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검귀의 요람 (8)
인형 보관소로 들어간 나는 열심히 손상된 핵을 수리하는 실루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천천히 해. 아직 시간 많아.”
슬슬 본격적인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려는 듯했지만, 지금 시기상 아직 산 중턱 위에 서식하는 녀석들이 깨어나기에는 일렀다.
바스타유 산맥은 특정 대마수를 제외하고는 산 위로 올라갈수록 강한 몬스터가 서식했다.
“웅, 그래도 이대로 있으면 불쌍하잖아요.”
실루아는 흡사 거미 같은 형태의 투박한 인형을 쓸어 만졌다.
실제 거미와 달리 매끈하고 각진 형태라 혐오감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근미래적인 로봇 병기 같아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외형이었다.
“나도 도울게.”
“아, 그럼 여기 마법진을 새긴 판에 마법진을 다시 새겨 주시겠어요?”
실루아는 강한 충격에 마법진이 지워진 것처럼 보이는 강철판을 가리켰다.
“그래.”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아바스엘의 마법 각인펜으로 마법진을 다시 새겼다.
인형들의 손상 부위는 대부분 관절 부위 파손, 외골격 손실, 마력선 절단 등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인형 내부 깊숙이 있는 구동 마법진이나 핵이 망가진 경우는 100개가 넘지 않았다.
핵심 부품이 망가진 것도 장기간 보수를 하지 않아 생긴 결함이거나 적정 출력을 지키지 않아 억지로 출력 이상의 힘을 내게 만들어 과부하가 걸린 탓이었다.
전사들의 땅이라 불리는 블란츠바그에도 마법사는 존재했으니 그들이 한 짓일 터였다.
“그러고 보면 마법사들이 수리하는 거 도와주겠답시고 또 수작 부리진 않았어?”
내 물음에 실루아는 핵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대답했다.
“질리안들이 내쫓았어요.”
마법사들에게 현자가 만든 마도구는 그야말로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런데도 인형들의 핵심 부품이 멀쩡한 이유는 게오르의 잠금장치 속에 보호되고 있어서였다.
잠금장치는 게오르가 만든 것답게 그의 마법 체계를 알지 못하면 풀지 못했다.
잠금 장치를 풀 수 있을 정도로 게오르의 마법 체계에 익숙하다면 마법 핵이나 구동 마법진에서 배울 점은 크게 없었다.
“그런데 역시 핵의 성능을 높이는 건 안 되나요?”
실루아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성능만으로도 충분해. 성능을 높여봤자 연비만 나빠질 뿐이야.”
처음 인형들을 분해해 확인하던 중 실루아가 핵을 수리하는 걸 넘어 업그레이드시키려는 걸 내가 막았다.
여기서 성능을 높이는 건 좁은 골목길을 주로 다니는데 소형 경차가 아니라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블란츠바그의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성능을 높이겠다고 마석을 더 많이 필요로 했다간 운용할 수 있는 인형 수가 줄어들어 안 하니만 못했다.
“그래도 너무 옛날 건데요.”
물론 30년 전 설계가 완성된 핵이다 보니 지금은 성능을 높이면서 연비도 낮추는 방법이 있었다.
그래봤자 인형의 몸체가 보급품이라 핵의 성능을 버티는 데 한계가 있어 핵의 업그레이드만큼 효율이 나오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안 돼. 지금이 딱 좋아.”
데미웨이가 인형을 자체적으로 양산해 보겠다고 잠금장치를 베어내면 기술이 유출될 위험이 있었다.
검귀라면 마법에 대해서 몰라도 충분히 가능했다.
지금이야 그가 역대 후작 중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하고, 게오르의 은혜를 생각해 그런 짓을 안 한다고 하지만, 나중에 늙어서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게오르는 그걸 감안해서 인형에 나름 절충한 사양의 핵과 구동 마법진을 넣은 듯했다.
“다 스승님이 생각이 있으셔서 이걸 사용하신 거니까 업그레이드하고 싶어도 참아.”
실루아는 아직 사회 물을 안 먹어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세상의 발전을 위해 기초는 풀되 우위가 되는 기술력은 독점해야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섣불리 기술을 풀었다가 내 적이 그 기술을 날름 먹고 강해져서 날 죽이려 들면 얼마나 분통 터지겠는가.
