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소망을 담은 인형 (9)
“한번 마법진을 새기면 지울 수 없으니 조심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게오르의 경고에 나는 대충 대답하며 거침없이 선을 그었다.
잘못 그리면 원래 하려 했던 것처럼 맨바닥에 그리면 되지, 뭐.
“음, 대충 이 정도인가.”
완성된 정령 소환진을 리즈벳의 정령서와 비교했다.
정령계와 연결 통로, 잘 그렸고.
정령 상징 표시, 잘 그렸고.
물 원소 응집 마법, 잘 그렸고….
“좋아. 다 잘 그렸네.”
내가 책을 덮자 게오르는 집중해서 리즈벳의 정령 소환 마법진을 살폈다.
“대단하군. 과연 전설의 정령술사 리즈벳인가. 소환진 좌측 상부와 중앙 부분은 요정의 기록물과 유사한 점이 많아. 우측에 그린 정령 상징물은 고대 난쟁이의 마법을 차용한 건가?”
혼자 중얼거리며 감탄하는 게오르는 만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내 질문에 게오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소환진은 원소술의 정수이자 극치다. 아마 이 소환진을 ‘빙하의 현자’가 봤다면 네가 가진 정령서와 이 석판을 얻기 위해 억만금을 가져다 바칠 거다.”
빙하의 현자라면 게오르와 같은 시대의 마법사면서도 은퇴하여 현자의 이름을 반납한 게오르와 달리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자였다.
“아니, 그 미친 여자라면 넘겨주지 않으면 죽여서라도 뺏으려 하려나?”
그가 덧붙인 말에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른 사람 앞에서 리즈벳의 정령서를 꺼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였다니.
소설 속에서는 불타 유실되었는데. 타버린 정령서의 파편을 본 주인공 제이드가 괜히 오열했던 게 아니구나.
“아무튼 빨리 정령을 소환해 보거라.”
게오르는 눈을 반짝이며 날 재촉했다.
아무리 죽어간다고 하지만 마법사는 마법사인가 보다.
“알겠습니다.”
나는 석판 위에 서서 한 손에는 정령석을 들고 디벳 영감이 만든 정령 감화 촉진제를 들이켰다.
“오라! 심해와 같이 깊은 자여, 대해와 같이 넓은 자여! 때로는 격랑처럼! 때로는 고요한 호수처럼! 만물을 축복하는 봄비처럼! 이곳에 강림하여 적셔라, 자애로운 대양(大洋)의 군주여!”
내 마력이 담긴 주문에 대응하여 정령계와 현세가 연결되며 소환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빌리비스크의 석판이 소환진의 마력을 고르게 순환시킨 덕분인지 누니를 소환했을 때와 달리 고요했다.
누니 때를 생각하면 이 근방이 물바다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소환진 위로 허공에 조금씩 물방울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연못보다 거대한 물 덩어리가 생겼다.
물 덩어리는 압축되듯이 그 크기를 줄여가더니 이내 주먹만큼 작아졌다.
-삑! 삑삑!
작은 물 덩어리 속에서 하얀 털에 푸른 줄무늬를 지닌 다람쥐가 튀어나왔다.
내가 소환한 정령 '대양의 군주'는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봤다.
나는 누니에게 했던 것처럼 손에 쥔 정령석을 흔들며 관심을 끌었다.
“어때? 가지고 싶니?”
대양의 군주도 누니처럼 정령석에 혹했는지 내게 다가왔다.
“나와 계약하자. 그럼 이 정령석을 네게 줄게.”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날다람쥐처럼 뛰어올라 내 팔에 안착했다.
그러자 계약이 성사됐는지 다람쥐의 감정이 느껴졌다.
이 녀석은 정령석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정령석을 건네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람이다.”
역시 이름은 외우기 쉬운 게 좋다. 정령석을 받아든 람이는 한입에 정령석을 삼켰다.
볼이 제 얼굴보다 크게 늘어난 람이는 우물거리더니 이내 정령석을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앞으로 셋이 잘 지내.”
