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검귀의 요람 (6)
우리를 안내했던 백인장 한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하하하! 이야~!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왕실에서 파견 나오신 분이라 생각해 버렸지 뭡니까. 특무대장님께는 한 소리 들었습니다.”
“많이 혼났습니까?”
내 물음에 한스는 키득거리며 상의를 끌어 올려 복부를 보여줬다.
그의 배에는 커다랗고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있었다.
“그냥 한 대 맞았습니다. 뭐, 맞는 거야 여기 사람들치고 맷집 약한 사람은 없으니 몇 대고 상관없습니다만, 그놈의 잔소리는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네가 그러니 천인장이 되지 못하는 거다, 속단하는 버릇만 고치면 당장 특무대로 데려올 텐데 언제 정신 차릴 거냐….”
한스는 속사포처럼 수다를 떨어댔다.
계속된 수다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한스.
그래, 그 이름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겨울나무의 현자>에서 붉은 눈을 상대하는 특무대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큰 실수로 부대원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프레시아가 제이드와 만날 계기를 만든 작자였다.
분명 특무대장의 평가로는 ‘성격 좋고 실력은 천인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성급하고 속단하는 습관 때문에 만년 백인장으로 써먹을 수밖에 없는 녀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신의 고생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내나 해주시죠.”
“아이고, 제가 귀한 손님 앞에서 수다가 많았습니다. 먼저 가보고 싶으신 곳이 있습니까?”
한스의 물음에 나는 길버트를 흘끔 보며 대답했다.
“연무장으로 가시죠. 어느 영지보다 뛰어나다는 블란츠바그의 전사들의 실력을 견식해 보고 싶군요.”
내 대답을 들은 한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수행을 하러 오셨다면 이 지역의 전사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싸울 일이 많을 텐데, 서로 실력을 알아두면 좋죠!”
* * *
한스는 바로 영주성 뒤편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안내하며 방위 부대에 대해 설명했다.
“저희 블란츠바그령의 방위군은 총 세 곳으로 나누어 편재(遍在)되어 있습니다.”
한스의 말처럼 방위군은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직업 군인과 기사로 이루어진 정규 본대.
탐험가들이나 사냥꾼, 퇴역 군인 등으로 평상시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지내는 예비 부대.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죄를 짓고 끌려온 죄수들로 이루어진 형벌 부대.
한스의 설명에 프레시아는 관심이 가는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형벌 부대는 다루기 힘들지 않습니까?”
프레시아의 대답에 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형벌 부대를 관리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그쪽에 있는 제 친구의 말로는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다들 알아서 괜찮다고 하더군요. 사람보다는 몬스터가 더 지랄 맞은 동네라 말이죠.”
형벌 부대는 가장 최전방에서 머물며 싸우기에 생존률이 특히나 낮았다.
소설 속에서 프레시아는 형벌 부대 중에서도 최악의 부대로 손꼽히는 레인저 부대로 전입하였다.
레인저 부대는 매일같이 산을 타고 순찰을 돌아야 했기에 수시로 몬스터와 부딪치는 곳이었다.
죄에 비해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지만 정작 프레시아 본인은 왕자 유안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싸울 수 있는 환경은 여주인공 프레시아에게 구원이었을지 모른다.
“한스 대장! 뒤에 멀끔해 보이는 사람들은 누구야?”
연무장에 도착하자 병사들은 대련하던 것을 멈추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이! 무뢰배들! 이분들은 사령관님의 손님이시다! 혹시라도 무례하게 굴면 뒤지게 맞을 테니 주의하도록!”
한스의 경고에 병사들은 낄낄거리며 대꾸했다.
“에이!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맞는 건 우리가 아니라 대장이잖아?”
“맞아! 맞아! 특무대장님한테 두들겨 맞는 건 언제나 우리 한스 대장이지!”
병사들의 말에 한스는 버럭 소리쳤다.
“알면 사고 좀 적당히 치라고, 이 썩을 것들아!”
“아하하하!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다니, 한스 대장답지 않은걸?”
“한스 대장이 제일 많이 사고 치잖아!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야?”
한스와 병사들이 장난스럽게 투닥거리는 것을 본 프레시아는 내게만 들리도록 마력을 담아 말했다.