이건 생존의 문제다.
“네….”
내 단호한 말에 실루아는 시무룩해져서 망가진 부분만을 고쳤다.
언젠가 이 인형에 넣은 핵이 보편적인 기초 마법이 될 정도로 발전할 시기가 올 거다.
그럼 그때 가서 지금 사용하지 못한 수준의 것을 사용하면 된다.
그게 몇십 년 뒤가 될지, 몇백 년 뒤가 될지, 아니면 내 예상을 뒤집고 몇 년 뒤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발전해 가는 거다.
나는 시무룩해진 실루아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만들고 싶으면 날 위한 인형을 하나 만들어 줘. 네가 가진 모든 걸 쏟아 부은 인형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보고 싶긴 하네.”
실루아가 아무리 게오르의 모든 마력과 지식을 계승했다고 해도 당장 게오르처럼 인형을 만들긴 힘들 거다.
원래 초등학교 때 배운 사칙연산을 수능 볼 때까지 실수하는 게 사람이니까.
실루아는 그저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니 활용에서는 더 실수가 많을 거다.
내 부탁에 실루아는 만지작거리던 코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오빠를 위해 최고의 인형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리고는 바로 마법 종이를 꺼내 인형 제작을 위한 도해 제작을 시작했다.
아니, 일단 하던 거는 마저 하고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실루아가 내려놓은 코어를 들고 마저 수리했다.
내가 핵심적인 부품을 수리하는 사이 질리안 시리즈는 일사분란하게 인형을 해체하고 손상 부위를 교체한 후 다시 조립하고 있었다.
“질리안 오리지널, 교체에 사용한 부품 품목 좀 줘봐.”
“예, 바이스 마스터. 여기 있습니다.”
나는 암산으로 부품을 만드는 데 든 재료를 계산했다.
인력 비용을 더해서 데미웨이에게 청구할 예정이었다.
물론 회수한 망가진 부품을 녹여서 따로 사용해도 괜찮았지만, 이 정도는 받아야지.
오른손으로 마법진을 다시 그리고 왼손으로 계산서를 작성하는데 전투를 마친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돌아왔다.
20분도 안 걸린 것 같은데 빨리 왔군.
* * *
데미웨이는 특무대로부터 보고된 붉은 눈의 위치 추적 보고서를 훑으며 특무대장에게 물었다.
“거북이 바위 인근에서 동면하던 흔적을 발견했다던데 그건 어떻게 됐지?”
데미웨이의 물음에 특무대장은 보고서를 확인한 후 대답했다.
“예, 그 근방에 굴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붉은 곰 계열 몬스터 서른 마리를 발견하였고,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블란츠바그의 특무대는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 지금 시기까지 동면 중인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일도 맡았다.
아직 몬스터들이 모두 깨어나지 않은 지금 시기에 최대한 많은 몬스터들을 처리해야만 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잘했군. 소재는?”
“가죽과 약용 효과가 있는 웅담, 그리고 마석 및 몇몇 마법 소재를 채취한 후 각각 대장간, 의무대, 마도병단에 보냈습니다. 고기는 아쉽게도 부피와 무게가 너무 큰 탓에 버리고 왔다고 합니다.”
특무대장의 대답에 데미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고생하라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지금도 특무대는 레인저들을 데리고 산맥을 누비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라.”
데미웨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외성벽을 지키는 젊은 천인대장이 들어오며 경례를 했다.
“충성! 사령관님께 보고드릴 것이 있어 방문했습니다.”
젊은 청년의 말에 데미웨이는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까 울리던 적습 경보 관련 보고인가? 쥴라트.”
데미웨이의 물음에 천인장 쥴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금일 10시 15분 경, 약 1200여 마리의 도마뱀형 몬스터 무리가 남하하여 요새에 도달하였습니다. 여기 보고서입니다.”
데미웨이에게 보고서를 건넨 쥴라트는 보고를 계속했다.
“요새 밖에서 1200여 마리의 몬스터와 아군 백인대 셋이 교전하였습니다. 교전 결과 적 몬스터 1023마리를 사살, 약 200여 마리가 도주하였고, 아군은 경상 4명을 제외하고는 피해가 없습니다.”
“세줄눈도마뱀, 꽤나 흉포한 녀석들이군.”
보고서를 넘기며 정보를 확인하던 데미웨이는 눈에 띄는 문단에서 멈췄다.
