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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50화 (50/214)

제50화. 검귀의 요람 (2)

인형의 숲이었던 넓은 공터를 벗어난 우리는 인근 도시에 들러 말을 처분하고 그 돈으로 식재료를 샀다.

내 ‘식자재 창고’나 실비아의 ‘저택’에는 식량이 꽤 여유롭게 있었지만, 바스타유 산맥에서 며칠을 돌아다닐지 모르니 생존 용품과 식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바스타유 산맥으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블란츠바그 영지는 왕국의 지원을 받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몬스터와 싸우기 위한 물자다.

특히 지금 시기는 블란츠바그령에도 식량이 부족할 시기라 내가 필요하다고 쉽사리 내어줄 리 없으니 미리 챙겨둬야 했다.

도시를 벗어나자 나는 창고에서 부티크에서 물건을 싣는 용으로 준 마차를 꺼냈다.

“이거면 넷은 충분히 탈 수 있겠지.”

마차는 2인용이라기에는 크고, 4인용이라기에는 조금 작았지만 길버트가 마부석에 앉으면 널널하게 탈 수 있었다.

“제가 운전하는 겁니까?”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운전할까?”

내 농담에 길버트는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와, 크흠! 도련님께 굳은 일을 떠넘기겠습니까! …그저 제가 마차를 몰아본 적이 없어서요.”

길버트의 고민에 실루아는 손을 들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운전은 망아지 3호랑 4호가 알아서 할 거예요! 길버트 오빠는 시늉만 하시면 돼요!”

실루아의 말에 나는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다고 하네. 프레시아랑 실루아는 마부석에 앉기엔 눈에 너무 띄니까 고생 좀 해줘.”

“아닙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인데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나비야, 길버트에게 오는 바람을 막아줘.”

완연한 봄이지만 아직 날이 쌀쌀하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다시 겨울과 같은 날씨가 될 테니 당연한 조치였다.

망아지 시리즈가 끄는 마차는 혹한의 땅, 현세의 지옥,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바스타유 산맥으로 출발했다.

* * *

왕은 왕좌에 앉아 잠시 멍하니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짙게 구름이 깔린 하늘은 언제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우중충해 보였다.

“개판이군.”

왕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왕의 말이었건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그레인 백작!”

“그럼 내가 없는 말이라도 했다는 것이오! 잠발 백작!”

평소 왕과 대소신료들이 정사를 돌보는 국정회의실이 고위 귀족들의 고성으로 가득 들어찼다.

친 왕실파의 그레인 백작과 친 귀족파의 잠발 백작은 서로 날카롭게 노려보며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처럼 대립각을 세웠다.

“유안 왕자의 몸에 난 멍 자국을 공들도 보지 않았소! 그런 확실한 증거를 두고도 어찌 왕후를 두둔한다는 말이오!”

“그저 멍이지 않습니까! 제 혼자 뛰어놀다 생긴 멍일 줄 어찌 아오리까!”

“어떻게 뛰어놀아야 그런 멍이 생긴단 말이오!”

왕국의 중앙 정계는 1왕자 학대 사건으로 인한 왕후의 실각을 두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정작 왕실파의 주인인 왕과 귀족파의 수장이자 왕후의 오라비인 후작은 가만히 있는데도 말이다.

“전하께서 왕후궁에서 왕후가 유안 왕자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하시지 않았소이까! 실제 관련 증언도 쏟아지고 있는 상황 아니오!”

“그, 그건 어디까지나 정황 증거에 불과하오! 실제로 폭행하는 모습을 목격하신 것이 아니라 그래 보이는 장면을 목격하신 것뿐이지 않소!”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게다가 학대를 당했다면 유안 왕자가 순순히 제 발로 왕후마마의 부름에 응하였겠소? 학대를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가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오!”

