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검귀의 요람 (1)
수도에 위치한 위즐 백작가의 저택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날아든 게 뭐가 신기한 일이겠느냐 싶겠지만 마법사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마도팔현(魔道八賢) 중 한 명인 위즐 백작의 저택에는 온갖 방위와 보안을 위한 마법으로 가득했으니 정문을 제외한 곳으로는 작은 날벌레 하나 출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위즐 백작가의 저택에 새가 날아든 것은 마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소리칠 일이었다.
통! 통!
위즐 백작의 집무실 창문 앞에 앉은 새는 위즐 백작을 보며 부리로 창문을 두드렸다.
명백히 일반적인 새가 할 행동은 아니었다.
소파 위에서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위즐은 마법으로 창문을 열었고, 창문이 열리자 새는 백작의 앞에 날아왔다.
“넌… 선생님의 전서구 인형이구나.”
권태로웠던 표정이 진지해지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은사(恩師)로 여기는 스승은 10여 년 전 사망했으니 이 인형을 보낸 건 그녀의 남편이자 은퇴한 전 현자인 게오르밖에 없었다.
백작이 전서구 인형에 마력을 불어넣자 새의 가슴에서 편지 한 장이 튀어나왔다.
-제이올린의 사고뭉치 제자 보아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에는 나는 이미 죽은 다음일 것이다.
원래라면 아내의 유언에 따라 내 연구 일지는 너나 아바스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으나, 내가 말년에 새롭게 제자를 하나 들여서 그러지는 못하겠구나.
꼴좋다, 이 사고뭉치 녀석. 내가 아바스엘에게 주면 줬지, 네 녀석에게는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꿈도 꾸지 말아라.
편지의 내용에 백작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 아저씨는 여전하시네.”
게오르의 연구 일지는 현자가 된 그도 탐이 나는 물건이었지만 고인(故人)의 유지를 무시하고 뺏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이올린에게 은혜를 입은 그가 할 짓은 아니었다. 다른 현자라면 모를까.
웃으며 추억에 잠긴 백작은 이어지는 편지의 내용에 표정을 굳혔다.
-원래라면 사고뭉치인 네게 굳이 내 죽음을 알릴 생각은 없었으나 이리 연락하는 김에 겸사겸사 내 소식도 몇 자 적어봤다.
하여 본론을 이야기하자면, 근래에 네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범생이 녀석의 생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바스엘…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편지에는 10년 전 실종되어 그토록 찾아다녔던 자신의 소중한 친구의 소식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가 실종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적혀 있었다.
“그림자 탑 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지금 왕국 마법계에 커다란 태풍이 몰아치려 했다.
현자의 분노라는 사상 초유의 태풍이.
* * *
나는 질리안 79호가 타준 홍차에 브랜디를 섞으며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왠지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왕자님.”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기분 좋은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휴식을 즐기는 정도지, 뭐.”
지난 한 달간 게오르에게 마법을 배우느라 혹사한 머리에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일단 게오르가 가르친 모든 이론을 암기하긴 했지만, 이해했다고 볼 순 없었기에 그의 연구일지를 보며 더 공부를 해야 했다.
내가 가르친 걸 전부 이해했으면 아무리 마력이 쥐꼬리만 해도 날 베네티 메이지라고 부르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일단 지금은 술을 마시자.
내가 술을 마시려 할 때면 항상 취한 상태로 수업을 들을 수 있겠냐며 게오르가 호통을 쳐대니 한 달 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캬! 좋다.”
그간 부족했던 수면도 보충하니 이게 사는 거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게오르는 위즐 백작에게 아바스엘이 겪은 일을 잘 전했는지 모르겠다.
위즐 백작이 그림자 탑을 공격하도록 일부러 게오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놨는데 말이다.
내가 느낀 게오르는 생각보다 사려가 깊은 사람이니 매년 아바스엘의 소식을 찾는 위즐에게 편지 정도는 했을 거다.
“그런데 말이야, 길버트.”
“예, 말씀하십쇼.”
“수련은 어때? 바스타유로 올라가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내 물음에 길버트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충분하다는 말이네.”
내 말을 들은 길버트는 당황했다.
“예?! 그게 어떻게 그런 말이 됩니까?”
길버트의 항의에 나는 피식 웃었다.
“잘 모르겠다며? 여기 오기 전 같았으면 죽는다고 말했을 텐데 모르겠다는 건 해볼 만하다는 거 아니겠어?”
“그런….”
길버트는 자신 없어 보였지만 내가 보기엔 충분히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길버트, 바스타유 산맥의 몬스터보다 강한 인형 수십 개를 상대로 홀로 버틸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야. 너 혼자가 아니잖아.”
내가 창밖에 있는 프레시아에게 고갯짓하자 길버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너 하나만 건사하면 돼. 날 지키는 건 프레시아면 충분하니까.”
내 말에 길버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씀은 제가 아직 호위 기사로서 부족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뭐, 일반적인 장소였으면 너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겠지만 바스타유 산맥이잖아.”
그곳에서 상대해야 할 몬스터의 단위는 게오르의 방위 인형처럼 수십이 아니다.
적어도 수천, 어쩌면 수만에 달할지도 모른다.
“인형을 상대하는 건 어디까지나 훈련이자 연습이야.”
나는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떠날 채비를 해야 하니까 마력 연공도 멈춰.”
내 지시에 길버트는 바로 연공을 중단하고 마력을 갈무리했다.
보통 이렇게 빨리 끝내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프레시아의 훈련이 성과가 있는 모양이다.
길버트가 바로 짐을 싸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자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떠나는… 건가요?”
