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소망을 담은 인형 (8)
“치사해요.”
실루아의 말에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하, 네 아버지가 너에게는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내게 마법을 가르쳐줘서 삐졌구나?”
내 말이 정곡이었는지 실루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에요!”
“에이, 아니기는.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아니라니까요!”
실루아는 분한 얼굴로 뺨을 부풀리며 날 노려봤다.
게오르와 많이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날 노려보는 눈초리가 게오르와 판박이였다.
여러모로 인형답지 않은 행동과 반응이었다.
내가 이 세계의 마법 인형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겨울나무의 현자> 속 아르카나의 간부, 인형사 니벨은 게오르의 유산을 얻고도 실루아는커녕 질리안 시리즈 수준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형을 만드는 데도 실패했었다.
그럼에도 따라 만든 인형은 병기(兵器)로서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그 점을 생각하면 게오르가 얼마나 위대한 인형술사인지, 실루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인형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내가 네 아버지의 시간을 뺏어서 그런가?”
내 장난스럽게 묻자 이번에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실루아의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세이렌이라 불리는 인어들이나, 흡혈귀, 정령 등과 같이 마력을 동력으로 삼고, 마법으로 몸이 구성되어 있는 생명체는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그건 마법 인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실루아를 살짝 안아주며 사과했다.
“내가 짓궂었구나. 미안하다.”
실루아도 이미 게오르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내 다독임에 잘게 떨던 실루아는 이내 감정을 추슬렀는지 내 품을 벗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실루아는 착한 딸이에요. 그러니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지 않아요. 앗! 질리안 77호가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모양이에요! 저는 도우러 가 봐야겠어요!”
내게서 떨어진 실루아는 웃으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저 웃음소리가 울음소리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일 뿐일까?
* * *
정신을 차린 길버트는 몸을 일으켜 여기가 어디인지 파악했다.
그가 깨어난 곳은 게오르의 저택 거실 소파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명상을 하던 프레시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배고플 테니 먹어.”
프레시아의 시선 끝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샌드위치가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길버트는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꽤나 무리한 줄 알았는데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느낌이었다.
유안이 준 디벳의 환약 덕분인가 생각하던 길버트는 소파 아래 깔린 양탄자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게오르 공의 회복 마법진이야. 자연 치유력은 물론 마력 회복까지 돕는다고 해.”
프레시아의 대답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회복이 빠르다 싶었습니다.”
“마력 회복을 돕는다는 건 주변의 마력을 응집시킨다는 거야. 즉, 마력 연공(硏功)을 하기에는 최적이란 말이지.”
“아하! 저도 하겠습니다.”
길버트는 프레시아처럼 앉아 자신의 마력을 가다듬었다.
기사의 마력 연공은 마법사의 마력회로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자신의 마력으로 세상과 공명하여 이적을 펼치는 마법사와 달리 기사는 몸 안의 마력을 세상과 단절시키며 오롯이 자신의 몸과 검을 강화하는 데만 사용했다.
물론 몇몇 기사들은 마법과 같은 특이한 힘을 발현시키기도 했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명상하듯 몸 안의 마력을 단련하던 중 프레시아는 천천히 말했다.
“길버트, 내 말이 들리면 ‘예’라고 대답해.”
연공이 숨 쉬듯 자연스러워 대화를 할 여유가 있는 프레시아와 달리 연공에 정신을 쏟고 있는 길버트는 프레시아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프레시아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길버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
땀을 흘리며 힘겹게 대답하는 길버트를 보며 프레시아는 가르치듯 말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전투 중이 아닐 때는 움직이며 연공하는 연습을 시킬 거야. 처음에는 대화를 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보통의 기사는 하지 않는 너무나 가혹한 훈련이었다.
상식적으로 연공은 체내의 마력을 키우고 단련하는 것인 만큼 상당한 집중력을 요한다.
연공 중 자칫 실수한다면 마력이 폭주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부상의 위험에도 기사들이 마력을 연공하는 이유는 마력을 다루는 기사와 다루지 못하는 기사의 무력 차이가 성인 남성과 어린아이만큼 크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연공이 우선이야. 마력이 폭주하면 본말이 전도되니까.”
프레시아의 말에 길버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띄엄띄엄 물었다.
“왜… 그런… 연습을?”
“좋은 질문이야.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호위 기사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연공 중이든, 자는 중이든 왕자님의 안전을 위해 언제든 움직여야 해. 적은 우리 사정을 보고 공격해 오지 않는다.”
유안의 호위는 프레시아와 길버트, 단둘뿐이다.
아무리 유안이 정령을 다룬다고는 하지만 정작 정령술사인 그의 마력이 보잘것없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바로 연공을 중단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공간을 확보할 수 없어서다. 우리는 왕자님을 호위하느라 지금같이 안정적인 훈련 장소를 갖지 못해.”
여행 중에는 연공을 해봤자 잠들기 전 노상에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공 중에 야생 동물이나 몬스터를 만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보통의 기사들은 전쟁 중이나 호위, 훈련 중에는 연공을 하지 않았지만, 프레시아는 보통의 기사들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 왕자님께서 이동 중에도 우리를 배려하여 틈틈이 훈련 시간을 주시긴 하셨지만 공을 들여가며 연공을 할 정도는 아니야.”
훈련 시간보다도 제한 시간이 더 빠듯했다.
유안이 게오르에게 볼일을 끝마치고 나면 바로 인세의 지옥이라 불리는 바스타유로 향해야 했다.
길버트는 아직 바스타유로 가기에는 너무나 약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훈련을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이동하느라 훈련하지 않는 건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이유는 연공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으면 보다 강해질 수 있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단련을 할 수 있으니 그 누구보다 빠르고 강해질 수 있었다.
