 노려보는 게 아니라 그냥 눈매가 나쁜 게 아닌가 싶었다.
“사령관 각하께선 중앙에 호레이즌 경의 파견을 요청하셨습니다. 수도로 보낸 파발이 잠도 줄여가며 달렸다면 슬슬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대입니다. 그런데 이리 긴급히 군사 회의를 소집한 데다 외지인인 저희까지 불렀으니, 파발이 좋지 못한 소식을 들고 왔다고 추측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이유에서는 모르겠지만 왕은 호레이즌을 보내지 않겠다는 서신을 보낸 듯했다.
왜지? 내가 조작한 것들로 충분히 왕후를 몰아낼 수 있을 텐데. 혹시 내가 모르는 변수가 생겼나?
지금 상황에서 호레이즌을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다.
내 물음에 데미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추측대로다. 그럼 자네를 왜 불렀는지도 알겠나.”
“두 가지 이유겠지요. 하나는 저희가 하고 있는 인형의 수리의 진척 과정을 묻고, 그 인형들을 투입할 수 있는 날짜를 묻기 위함일 겁니다.”
내 말에 사령관실의 지휘관들은 놀란 눈으로 나와 데미웨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반응을 보아하니 인형을 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이 자리에서 사령관을 비롯해 여섯 명 정도인가.
“다른 하나는?”
“제가 그 인형을 다룰 수 있는가를 묻고자 부른 거라 생각합니다.”
인형술사가 없는 마법 인형은 조종사 없는 전투기나 마찬가지다.
이곳에는 다른 마법사도 있지만 인형의 모든 성능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제가 호레이즌 경을 대신할 수 있느냐란 말이 되겠죠.”
내 말에 마법사 세 명을 제외한 지휘관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들에게 있어 호레이즌은 데미웨이와 동급의 초인이었다.
나처럼 약해빠진 녀석이 호레이즌을 대신한다는 말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데미웨이는 진지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데미웨이의 말에 다들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네가 호레이즌 디 그레인의 대신이 될 수 있겠느냐?”
그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