내 말에 바람과 번개, 그리고 물의 정령들은 서로를 보며 나름의 교감을 나눴다.
나는 석판에서 내려오며 석판을 바로 식자재 창고에 집어넣었다.
“앗!”
방금 있었던 정령 소환에 생각을 몰두하던 게오르는 내가 석판을 회수하자 그걸 왜 챙기느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제가 소환하는 걸 보여 주겠다고 했지, 소환진을 넘겨 드리겠다고는 안 했잖습니다. 그리고 영감님께는 별 필요도 없잖습니까. 실루아가 정령술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말에 게오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쳇! 치사한 녀석 같으니.”
그는 아쉬워하긴 했지만 크게 미련 두지 않았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건 한낱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 * *
밤이 지나고 다시 날이 밝았다. 게오르는 오늘도 어김없이 창가에 비추는 햇살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눈가를 닦듯이 매만진다.
“음….”
매일 아침 흐르던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상하군.”
그래, 이상했다.
마음의 공허함은 여전한데, 아내가 너무나 그립고 괴로운데, 오늘은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오늘도 아침에 그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했건만, 신기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 지난밤은 평안하셨는지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질리안 79호의 인사에 게오르는 대답했다.
“아니, 평안치 않았다.”
매일이 평안치 않았다.
그런 당연한 사실에 당연한 대답을 하지 않은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랬을 텐데 게오르는 대답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더욱 마음이 공허했기 때문일까?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질리안 79호는 정해진 행동대로 약과 물 잔을 내밀었고 게오르는 약을 집어 들었다.
평소처럼 창밖으로 던지려던 게오르는 자신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는 손에 쥔 약을 바라봤다.
“이제 이 약을 먹어봤자 수명은 늘어나지 않겠지.”
죽음을 늦추기에는 이미 너무나 늦었다.
물론 약을 먹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내가 죽은 이후로 약을 꾸준히 먹어봤자 늘어날 수명은 채 3년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에게 아내가 없는 3년은 너무나 긴 고행이었기에 약을 먹지 않았다.
게다가 약은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
섬세하고 복잡한 마법 연구와 작업을 하기에는 방해가 되었기에 더욱 약을 먹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걸로 어느 정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겠군.”
약은 그에게 집중력을 앗아가지만 몸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법사에게 활력은 곧 마력의 활성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게오르가 물을 들이켜자 질리안 79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약을 잘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으십니다.”
“그래. 네가 좋다니 나도 좋구나.”
게오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난 제자를 가르칠 시간이다.”
게오르가 방을 나서는 모습은 질리안 79호의 눈을 통해 실루아의 망막에 비쳤다.
“…아버지. 그 미소는 무엇인가요?”
뒷마당에서 골동품 5호의 옆에 앉은 실루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 * *
오늘도 게오르의 수업이 끝나자 나는 쓰러지듯 땅에 누웠다.
게오르의 저택에 온 지도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 말인 즉, 오늘 수업 내용은 벌써 4학년 과정이었다는 의미였다.
“아니, 진짜로 하루에 한 학년 치를 다 하냐고!”
학년이 넘어갈수록 내용은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따라갈 만했다.
몸으로 익혀야 하는 마력의 운용법 외의 이론 부분은 현대 고등 수학이나 대학 수학에 비하면 어려운 축에도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암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외우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날이 갈수록 분량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첫날에는 여섯 권이었던 교재가 지금은 아홉 권이다.
나는 힘없이 누워서 게오르가 시현한 마법들의 흔적을 정리하는 질리안 79호를 불렀다.
“저기.”
내 부름에도 질리안 79호는 대답이 없었다.
“질리안 79호?”
“부르셨습니까? 유안 님.”
주변에 다른 질리안 시리즈가 있을 때는 질리안 79호라는 명확한 이름을 불러야 자신을 부른다고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영감님한테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냐고 물어봐 줄래?”