잠발 백작은 뻔한 말로 사건을 유야무야 넘기려 했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성인이 된 유안이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학대를 당하러 간다는 건 충분히 왕후가 학대를 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누구도 장기간 강압적인 학대로 정신적인 구속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왕후를 공격하는 그레인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 지금 실종 중인 유안 왕자는 어떻게 생각하오? 그것도 왕후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들고 있던 암살자들의 기습을 받고 말이오!”

유안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왕후 실각의 쐐기를 박고자 사건 장소를 조작하고 일부러 실종된 것이다.

그레인 백작의 외침에 잠발 백작의 기세가 꺾여나갔다.

“그, 그것은! 조작! 조작된 것이오!”

잠발 백작도 왕후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까지는 뭐라 반박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조작이라면 증거가 있소? 있다면 당장 내보이란 말이오!”

조작된 게 사실이긴 했지만 거기에 찍힌 인장은 위조된 것이 아닌 정말 왕후의 것이었다.

아무리 마법으로 검증해 봐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친 귀족파의 파벌이 왕실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하다고 하지만 이번 사건은 명분에서도, 증거에서도 크게 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눈을 뜨고 코를 베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왕은 그 광경을 보며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벌써 이런 소모적이고 반복적인 논쟁도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정쟁이 길어진 이유는 왕후라는 직위가 그만큼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왕후의 폐서인은 단순히 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왕국의 대다수의 고위 귀족이 모여 폐서인을 시켜도 옳은지, 그른지를 정해야 할 만큼 정치적으로 중요한 안건이었다.

그렇기에 수도와 거리가 먼 영지의 고위 귀족들도 모이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건 이겼군요.

왕의 옆을 지키는 호레이즌이 살짝 미소 지으며 왕에게만 들리도록 마력을 사용하여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왕도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질 끄는 시간은 지루했으나 그 시간들은 왕실파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명분과 증거가 확실한 이상 왕실파와 귀족파에 속하지 않은 중립파의 귀족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중립파의 귀족들은 왕권이 강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왕 말고 상전 노릇 하려는 파벌이 강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정쟁은 왕의 승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방금까지는.

“저, 전하!”

왕의 왼팔인 상선이 급하게 국정회의실로 들어와 왕의 곁으로 달려갔다.

왕실 예절을 중요시하던 상선이 경박하게 달려가는 모습에 많은 귀족들의 눈이 왕과 상선에게 쏠렸다.

“무슨 일인가?”

왕의 물음에 상선은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그것이… 제국에서 사절을 보내왔사온데, 제국의 사절단장이 이곳으로 오기를 바란다 하옵나이다.”

“제국이?”

제국이란 말에 왕의 정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순간적으로 왕후의 오라비인 후작을 바라보자 후작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왕은 귀족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왕좌에서 일어났다.

“오늘 논의는 이쯤 하고 공들은 물러가 쉬도록 하시오.”

왕의 폐정(閉廷) 선언에 잠발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반발했다.

“전하, 하오나 제국의 사절단이 이곳에 오고 싶다 하였사온데 지금 저희가 모두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온지….”

“잠발 백작. 공은 이 자리가 어떤 지리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이 자리는 국정을 논하는 자리요! 어찌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외국의 객을 들인단 말이오! 그 의도가 뭐요?”

왕의 말대로 중대사를 논하는 중 국정 회의실에 제국의 사절단을 들일 것을 청하는 건 얼핏 내정간섭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다.

“아, 아니옵니다! 전하! 의도라니요, 제가 무슨 의도가 있겠습니까. 그저 외교를 생각하여 성급히 말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잠발 백작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고 왕의 노호성에 귀족들은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귀족파가 왕권을 위협한다고는 하지만 그 권위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왕권을 넘어설 정도였으면 왕후가 1왕자를 학대하든, 살해하든 왕후를 폐서인 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벌어질 리가 없었다.

“아니면 당장 이번 일의 결론을 내립시다! 잠발 백작이 이런 지지부진한 일로 외교 사절단을 만나는 것을 미뤄둘 수 없다고 하니 지금 표결에 붙이면 될 것이오. 하기야, 오래도 끈 일 아니오! 이제 불만이 없소, 백작?”