-병사들의 질이 굉장히 좋습니다. 보통 병사들은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데 여기 병사들은 하나같이 마력을 다룰 줄 아는 듯합니다. 솔직히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낫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정규 본대의 병사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적게는 수 년, 많게는 십수 년은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바스타유 산맥의 전장은 하루를 살아남으면 전사로 인정받고, 한 달을 살아남으면 언제든 등을 맡길 전우로 대우받으며, 일 년을 살아남으면 위대한 투사로 추앙받는 곳이다.
이들은 일 년 내내 산을 타는 레인저(산악 경비대)가 아니라 앞서 말한 호칭과는 크게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말로는 병사지만 이들이 기사 역할을 하고, 실질적으로 병사 역할을 하는 건 형벌 부대의 노역병과 보조를 하는 예비 부대의 예비군들일 거다.
“크흠! 어쨌든! 손님들께서는 외부의 기사님들로, 일부러 이 시기에 단련을 위해 오신 분들이다.”
한스의 말에 병사들은 박수를 쳤다.
“바깥 양반들이 별일이군.”
“그러게, 대단하네.”
병사들의 시선에는 나약한 외부인을 깔보는 비웃음과 영지민도 피난을 가는 위험한 시기에 스스로 이곳에 온 용기에 대한 감탄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외지인은 약하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시선이었다.
마냥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저들 또한 수도로 가면 야만적인 촌뜨기 취급을 받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대개 연고가 없는 외지인을 배척하기 마련이었다.
“얼마나 머무실진 모르지만, 손님께서 같은 전장에 선다면 미리 서로의 실력을 알아두는 게 피차 좋지 않느냐고 하셔서 이곳으로 모셔왔다.”
한스의 말에 병사들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아하하하! 그거 좋지! 누가 나갈 거냐?”
“내가 나서지!”
병사들 중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우리가 영주성으로 왔을 때 성문을 지키던 병사 잭이었다.
과연, 한스의 직속 부하라 높은 사람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한스를 데려온 거였군.
“외지인에게 실력을 똑바로 보여주라고!”
“나는 잭이 이긴다에 30듀플!”
“나는 50듀플!”
병사들은 우리 중 누가 나오는지도 보지 않고 내기판을 벌였다.
프레시아는 병사들의 태도에 미간을 좁혔다.
“군기가 문란하군요.”
한스는 자신의 부하들이 부끄러운지 이마를 짚었다.
“하하,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많다 보니 풀어줄 때는 확실히 풀어주는 편입니다. 그래도 부끄럽군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병사들이 잘 싸우기만 하면 되죠.”
내 말에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극단적으로 잭에게 몰린 내기판 위에 은화 열 닢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왕 내기가 벌어진 거, 저는 저희가 이기는 쪽에 걸죠.”
갑자기 내기판에 은화가 올라오자 병사들은 깜짝 놀라 날 쳐다봤다. 그러고는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외지인분이 통이 큽니다!”
“이야! 이거 거하게 얻어먹겠습니다?”
병사들은 벌써부터 내 은화로 회식을 벌일 생각에 좋아했다.
“통 크신 분께서 제 상대로 나오시는 겁니까?”
잭의 물음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길버트.”
내 부름에 길버트는 앞으로 나오며 힘차게 응답했다.
“예! 하명하십시오!”
“이겨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내 명령에 길버트는 기세를 내뿜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길버트의 수련을 봐줬던 프레시아도 문제없다고 판단했는지 묵묵히 바라봤다.
“길버트 오빠! 힘내세요!”
실루아는 폴짝폴짝 뛰며 길버트를 응원했다.
길버트와 잭은 철심이 박혀 있는 훈련용 목검을 서로에게 겨누며 마주 섰다.
길버트를 얕잡아 보던 잭은 길버트의 기세에 긴장했다.
“양자, 어디까지나 대련임을 명심하고. 시작!”
한스의 외침에 두 사람은 검을 부딪쳤다.
딱-!
목검이라 둔탁한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대련이라 검에 마력을 실지 않았지만 담긴 힘은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잭은 호기롭게 길버트의 검을 쳐올리며 연달아 내리쳤다.
길버트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비스듬히 세워 검격을 흘렸다.
잭은 계속해서 몰아치듯 길버트를 공격했다.
