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검귀의 요람 (4)
백인장 한스는 사령관실 앞에 서서 노크를 하고 우렁차게 외쳤다.
“한스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그 외침에 사령관실 안에서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문을 살짝 열고 말했다.
“지금 작전 회의 중이다. 급한 볼일이 아니면 나중에 찾아오도록.”
무미건조한 대답을 한 사내가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한스가 문틈 사이로 발을 집어넣어 문이 닫히는 걸 막았다.
“특무대장님, 왕실 기사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벌써?”
특무대장이라 불린 그는 한스 뒤에 서 있는 나와 일행들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사령관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문이 닫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활짝 열리며 험악한 인상의 거한들이 우르르 나왔다.
아마 부대장들로 보이는데 하나같이 우리를 관찰하듯 흘겨보고는 인사말 하나 없이 떠났다.
이곳 전사들은 중앙 기사들을 샌님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령관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한스, 자네는 볼일 보게."
특무대장의 말에 한스는 경례를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들어오시죠.”
특무대장이 몸을 비켜주자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실 안에는 날을 벼린 듯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사령관실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다는 건 저 사내가 바로 천하십검 중 한 사람인 검귀 데미웨이라는 의미였다.
“생각보다 많이 일찍 왔군. 내 예상으로는 이제야 수도에 파발이 도착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호레이즌 디 그레인 경은 어디 있지?”
데미웨이의 물음에 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블란츠바그 사령관님. 그런데 물음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뭐지?”
“호레이즌 경은 왜 찾으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데미웨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정 설명은 파발을 통해 모두 전했다만.”
데미웨이는 심기가 불편한 듯 날 노려봤다.
“아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사령관님의 파발을 받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서 말이죠.”
내 말에 특무대장은 놀라서 날 바라봤다.
“파발을 받고 온 기사가 아니라 했습니까?”
특무대장의 물음에 나는 왕실 기사 신분패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예, 그냥 왕실 기사라고 소개했을 뿐인데 바로 이곳으로 안내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데미웨이라면 한눈에 이 신분패가 진짜임을 알아볼 터였다.
내 대답을 들은 특무대장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스 녀석, 내 그렇게 속단하는 버릇을 고치라고 했는데.”
“그렇군. 어쩐지 벌써 왔다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이제 파발이 수도에 도착할 무렵일 텐데.”
특무대장은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한 한스를 반쯤 죽여 놓겠노라 이를 악물었다.
나야 데미웨이를 만나기까지 며칠 걸릴 거라 각오했는데 덕분에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니 시간 낭비하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한스라는 청년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데미웨이는 맥이 빠졌는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파발을 받고 온 게 아니라면 왕실 기사가 이런 벽촌에는 무슨 일이지?”
검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바스타유 산맥에 온 건 민생 안정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기사 수행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최우선 목적은 사령관님께 이곳에서의 활동을 허락받는 게 되겠죠.”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데미웨이는 흥미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아마 내가 말한 ‘여러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는 우선 표면적인 이유인 기사 수행에 흥미를 보였다.
“기사 수행이라, 그런 이유에서라면 활동을 허락하지 못할 것도 없지.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서는 말이야.”
그렇게 말한 그는 내 몸을 한 번 훑어보고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날 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자네는 그런 몸으로 어떻게 기사가 된 거지? 검을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지쳐 나자빠질 것 같은데. 그리고 수행을 한다면서 어린 아이까지 데려오다니.”
“아, 수련을 할 기사는 이 둘뿐입니다. 저와 이 아이는 아니죠.”
내가 프레시아와 길버트를 가리키자 데미웨이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자네는 보급행정관인가 보군.”
데미웨이는 내 몸 상태를 보고도 기사 신분패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당연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전쟁 병기로서 무력이 중요했지만 군사 집단인 이상 행정적, 금전적 관리를 할 인원이 필요했다.
영주 휘하의 기사단이라면 굳이 기사로 서임하지 않아도 행정관이 겸임하여 관리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국가 군사 기밀과도 접촉하는 왕실 기사는 그럴 수 없었다.
물론 기사인 이상 기본적인 체력이 필요했으나, 어디에나 자격 미달인 낙하산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 날 그런 낙하산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눈치챈 프레시아가 발끈하며 뭐라 하려는 걸 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
“뭐, 비슷합니다.”
사실 일행의 돈 관리는 내가 다 하고 있어서 보급행정관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사령관님께선 호레이즌 경의 파견을 바라시는 것 같은데, 혹시 ‘붉은 눈’이 활동을 재개한 겁니까?”
설마 벌써부터 설원의 대마수가 활동하기 시작한 건가?
소설에서는 언제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활동 중이었을 줄이야.
설원의 대마수 ‘붉은 눈’은 바스타유 산맥에 군림하는 다섯 대마수 중 하나로 소설 <겨울나무의 현자>를 시작하는 에피소드의 보스로 나온다.
왕자 유안을 지키지 못한 죄로 노역병으로서 블란츠바그령으로 좌천된 여주인공 프레시아는 3년간의 전공을 인정받아 후작이 이끄는 특무대로 소속이 이전된다.
특무대의 임무는 붉은 눈의 위치를 파악하고 토벌하는 것.
그렇게 특무대로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동료의 실수로 특무대의 절반이 전사하고, 프레시아도 부상을 입은 채로 동료를 구하러 홀로 몬스터 대군을 상대하다 산맥을 헤매게 된다.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할 무렵, 주인공 제이드에게 목숨이 구해진 프레시아는 제이드와 함께 붉은 눈을 토벌하는 데 성공한다.
