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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53화 (53/214)

제53화. 검귀의 요람 (5)

내 물음에 데미웨이는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봤다.

마치 눈치 없이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는 멍청이를 보는 시선이었다.

“넌… 아니, 질리안을 소환한 건 자네가 아니지. 이 아이는 만병의 현자와 무슨 관계지?”

데미웨이가 실루아를 내려다보며 묻자 나는 실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딸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미간을 좁혔다.

“딸? 만병의 현자와 정제의 마도사의 딸은….”

“둘째 딸입니다. 이름은 실루아 필립.”

나는 데미웨이의 말을 자르며 웃어 보였고, 그는 내 미소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썼다.

“…게오르 아저씨의 딸이라면 은혜를 입에 담을 만하다. 네 말대로 숙식을 제공하지. 사람을 하나 붙여줄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해라.”

게오르는 이명인 ‘만병(萬兵)’에 걸맞게 온갖 전선을 돌아다니며 나라를 위해 싸웠다.

그 당시 이 나라에서 군적(軍籍)에 이름이 적힌 사람치고 게오르에게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말에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희도 염치가 있으니 필요한 걸 부탁하신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데미웨이는 마치 네까짓 놈에게 도움받을 일은 없다는 듯이 노려봤다.

“인형들의 수리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꽤 오랜 시간 정비를 받지 못했을 텐데요.”

데미웨이가 게오르에게 입은 은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는 게오르가 방위 전력으로 사용하라고 두고 간 전투 인형 병대도 있었다.

전투 인형 병대는 망가지기 전까지는 획기적으로 전선의 인명 피해를 줄여줬다.

내 물음에 그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건 부탁하지.”

데미웨이의 부탁에 나는 피식 웃었다.

후작이라는 높은 계급과 사령관이라는 존경받는 지위의 그라면 자존심에 거절하거나 강압적으로 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영민들을 위해서라면, 병사들을 위해서라면 한순간의 부끄러움이나 자존심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내였다.

그래도 태도를 바꾸는 건 부끄러운지 데미웨이는 내 웃음에 이를 악물었다.

“특무대장, 손님들을 귀빈실로 안내해라. 객들의 편의는… 한스, 그 녀석을 붙여.

“예,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데미웨이와의 만남이 일단락되자 실루아는 질리안 오리지널을 제외한 모든 인형들을 되돌려 보냈고, 검을 뽑을 준비를 하던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다시 긴장을 풀었다.

특무대장의 뒤를 따라 사령관실을 나가려는데 데미웨이가 날 불렀다.

“가기 전에 잠깐, 자네는… 만병의 현자와 무슨 관계지?”

나는 그의 물음에 잠시 멈췄다가 쓰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제자입니다. 단언컨대… ‘마지막’ 제자죠.”

* * *

데미웨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 약했던 젊은 시절에 마법 인형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일이나 20년 전 붉은 눈을 상대했을 적의 기억이 상념처럼 떠올랐다.

20년 전 게오르 필립은 붉은 눈 토벌전에 초청되어 참전했다.

게오르는 어린 딸을 잃고 병들어 은퇴를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직접 특무대와 함께 산맥을 뛰어다니며 붉은 눈의 뒤를 쫓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인형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게오르의 네임드 인형 ‘질리안’과 ‘보라매’, ‘조커’는 붉은 눈 토벌에 직접 투입되면서 전대 블란츠바그 후작이 붉은 눈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죽음을 각오한 동귀어진의 공격이 실패하고 붉은 눈의 반격에 전대 후작이 목숨이 아니라 한 팔을 잃는 것으로 끝난 것도 게오르의 인형 덕분이었다.

전대 후작을 살리기 위해 세 개체의 네임드 인형 중 조커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렸고, 보라매는 반토막이 나버렸다.

‘당장! 저 괴물을 쫓아!!’

‘안 됩니다! 아버지! 당장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네 이놈! 내가 너를 그렇게 나약하게 가르쳤더냐! 저 괴물을 지금 처죽이지 않으면 피를 보는 것은 병사들과 일반 영민들이다!’

아직도 아버지의 노성(怒聲)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세 인형 중 공중을 날 수 있는 보라매가 멀쩡했다면 추격이 가능했겠지만, 그 당시의 전력으로는 산맥을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 붉은 눈을 쫓을 방법이 없었다.

데미웨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했던 말을 되뇌었다.

“제가 반드시 놈을 죽이겠습니다, 아버지. 몇 년이, 몇십 년이 걸리더라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다.

지금의 그는 과거, 전성기 시절의 아버지를 뛰어넘어 천하십검의 검귀로 불릴 정도로 고강한 무인이 되었다.

이제는 그날의 맹세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저 멀리 익숙하면서도 낯선 산맥을 바라보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라.”

데미웨이의 허락에 특무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내는 잘했나?”

“예, 귀빈실까지 모셔드리고 명하신 대로 백인장 한스에게 안내하라 지시했습니다.”

“객들이 불편함을 호소한다면 한스 녀석을 멍석에 말아 두들겨 패라. 그 녀석은 맞아야 좀 정신을 차리겠지.”

“그리하겠습니다. 손님들이 작은 흠이라도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데미웨이와 특무대장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특무대는 계속해서 붉은 눈의 행적을 추적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창고에서 조의기(弔意旗)를 꺼내 와.”

그 말을 들은 특무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사령관님.”

“네가 생각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마라. 나는 안 죽는다. 그깟 놈에게 죽기에는 내가 너무 강해졌지 않느냐.”

“그럼 어째서…?”