“…경보가 울리자마자 왕실 기사 둘이 먼저 달려가 성 밖의 바리케이드에서 길목을 막고 약 350여 마리를 사살?”
“예, 보고에 따르면 왕실 기사 길버트가 약 100여 마리, 프레시아가 250여 마리를 죽였다고 합니다.”
보고서를 마저 읽은 데미웨이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쓸어 만졌다.
“기사 수행을 하겠다고 말한 게 헛소리는 아니었군. 쓸 만하겠어. 그런데 입만 산 다른 한 놈은 어디 있지?”
“한스 백인장의 말에 따르면 아침 훈련 후 인형을 수리하러 인형 보관소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쥴라트는 한 장의 서류를 더 건넸다.
“왕실 기사 유안이 한스 백인장을 통해 전투 인형의 수리 내역과 계산서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수리 내역서를 본 데미웨이는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서랍에서 분기 예산 내역서를 꺼냈다.
무려 육천 대에 달하는 인형의 수리 내역이다.
대부분은 강철이나 구리같이 구하기 쉬운 재료들이었지만 그 양을 합치면 상당했다.
게다가 금이나 은같이 비싼 소재도 적게나마 사용한 만큼 지불해야 할 금액이 예산 범위를 가뿐히 초과했다.
그래도 데미웨이는 그들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단순히 수리와 정비를 부탁하는 입장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역서를 대충 계산해 봐도 가공비 명목으로 두세 배는 더 부를 수 있는 걸 재료값에 공임비를 약간 더 붙인 정도만 요구하고 있었다.
솔직히 대단히 양심적인 가격 책정이었다.
“돈 나올 곳이 없군.”
그래도 비싼 건 비싼 거다.
가뜩이나 돈과 물자가 궁한 시기였다.
가을과 겨울에 비축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붉은 눈이란 변수를 생각하면 섣불리 사용할 수도 없었다.
데미웨이의 한숨에 특무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저희가 편의를 봐주고 있는데 제가 깎아달라고 부탁해 볼까요?”
특부대장의 말에 데미웨이는 미간을 좁혔다.
“고작해야 숙식을 제공하는 정도로는 깎아주지 않을 거다. 섣불리 깎으려 했다가는 은혜를 운운하며 날 염치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려 들겠지. 나중에 내가 직접 협상을 해보겠다. 분할 납부라도 해야지.”
짧은 만남이었지만 능숙하게 자신의 속을 긁는 유안을 떠올린 그는 혀를 차고는 물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수도로 갔던 파발이 돌아올 때인데 소식은 있나?”
데미웨이의 물음에 쥴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빨라도 내일은 되어야 도착할 듯합니다.”
“그런가. 내가 호레이즌, 그 철부지 녀석을 기다리게 될 줄이야.”
데미웨이의 말에 쥴라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령관님. 그런데 인형의 수리가 다 끝나면 검호는 굳이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호레이즌의 필요는 데미웨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게오르의 인형들이 있다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검귀의 자리를 채울 수 있다고 여겼다.
그의 말에 데미웨이는 피식 웃었다.
“왜? 너도 나약해 빠진 중앙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자존심 상하는 게냐?”
“그것이 아니오라….”
쥴라트는 말끝을 흘렸다.
아니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젊은 그에게 바스타유 산맥으로부터 영지와 영민, 나아가서 왕국 전체를 지킨다는 것은 하나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었다.
데미웨이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나지막이 젊은 천인장을 불렀다.
“쥴라트 디 블란츠바그 천인장.”
“예! 사령관 각하!”
쥴라트는 사령관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부름에 바짝 긴장했다.
데미웨이는 그런 아들의 모습에 진지하게 말했다.
“인형은 인형에 불과하다. 인형술사의 보조가 없는 마법 인형은 병사를 대체할 수 있을지언정 나 데미웨이 디 블란츠바그를 대체할 수 없다.”
“…죄송합니다. 소장이 헛된 생각을 했습니다.”
아들의 사과에 데미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되었다. 중앙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길 바란다면 부단히 노력해라. 내 공백을 네가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될 일이다.”
쥴라트가 각오에 찬 대답을 하려는 그때 누군가가 급하게 사령관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령관님! 수도로 갔던 파발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 소리에 데미웨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