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51화 (51/214)

제51화. 검귀의 요람 (3)

“후우~! 춥다.”

나는 새하얀 입김을 뱉으며 두꺼운 외투를 껴입었다.

바스타유 산맥에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길버트 역시 두꺼운 털옷을 껴입었음에도 덜덜 떨었다.

“지금은 4월인데 여긴 왜 이렇게 추운 거죠?”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성체를 보며 대답했다.

“그건 바스타유 산맥 전역에 걸친 마법적 현상 때문이라고 하더군. 산맥과 떨어진 지역은 북쪽으로 더 올라가도 여기보다 따뜻하다고 하니 말 다 했지.”

그래도 지금 날씨는 바스타유에선 봄 날씨였다.

바스타유의 겨울은 11월부터 3월까지 총 5개월에 달한다.

1년 중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 겨울이었지만 바스타유와 밀접한 위치의 블란츠바그의 영민들은 겨울이 길다 한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겨울은 몬스터가 쳐들어오지 않는 안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추위는 먼 옛날, 당시의 겨울나무의 현자가 몬스터의 움직임을 봉인하기 위해 산맥 전역에 펼친 봉인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안식이란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농사를 짓기 힘들 텐데 여기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길버트는 사람들을 구하는 기사가 꿈인 것답게 일반 영민들을 걱정했다.

“모든 식량은 중앙으로부터 지원받으니 괜찮아. 물론 몬스터와 싸우는 전사들을 우선으로 배급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한 비축분을 제외하고도 영민들이 먹고살기 충분할 정도로 많이 지원받지.”

바스타유 산맥으로부터 국경을 수호하는 대가로 지원을 받는 거다.

다르게 말하자면 전사들의 목숨 값으로 식량을 받는 셈이었다.

“아니, 지금 이 시기는 아무래도 춘궁기(春窮期)라 지원이 줄어들 쯤인가? 작년에는 풍작이었나?”

내 물음에 길버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아니요, 작년에는 심하지는 않지만 가뭄이 들었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올해 보급은 줄어들어서 식량을 아끼는 중이겠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블란츠바그에 지원이 끊기지는 않는다.

블란츠바그가 뚫리면 어떤 피해를 입는지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약 60년 전, 아니 지금 기준으로는 57년 전이겠구나.

57년 전, 3대 전 블란츠바그 사령관이 전사하며 요새가 뚫린 적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3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이 되어 산맥의 모든 몬스터들이 동면에 든 덕분에 요새는 쉽게 복구하긴 했지만, 이미 그 일대에 자리 잡은 몬스터들을 토벌하느라 많은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그럼 당시 블란츠바그 후작은 곤란했겠네요?”

실루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초에 요새가 뚫린 이유가 중앙에서 보급을 거의 안 해줘서라서 말이야. 담당 보급관과 관련 귀족들 몇이 참수되는 걸로 끝났어. 당시 블란츠바그 후작에게는 큰 질책은 없었다고 해.”

물론 당시 사령관이 전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었다.

바스타유 산맥 인근 영지에서 ‘블란츠바그’란 단순히 대대로 사령관을 역임한 가문 수준이 아니라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아하~! 그렇구나!”

나와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성체 쪽을 정찰하던 프레시아가 돌아왔다.

“성체 상황은 어때 보여?”

“도련님의 말씀대로 슬슬 몬스터들이 동면을 깨고 먹이를 찾아 산맥 아래로 내려오는 모양입니다.”

프레시아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아직 본격적인 몬스터 범람은 없는 것 같으니 검귀를 만날 수 있겠네.”

한창 바쁠 때면 요새 사령관 데미웨이는 기사들을 데리고 산맥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토벌하느라 만날 수 없다.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 산맥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려면 데미웨이의 허락이 필요했다.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탐험가 무리가 허락도 안 받고 몬스터 소굴을 들쑤시면 민가에까지 피해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몰래 움직여도 괜찮겠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검귀와 사이가 틀어질 일은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성체, ‘검귀의 요람’으로 향했다.

* * *

데미웨이는 사령관실 벽면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눈으로 훑었다.

“북동쪽, 조개 바위로부터 북서향 700미터. 거기서 남향으로 1300미터. 다시 서향으로 1800미터. 그리고 북서쪽, 십자 바위로부터 남동향 300미터, 여기서 서향으로 2100미터.”

데미웨이의 눈이 훑고 지나가는 곳은 모두 지난 겨울 동안 새롭게 몬스터 군락이 생겨난 지점이었다.

산맥 안에 워낙 몬스터들이 많아 아무리 토벌을 해도 며칠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군락이 생겼다.

“괴멸이 확인된 군락은 이곳이 전부인가?”

그의 물음에 특무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발견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통상 수색 범위 외의 영역은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특무대장의 보고에 데미웨이는 심각해졌다.

몬스터 군락이 괴멸했는데도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몬스터를 토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역 싸움일 가능성은?”

데미웨이의 물음에 특무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보고서에 적혀 있듯이 영역 싸움의 경우 집단전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발견한 것은… 피가 묻은 뼈 무더기와 거구가 움직인 듯한 흔적뿐입니다.”

바스타유 산맥의 몬스터는 다른 지역의 몬스터보다 흉포하고 숫자도 많다.

그런 몬스터 군락이 며칠 사이 연달아 괴멸했다는 것은 그 많은 몬스터들을 괴멸시킬 정도로 강한 괴물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역시 그놈이 2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것인가.”

데미웨이의 말에 사령관실에 모인 각 부대의 대장들은 표정이 굳었다.