“아하하하! 더 빠르게 공격해, 잭!”
“봐주지 말라고!”
병사들은 잭의 공격에 환호하며 그를 응원했다.
얼핏 보면 잭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지만 길버트의 표정은 안정적이었다.
오히려 공격을 하는 잭이 생각대로 안 되는 듯 인상을 썼다.
나는 그런 길버트를 보며 프레시아에게 물었다.
“어때?”
“안정적입니다. 방심하지 않고 차분히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군요. 도련님께서 시키신 훈련이 확실히 도움이 된 듯합니다.”
“나보다는 네 지도가 훌륭했던 거겠지.”
한 발도 움직이지 않던 길버트는 단숨에 기세를 내뿜으며 잭의 검을 뭉개듯 내리쳤다.
“으윽!”
순간적으로 예상을 넘은 힘을 담아 내리치니 검을 흘려내지 못하고 길버트의 검 끝이 잭의 이마에 닿았다.
“그만!”
한스가 손을 들며 말리자 두 사람은 대련을 멈추고 목검을 회수했다.
“잭, 네 패배다. 인정하나?”
“…예. 인정합니다.”
잭이 승복하자 병사들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벙 찐 얼굴로 잭을 바라봤다.
“기교보다는 힘인가?”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대가 힘을 흘리지 못할 부분을 정확히 내리쳤습니다. 실전 같은 다대일의 전투를 반복하다 보니 살기 위해서 판단 능력과 동체 시력, 그리고 과감함이 단련된 것 같습니다.”
“아니, 살기 위해서라니. 훈련이 그렇게 심했나?”
프레시아는 몰라서 묻느냐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확실히 지난 한 달 동안 매일같이 반쯤 죽은 상태로 인형에게 실려 오긴 했다.
아마 디벳의 약과 게오르의 회복 마법진이 아니었으면 죽어도 골백번은 죽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시선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내기판의 돈을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자자! 내기에서 이겼으니 이 돈은 가져가겠습니다. 덕분에 자~알 먹겠습니다!”
하나하나가 건 돈은 푼돈이었지만,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돈을 거니 꽤 돈이 모였다.
내 미소에 역배를 노린 이들을 제외한 병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 다시 합시다! 이대로는 못 끝냅니다!”
“이번엔 내가 나서겠습니다!”
“아니! 나야! 이대로는 옆 백인대 놈들이 비웃는다고!”
그들의 반응에 나는 길버트에게 물었다.
“그렇다는데?”
“저는 더 할 수 있습니다.”
길버트의 대답에 나는 다시 내기판 위에 은화를 얹으며 웃음을 흘렸다.
“쫄리면 빠지든가.”
내 노골적인 도발에 병사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기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쫄리기는! 우리는 블란츠바그의 전사다!”
“내 월봉을 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난 오늘 저 은화로 산 술을 마셔야겠어!”
단순한 놈들이구만.
이제는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럼 소원대로 이 녀석들의 월급을 다 털어먹기로 하자.
길버트가 검을 들자 병사들은 차례대로 길버트의 앞에 섰다.
두 번째 상대는 길버트와 검을 부딪치다 손목까지 전해지는 충격에 목검을 놓쳤다.
“다음.”
세 번째 상대는 길버트에게 배후를 잡혀 항복했다.
“다음.”
네 번째 상대는 장기전으로 끌고 가다가 체력이 부족해 패배했다.
“다음.”
차례대로 병사들을 상대했고, 차근차근 이겨갔다.
날 노리던 암살자에게 빌빌거리던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 성장했는지 모르겠다.
이 형은 감동이다.
길버트가 이길수록 내 주머니는 든든해졌다. 나중에 맛있는 거나 사줘야겠다.
“아하하! 난 부자다! 역배는 승리한다!”
나 말고도 역배를 노리던 병사 질은 배당금을 들고 환호했다.
“잘한다! 길버트! 저들의 월급을 파멸시켜!”
나와 병사 질은 어깨동무를 하며 길버트를 응원했다.
그렇게 길버트는 검귀의 요람에서 병사 36명을 쓰러트리고 전설이 되었다.
36명에서 멈춘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내기에 걸 돈이 없어져서였다.
쌈짓돈까지 다 털어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