특무대장의 의문에 데미웨이는 씁쓸한 얼굴로 창밖의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은인께서 돌아가셨으니 조의를 표해야지.”

그날 영주성의 깃대에는 검은색의 조의기가 계양되었다.

조의기를 본 이들은 무슨 변고가 있나 놀랐지만 그 깃발의 의미가 알려진 것은 수일이 지나 수도의 소식을 가져온 파발이 돌아올 무렵이 되어서였다.

* * *

귀빈실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풀어놓았다.

짐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내 식자재 창고나 실루아의 저택에 보관하고 있었기에 입고 있는 두터운 외투와 무기 정도밖에 없었다.

귀빈실은 사용인들이 머무는 것까지 고려하여 만들어졌는지 스위트룸처럼 거실과 세 개의 방, 욕실이 함께 있는 형태였다.

“아이고! 침대 좋다!”

내가 침대에 바로 눕자 실루아도 나를 따라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귀빈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침대도 푹신하고 좋았다.

“실루아, 침대에 오를 때 신발은 벗어야지.”

“앗! 네~!”

내 지적에 실루아는 침대 밖으로 발을 내밀고는 꼼지락거리며 발로 신발을 밀어 벗어던졌다.

질리안 오리지널은 바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실루아의 신발을 회수해 가지런히 놓았다.

일찍 철이 든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애 같다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프레시아를 바라봤다.

“무슨 할 말 있어?”

프레시아는 당장이라도 내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도련님, 어째서 사령관을 계속 도발하셨습니까? 검귀는 저희가 전부 덤벼도 이기지 못할 강자입니다.”

“아하하하, 괜찮아. 너랑 실루아의 합공이면 제 아무리 검귀라도 목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조금만 더 경험을 쌓는다면 프레시아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할 일이었다.

“도련님!”

프레시아는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화내는 기색을 보였다.

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고, 예쁜 얼굴을 찡그려 화난 척을 해봤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뿐, 무섭지는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렇게 화내지 마. 다 필요한 일이었어. 덕분에 이곳에 있는 동안 낡고 해진 숙소가 아니라 이런 좋은 숙소를 얻었잖아.”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숙소를 얻어서 다행이다.

길버트도 충분히 잘생겼지만 평소에 꾸미고 다니지 않아 버릇해서 그런지 눈이 확 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프레시아는 꾸미지 않아도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였다.

물론 아직 어려서 얼굴을 가리거나 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선명한 붉은 머리는 눈에 띄는 탓에 야드의 머리끈으로 색을 바꿨지만 말이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납득하지 못했는지 인상을 썼다.

“도련님이라면 그렇게 도발하지 않아도 귀빈실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뭐, 그렇긴 한데.”

이 귀빈실은 결국 실루아가 게오르의 딸이라 내어준 것이니 은혜니 뭐니 하지 않아도 실루아에 대해 말했으면 검귀는 알아서 귀빈실을 내어줬을 터였다.

그도 아니면 내 신분을 밝혔어도 데미웨이는 왕실을 생각해서 내어줬을 수도 있다.

물론 나는 내 행적을 숨겨야 하는 처지이니 어떤 경우에서도 밝히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우리 일행의 움직임을 정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 정도는 알려야 괜히 너희들에게 따로 접근하지 않을 것 아니야.”

데미웨이의 눈이라면 프레시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접근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일부러 내 일행들은 날 위해서라면 그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내 대답에 프레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따로 접근한다 하더라도 저희가 단호히 거절하면 될 일입니다. 저희를 따로 떼어놓고 도련님께서 원치 않는 행동을 강제하려 한다면 그때 가서 베어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진짜로 베어 버릴까 봐 미리 경고한 거라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곤란해진다.

데미웨이와 척을 지는 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경고를 알게 하는 것과 상황이 닥쳤을 때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건 조금 다르거든.”

“그래도 도련님이라면 그런 상황이 벌어져도 충분히 언변으로 넘어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그저 도련님께서 사령관을 도발한 걸 가지고 뭐라 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다.

프레시아는 내 안전을 위해 잔소리를 하는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귀에게 뻔뻔하게 도발하는 내 모습이 그녀에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쉽게 예상이 가능했다.

마치 거대한 호랑이의 주둥이에 머리를 집어넣으며 장난치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겠지.

그 관대한 호랑이가 장난을 쳐도 날 물어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저는 도련님께서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협력을 받아낼 능력이 있으면서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신 것에 뭐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었다.

혓바닥으로 사람 하나 구슬리는 거야 사람에 따라 쉽고 어렵고의 차이가 있을 뿐 불가능하진 않았으니까.

“그야….”

“예, 위험을 무릅쓰는 게 시간이 적게 들겠죠. 백 마디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훨씬 빠르니까요.”

프레시아는 내가 할 말을 가로채가며 잔소리를 했다.

“어쩌면 제가 위험하다 판단하는 게 도련님께선 제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위험하지 않다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 저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프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사람에게 자질구레한 말을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자중하마.”

무엇보다 그녀의 말이 다 맞았다.

내 성격이 꼬여서 블란츠바그 사령관같이 성실한 사람을 보면 속을 긁고 싶어져서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것도 있으니까.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백인장 한스입니다! 사령관님의 명으로 귀빈들의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벗었던 외투를 다시 걸쳤다.

“안내역이 온 것 같네. 쉬고 싶은 사람은 편히 쉬어.”

쉬라는 말에도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다시 허리에 검을 매었다.

실루아도 침대에서 내려와 꼼지락거리며 신발을 다시 신었다.

“다들 성실하기는.”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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