“그놈이라면 선대의 검에 부상을 입고 잠적한 그 괴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설표 문장이 새겨진 기사단 제복을 입은 사내의 물음에 데미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지의 팔을 집어삼키고, 57년 전 내 증조부를 죽인 그 놈이 다시 설치기 시작했다.”

데미웨이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사령실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설원의 대마수 ‘붉은 눈’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니…!”

“그럴 수가. 그 괴물이…!”

설원의 대마수 ‘붉은 눈’은 인근 영지에 뿌리 깊게 박힌 공포의 상징이었다.

어른들이 떼를 쓰는 아이에게 겁을 줄 때 흔히 입에 오르내리는 괴물이기도 했다.

“이참에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며칠 전에 중앙에 호레이즌, 그 망나니 녀석을 보내달라 요청했다.”

데미웨이의 말에 부대장들은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사령관님! 저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맞습니다! 중앙 놈들이 저희를 겁쟁이라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성토에 데미웨이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닥쳐라! 네놈들의 헛된 명성과 자존심을 위해 죽어나가는 것은 병사들이다! 피눈물 흘리는 것은 병사들의 어미일 테고!”

그의 호통에 부대장들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놈을 해치우는 건 나다. 망나니 녀석에게는 주변 정리를 맡길 거다. 그 녀석이라면 내 공백을 충분히 채워주겠지.”

데미웨이의 말에 부대장들은 안도하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아쉬운 소리쯤이야 몇 번이고 해줄 수 있었다.

검귀의 안광이 투기와 살기로 빛났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놈의 전설을 끝낸다.”

* * *

거대한 요새이자 도시인 이곳은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특별한 검문은 없었다.

“요새인데도 검문이 없네요. 다른 마을이나 도시면 몰라도 보통 영주가 거하는 도시는 간단하게나마 검문을 하지 않나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여기는 바스타유니까. 범죄자가 기어들어와 봤자 여기서 설칠 수 없을 테니 굳이 검문을 안 하는 걸 거야.”

내 대답에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금세 납득했다.

주변에 걸어 다니는 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근육질이었다.

이곳은 척박한 혹한의 땅이다.

아무리 중앙에서 보급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냥이 필수다.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이곳에서 나무꾼이라도 되려면 혼자 오크 한 무리는 처리할 수 있어야 했다.

“바스타유의 다른 이명은 ‘투사들의 고향’ 이거든.”

바스타유의 특산물은 몬스터 부산물과 산맥에서 자라는 희귀한 마법 재료들이었다.

둘 다 산맥 안으로 들어가야 얻을 수 있는 것들 이었으니 목숨을 걸어야 했다.

나는 도시를 가로질러 요새 중앙의 영주성으로 향했다.

영주성의 크기는 그렇게 커 보이진 않았는데, 영주성이라기보다는 높은 첨탑이 많아 전 방위를 감시할 수 있는 군사 시설로 보였다.

성문 앞에 도달하자 병사가 앞을 막아섰다.

“영주성에는 무슨 일이냐?”

병사의 물음에 나는 바로 왕실 기사 신분패를 꺼내 보여줬다.

“저희는 이런 사람입니다.”

신분패를 멀뚱히 본 병사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게 뭔데?”

신분패를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건 또 신선한 반응이었다.

“혹시 글자를 모르십니까?”

왕실 문장은 모른다고 쳐도 대놓고 ‘왕실 기사’라고 적혀 있는데 이게 뭐냐고 물을 줄이야.

내 물음에 병사는 멋쩍은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하하하, 병사가 몬스터나 잘 때려잡으면 되지 글자까지 알아야 하나?”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땅은 생존이 우선되는 곳이지, 학문을 우선하는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문맹률이 높은 세계인 것을 생각하면 말단 병사가 글자를 아는 게 이상했다.

“야, 잭! 너 글자 읽을 줄 아냐?”

병사의 물음에 전우조로 보이는 병사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질, 내가 글자를 알면 저 안에서 서류나 보고 있지, 추운데 여기서 서 있겠냐?”

“아하하하! 그건 그렇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질이라는 병사가 다시 날 바라봤다.

“그럼 글자를 읽을 수 있을 만한… 아니, 그냥 당신이 부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사람을 불러주십쇼. 어차피 높은 사람을 보러 온 거니 말입니다.”

내 부탁에 병사는 잠시 고민했다.

“어… 뭐라고 하면서 부르면 되지?”

“그냥 웬 삐까번쩍하고 비싸 보이는 신분패를 가진 사람이 찾아왔다고 하십쇼.”

“아하! 간단하네! 맨날 몬스터가 쳐들어왔다고 소리 지를 줄만 알았지, 손님이 찾아오는 건 처음이라서 말이야.”

혼자 낄낄거리며 웃던 병사는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이봐, 잭. 나 좀 다녀올 테니 잘 지키고 있어.”

잭이라 불린 병사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고 병사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휘장을 한 기사 하나가 앞장서서 나왔다.

“백인장(百人將) 한스요. 댁들이 그 삐까번쩍하고 비싸 보이는 신분패를 가진 사람이요?”

그의 물음에 나는 왕실 기사 신분패를 보여줬다.

“예, 안으로 들어….”

“아! 왕실 기사!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미처 병사들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거 실례가 많았군요!”

백인장 한스는 내 손을 잡고 악수하듯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일찍 왔다고? 무슨 말이지?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그는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호레이즌 경은 어디 계십니까? 아! 여러분은 선발대이신 거군요! 어쩐지 너무 일찍 오셨다 했습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그는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들어오시죠. 사령관님께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우리는 검귀 데미웨이가 있는 사령관실로 등 떠밀리듯 안내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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