이게 소설 1권의 주요 내용이었다.
내 물음에 데미웨이는 흥미롭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파발을 받고 온 게 아니라면서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아직 공표가 되지 않은 군사 기밀인데.”
그가 묻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천하십검으로 이름 높은 검귀가 중앙에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호레이즌 경을 요청할 만한 이유는 바스타유를 지배하고 있는 전설의 대마수 ‘붉은 눈’뿐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내가 붉은 눈에 겁을 먹고 호레이즌을 부른다는 건가?”
데미웨이는 분노한 듯 투기를 흘리며 물었지만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냉철했다.
날 시험해 보고 싶은 건가?
아니, 날 꼬집어 시험하는 게 아니라 우리 전체를 시험하려는 거군.
검귀의 투기에 길버트는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긴장했고, 실루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날 지키듯 앞에 섰으며, 프레시아는 차가운 눈으로 검에 손을 가져갈 준비를 했다.
간단히 기세를 내보임으로써 일행의 행동 방식과 실력을 파악하는 동시에 일행의 중심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다웠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저 후작님께서 붉은 눈을 상대하려면 방어선에서 빠지셔야 할 텐데… 요새 전력의 반 이상인 후작님께서 빠지면 피해가 클 테니 후작님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신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호레이즌이 내 대신이 될 수 있다? 그가 이 요새의 사령관을 대신할 수 있다 말하는 건가?”
그의 기세가 높아지며 날 압박해 왔다.
얼핏 듣기에는 데미웨이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공포에 덜덜 떨며 실언을 했다며 사과했겠지만 난 아니다.
“일신의 무력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겠죠. 물론 상징적인 의미로는 부족하겠지만, 이 요새는 후작님이 없다고 굴러가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싱긋 웃어 보이자 데미웨이는 재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부정한다면 나는 무능한 사령관이 되고, 요새와 가문의 원수가 무서워 대신 사냥해 줄 이를 부른 겁쟁이가 되는군.”
나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혀가 명검처럼 날카롭군. 난 자네같이 말만 앞서는 자를 혐오한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요.”
“뭐가 말이지?”
“저는 행동 또한 함께하는 사람이니 사령관님께서 절 혐오할 일은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내 말에 데미웨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날 흘겨봤다.
“자네는 행동을 하는 자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력도 부족한 제가 굳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데미웨이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래 봤자 안전한 후방에서 서류나 만지는 일을 하겠지.”
“뭐, 그럴 수도 있죠.”
내 긍정에 데미웨이는 거 보라는 듯이 내게서 흥미를 잃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닐 수도 있고요.”
내 덧붙인 말에 데미웨이는 건방지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찾아뵙고서는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유안이라고 합니다.”
데미웨이는 내 이름을 듣고도 바로 1왕자임을 알지 못했다.
그저 관심이 없는 건가? 아니면 실종된 왕자가 이곳에 오리라고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알고도 내색하지 않는 것 일 수도 있었다.
싸울 때는 귀신같았지만 그 속내는 알기 쉽지 않은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했다.
실루아는 데미웨이가 내게 투기를 내뿜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데미웨이는 실루아가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활동 허가를 바란다면 관련 협조 요청서를 가지고 왔겠지?”
그의 물음에 나는 미리 작성해 둔 요청서를 건넸다.
“음, 왕자의 직인이라.”
요청서에는 내 직인이 찍혀 있었다.
아무리 내가 권력이 없다고 해도 신분제 사회에서 혈통은 그 자체로 권위를 갖는다.
왕의 직인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다른 기사단장의 직인보다는 무시하기 힘들 터였다.
“좋다, 활동을 허락하지. 대신 문제를 일으킬 경우 허가가 취소될 수 있고, 비상시에는 경들을 징집할 수 있다. 이에 동의하나?”
“예. 동의합니다.”
데미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동 허가증에 자신의 직인을 찍었다.
특무대장이 내게 활동 허가서를 전달했고 나는 바로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가봐라.”
그는 우리에게 관심을 끊으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집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아, 혹시 숙식 제공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특무대장은 놀라서 날 바라봤고, 데미웨이는 건방지다는 듯이 날 노려봤다.
“자네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의무는 없다.”
“의무는 없지만 선의는 베풀 수 있지 않습니까.”
“건방진 놈이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데미웨이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뭐, 선의를 베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사령관님께선 은혜를 잊는 분이라는 생각에 혼자 속으로 실망할 뿐입니다.”
“은혜? 너희가 내게 뭘 해줬다고 은혜를 입에 담는 거냐.”
데미웨이가 분노한 듯 투기를 내뿜자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검을 뽑을 준비를 했고, 실루아는 바로 네임드 인형들을 소환했다.
데미웨이는 실루아가 소환한 인형 중 하나를 보며 놀랐다.
“질리안?”
질리안 오리지널이 데미웨이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위협적 마력파 감지, 마력파 기록 ‘등록명:건방진 애송이’를 확인. 경고, 당장 위협적 마력파를 거두십시오. 거두지 않는다면 ‘등록명:건방진 애송이’와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수정하겠습니다.”
질리안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데미웨이는 곧바로 투기를 거둬들였다.
“오랜만이군, 질리안.”
“그렇습니다, 데미웨이 님. 19년 10개월 3일 21시간 25분 44초 만입니다.”
나는 오랜만에 해후하는 검귀와 질리안 오리지널 사이에서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숙식을 제공할 용의는 생기셨는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