왕의 물음에 잠발 백작은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옵니다! 소신의 말은 그것이 아니옵고….”

이대로 표결에 붙이면 왕후는 폐서인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입방정을 떤 잠발 백작은 등 뒤의 후작에게 죽은 목숨이었다.

그때 침묵을 고수하던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아국(我國)이 제국에게 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릴 정도로 힘이 없진 아니하오나, 비정한 범 같은 제국의 심기를 거슬러 외교를 어렵게 만들 것은 없다 사료되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이만 폐정하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후작의 말에 왕은 확신했다.

지금 도착한 제국의 사절은 후작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왔다.

후작이 벌인 일인가, 아니면 왕후와 손을 잡은 암중세력이 벌인 일인가?

전자라면 차라리 후작이 제 것을 제국에 내어주고 불러들인 것이니 후작 또한 손해를 입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또한 아무리 후작의 사유 재산이라도 결국 왕국의 재산이었다. 그것을 제국에게 넘겼으면 후작을 공격할 명분이 되니 좋다.

하지만 후자라면 좋지 않다. 아니, 최악이다.

그 말은 정체도 모를 세력이 제국의 정계에도 침투해 있다는 의미였으니 내환뿐만 아니라 외환까지 걱정해야 할 테니 말이다.

후작이 나서서 말하자 귀족파의 귀족들도 일제히 자리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뜻에 따라 폐정하시옵소서!”

“전하의 뜻에 따라 폐정하시옵소서!”

왕은 저들의 반응에 당장이라도 표결에 붙여야 함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대로 표결을 강행해 봤자 후작을 위시한 귀족들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고 들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제국의 사절단을 오래 방치해 둘 수도 없었다.

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발 백작은 중대한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타국을 끌어들이려는 경거망동을 했으니 과인이 윤허할 때까지 과인이 정한 거처에서 근신토록 하시오.”

왕의 명령에 백작이 아닌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관대한 판결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근신 처분을 받은 잠발 백작은 놀라서 두리번거렸으나 후작이 나서자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숙이며 처결을 받아들였다.

왕과 후작은 서로 날카로운 시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속내를 가늠했다.

“이상으로 오늘 회의는 마치지. 공들은 물러나 편히 쉬게, 과인은 제국의 사절을 만나야 하니.”

왕이 상선과 호레이즌을 데리고 국정 회의실을 나서니 회의실 앞에 제국의 사절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 아고슬라브 제국 사절단장 메릴 드 몽니발 아사자하드 후작이 듀플리온 왕국의 영민하신 왕을 배알하나이다. 그간 기체 강녕하셨는지요? 전하.”

사절단장 아사자하드 후작은 비록 천하십검에는 들지 못했지만 제국에서 무예(武藝)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걸(女傑)이자, 제국의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권신(權臣)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의 최측근인 그녀가 직접 왔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 이번 일을 제국이 크게 주시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왕은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으며 미소 지어 보였다.

“방문한 것을 환영하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미처 환대를 할 준비를 하지 못한 것에 양해 부탁드리오.”

“아닙니다. 저희가 그만 방문을 알리는 파발보다 일찍 도착한 듯합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무례를 저지른 것에 사과를 드립니다.”

명백히 의도한 바였다. 그걸 모를 정도로 왕은 무능하지 않았다.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요. 먼 길을 오느라 지쳤을 텐데 사절단 숙소에 짐을 풀고 봅시다.”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제국의 아사자하드 후작은 왕의 뒤로 보이는 귀족들을 보며 자신이 할 일은 끝마쳤다는 듯이 예의를 갖춰 사절단을 이끌고 외궁(外宮)에 마련된 거처로 향했다.

그녀의 등장으로 중앙 정계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정쟁(政爭)의 폭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정쟁 외의 어떠한 일에도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폭풍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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