내 옆에서 마치 동화를 읽는 것처럼 게오르의 연구일지를 읽던 실루아는 서글픈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야지. 원래는 길어야 일주일 정도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길어졌어.”
만일 내가 왔을 때 게오르가 죽어 있었다면 실루아를 죽이고 훈련 겸 휴식의 공간으로 잠깐 머무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게오르가 살아 있었고, 운이 좋게도 내가 그의 마법을 익힐 수 있어 실루아를 죽이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은 덕에 계획보다 오래 머물렀을 뿐이다.
“그래요? 좀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실루아는 아쉬워하다 못해 슬퍼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실루아, 네가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 가겠어?”
“제가요?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실루아의 눈이 반짝였다.
“너만 괜찮다면야 우리야 좋지.”
실루아는 게오르의 마력회로와 모든 마법을 계승했다.
당장은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겠지만, 머지않아 게오르 못지않게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면 프레시아와 비견되는 전력이 되어줄 거다.
“물론 부모님과의 추억이 가득한 이 집을 떠나는 게 꺼려진다면….”
“괜찮아요! 챙겨 가면 돼요!”
“뭐?”
내 되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실루아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집이 사라졌다.
아니, 우리가 있던 숲 자체가 사라졌다.
창밖에 빽빽이 심어져 있던 나무들과 초원이 사라지고 드넓은 흙 밭이 생겼다.
“우리 집은 원래 이동식이에요!”
“아… 그러니?”
이 숲의 면적이 적어도 50헥타르(50만 제곱미터)정도는 되어 보이던데.
“그래도 이동 중에는 공방을 이용하진 못하겠네요. 마법 공방은 땅의 용맥도 중요해서요.”
“…그렇구나. 대단하네.”
현자는 괜히 마법사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
그 힘의 편린만 조금 봤는데도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저도 같이 가도 되는 거예요?”
“그래.”
“와아~! 신난다!”
실루아는 내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갑자기 집과 숲이 사라지자 방에서 짐을 싸던 길버트와 마당에서 검을 휘두르던 프레시아는 당황하며 날 바라봤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실루아, 우리가 타고 온 말은 꺼내주겠니?”
“네!”
실루아는 손가락을 튕겨 마구간에 있던 말을 소환하듯 꺼냈다.
“음, 그래도 보통 말보다는 아버지의 망아지 시리즈가 더 빠르고 강하지 않을까요?”
실루아의 물음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도시에 들러 말은 팔면 되지.”
근처 마방이 있을 만큼 규모가 있는 도시가 어디였더라?
* * *
매서운 눈보라가 치는 날, 사내는 성벽 위에 서서 손을 뻗었다.
두터운 장갑 위로 내려앉은 눈은 금세 녹아 물기가 되었다.
“진눈깨비. 벌써 봄인가.”
눈보라 속에서도 사내는 봄이 왔노라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4월 초순, 다른 땅에는 새순이 자라나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계절.
이 혹한의 땅에는 봄꽃 대신 여전히 눈꽃이 피어있었다.
“특무대장.”
사내의 부름에 거구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사령관 각하.”
“지옥의 계절이 돌아온 모양이다.”
사내의 말에 특무대장이라 불린 거한의 사내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스타유 산맥이 또다시 피비린내로 가득해지겠군요.”
바스타유 산맥에서 혹한의 겨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몬스터들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산맥 전역에 깔린 괴물들은 일제히 겨울을 버티기 위해 동면에 들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겨울은 안식의 계절이라 불린다.
반면, 봄은 동면에서 깨어난 몬스터들이 굶주린 배를 안고 먹을 것을 찾아 산 아래로 내려오는 시기다.
다른 계절인 여름이나 가을에는 산맥에 풀이 자라고 열매가 열려 먹을 것이 있지만, 봄에는 먹을 것이 없어 동족상잔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그래서 봄은 지옥의 계절이라 불렸다.
“안식의 시간은 끝났다. 전군 방비를 마치고 군량을 확인하라.”
사내의 지시에 특무대장은 날 선 각도로 경례했다.
“충! 사령관 각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특무대장이 물러가고 사내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천하십검의 한 사람이자 수많은 이명을 지닌 ‘검귀(劍鬼)’ 데미웨이 디 블란츠바그는 저 멀리 아래로 내려오는 괴물들을 보며 검을 뽑았다.
“이봐.”
데미웨이의 부름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가 군기 바짝 든 목소리로 관등성명을 댔다.
“충성! 십인장! 델리 할츠만!”
“애들 데리고 가서 수습하고 와.”
그 말에 십인장은 바짝 얼어붙었다.
눈보라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집채만 한 거대 곰 괴수가 적어도 다섯 마리 이상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말입니까?”
병사 열 명으로는 처리가 불가능한 숫자였다.
십인장의 되물음에 데미웨이는 대답 없이 무덤덤하게 성벽 위에 서서 일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짙은 녹색의 검기가 눈보라를 뚫고 집채만 한 거대 곰을 모조리 반토막 냈다.
“가죽은 대장간으로 보내고, 고기는 취사장으로 보내라. 독이 있으면 사제들을 불러 정화시켜.”
일격에 괴물들을 처리한 광경을 본 십인장은 군기가 빠짝 들어 경례했다.
“예! 알겠습니다!”
데미웨이는 눈보라 너머 거대한 산맥을 보며 혀를 찼다.
“벌써부터 이런 것들이 내려오니 이번 봄도 꽤나 길겠구나.”
안식의 겨울은 끝났으니 고되고 기나긴 봄이 될 터였다.
피비린내 나는 봄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