“유안 님의 질문, ‘영감님한테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냐고 물어봐 줄래?’의 답변을 문의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대답한 질리안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질리안 71호를 경유하여 문의한 결과, 마스터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습이나 제대로 해라.’ 이상으로 문의에 대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대답을 한 질리안 79호는 마저 주변 정리를 계속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낙담하며 주변 정리를 하는 질리안 79호를 멍하니 구경했다.
잠시 머리를 비울 필요가 있었다. 그때 질리안 79호의 손이 눈에 띄었다.
“질리안 79호.”
“예, 유안님.”
“그 장갑은 못 보던 건데?”
질리안 79호의 손에 끼어진 검은 장갑에는 투박한 솜씨의 자수가 놓여 있었다.
“유안 님의 질문 ‘그 장갑은 못 보던 건데?’에 대한 답변을 기록실에서 검색합니다. …검색 완료. 지금으로부터 4시간 17분 23초 전 아가씨께 돌려받았습니다.”
“돌려받아?”
그러고 보니 수시로 저택을 돌아다니며 관리하는 질리안 시리즈 중에서 질리안 79호만 맨손이긴 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질리안 시리즈의 손에는 모두 장갑이 끼워져 있었지만 어느 개체는 자수가 달려 있었고, 어느 개체에는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빨래 바구니를 들고 옮기는 질리안 시리즈 중 장갑이 없는 질리안을 발견했다.
“저기!”
내 부름에도 맨손의 질리안은 대답 없이 빨래 걸이대로 걸어갔다.
“질리안 79호.”
“예, 유안 님.”
“저기 빨래 바구니를 든 장갑을 끼지 않은 질리안은 몇 호지?”
“유안 님의 질문 ‘저기 빨래 바구니를 든 장갑을 끼지 않은 질리안은 몇 호지?’에 대한 답변을 드립니다. 80호입니다.”
그런가. 대충 알 것 같았다.
자수가 새겨진 장갑을 낀 질리안 시리즈는 79호 이하, 자수가 없는 장갑을 낀 질리안 시리즈는 81호 이상인 듯 했다.
“그 자수는 실루아가 새겨 준 거야?”
내 물음에 질리안 79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 그렇습니다.”
질리안 79호의 대답에 나는 몸을 일으켜 질리안 시리즈들이 끼고 있는 장갑에 새겨진 자수를 확인했다.
약간의 오차도 없이 기계로 새겨 놓은 것처럼 똑같은 모양의 자수였다.
“과연. 이래서야 영감님이 죽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네.”
실루아는 자신이 하고 싶어서 장갑에 자수를 놓아주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자수 모양이 일정할 리가 없다.
나는 실루아를 찾아 저택을 돌아다녔다.
그리 넓지 않은 저택이라 실루아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소파 위에 앉아 장갑에 자수를 새겨 넣는 실루아의 등 뒤로 몰래 접근해 기습하듯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꺄하하하! 간지러워요! 갑자기 뭐예요?”
실루아는 웃으며 장갑과 바늘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실루아, 심심하니까 지금부터 나랑 놀자.”
내 말에 실루아는 살짝 삐진 듯 날 바라봤다.
“오빠는 아버지 수업을 들어야 하잖아요! 공부를 방해하면 아버지께서 싫어하실 거예요!”
“아하하하! 잠깐 논다고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으면 네 아버지가 날 가르치겠어? 아니면 자수 놓는 게 노는 것보다 즐거운 거야?”
내 물음에 실루아는 갈등했다.
당연했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자수도 아니니 당연히 노는 게 더 즐거울 터였다.
실루아는 20년도 전에 사망한 게오르와 제이올린의 딸을, 자신의 언니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의무라는 듯이.
나는 실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곤충 채집해 봤어? 술래잡기는? 숨바꼭질은? 둘이서 노는 것도 좋지만 사람이 더 많으면 더 재미있지. 프레시아와 길버트도 함께 놀자. 그리고 네 아버지도.”
내 말에 실루아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의무감과 유혹 사이에서 망설이던 실루아는 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럼… 조금만.”
나는 실루아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