상당히 미친 소리였지만 길버트는 프레시아의 이유에 납득했다.
그는 지난날 가까이서 보았던 프레시아의 강함을 동경했다.
“알겠…습니다….”
사실 첫 번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프레시아의 훈련은 가치가 있었다.
프레시아 또한 호레이즌에게 이러한 방법을 훈련받은 것도 모두 첫 번째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가르치는 호레이즌은 연공 중 재빨리 마력을 갈무리하라고 가르친 것이지 하루 종일 연공을 하라고 가르친 게 아니었다.
“좋아. 납득한 것 같으니 연습을 시작하자. 마력을 연공하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지?”
“돌아…가신… 하, 할…아버…지께… 배웠…습니다.”
길버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왕실 기사셨나?”
“그건… 모르겠, 습니다.”
“그래? 왕실 기사들의 연공법과 비슷해 보이는데.”
마법사에게 학파가 있듯 기사들에게도 계파가 있었다.
학파에 따라 마력회로 개발법이 다른 것처럼 기사들 또한 기사단, 가문, 지역에 따라 연공법이 달랐다.
프레시아 또한 기사 가문인 자밀레이온 가문의 연공법을 전수받아 훈련했다.“뭐, 좋아. 왕실 기사의 연공법은 스승님도 인정한 연공법이니 비슷하다면 괜찮겠지.”
길버트의 연공법이 이상해 보였으면 그녀가 호레이즌에게 배운 수십 가지 연공법 중 하나를 가르쳐줄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네가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 검술이든, 오늘 훈련에 있던 일이건 대답해 줄 테니까.”
“예… 알겠, 습니다.”
길버트는 프레시아의 훈련법에 미세하게나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 *
밤이 깊은 새벽, 나는 나비가 앙증맞은 발로 내 뺨을 꾹꾹 누르는 힘에 잠에서 깨어났다.
마법을 배우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음기가 가득해 물의 정령을 불러내기 좋은 시간대인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들었다.
“하암~! 깨워줘서 고마워.”
-냐아!
-뾰로로롱~!
몸을 일으키자 나비는 내 어깨 위에 올라탔고 누니는 머리 위에 앉았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 옆 침대에는 자고 있어야 할 길버트가 없었다.
“얘는 어디 간 거야? 하암!”
나는 기지개를 켜며 방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에는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아직도 마법진 위에서 연공을 하고 있었다.
“연공도 좋지만 내일 훈련에 지장 가지 않게 적당히 하고 자.”
내 말에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동시에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알겠, 습니다.”
길버트도 대답을 하는 걸 보면 프레시아의 미친 수련법을 길버트에게 전수하는 모양이다.
프레시아의 연공 수련법을 본 천하십검 중 하나인 검마(劍魔)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수양이 부족했도다. 지금껏 수많은 광기를 보아왔건만 진정한 광기가 여기 있었구나. 덕분에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또 다른 천하십검의 한 사람인 검선(劍仙)은 그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저런 미친년을 봤나.’
연공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마당으로 나가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연못가에 먼저 나와서 기다리던 게오르는 날 보며 혀를 찼다.
“늦었다.”
그의 말에 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2분 남았습니다.”
“약속을 했으면 10분 전에는 나와야지. 쯧, 제자가 되어서 찬바람 속에서 스승을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다.”
아니, 누가 먼저 나와서 기다리라고 했나?
몸도 약한 영감이 10분 전부터 기다린 거면 정령 소환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던 거야?
“예, 예, 불민한 제자라 죄송합니다요. 그런데 호수 위에 있는 저 거대한 돌판은 뭡니까?”
내 질문에 게오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이빌리비스크의 석판이다.”
“아. 그렇군요…. 잠깐, 이빌리비스크? 그거 마도 학파의 중요 전승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는 석판 아닙니까?”
내가 경악하며 묻자 게오르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빌리비스크’는 대략 600년 전 마도팔현 중 한 명으로, ‘기록의 현자’라고 불린 마법사였다.
그가 남긴 ‘이빌리비스크의 석판’에 마법으로 기록된 기록물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훼손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석판 자체에 마력이 담겨 있어 소환 마법에 사용하기 좋다.”
“아니, 제 말은 이렇게 귀한 걸 단순히 정령 소환 마법에 사용해도 되냐는 겁니다!”
현존하는 석판이 몇 개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빌리비스크가 만든 석판은 거의 남지 않았을 세계 유산이었다.
물론 이빌리비스크는 이빌리비스크의 석판의 제작법을 남겨두긴 했다.
하지만 석판이 만들어지는 것은 많아야 10년에 1, 2개 정도뿐이다.
석판을 제작하는 데 드는 재료도 재료지만, 그 마법 술식이 너무 난해해 현자급 마법사가 아니면 사실상 마법사 위계의 최고위인 슈프림 메이지(Supreme Mage)가 십수 명은 달라붙어야 할 정도였다.
게오르의 모든 정수가 실루아라면 이빌리비스크의 모든 정수는 그의 이름을 딴 석판이라 할 수 있었다.
“괜찮다. 어차피 기록실의 핵을 만들다 남은 거니.”
말하는 걸 보면 게오르가 직접 만든 석판인 듯했다.
그래도 귀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확실히 그의 말대로 석판은 마법을 구동하기 아주 좋은 재료였다.
이 석판을 사용하면 누니를 소환할 때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소환할 수 있다.
물론 소환진이 영원히 박제된다는 게 조금 꺼려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좋은 기회이니 나는 석판 위에 올라 아바스엘의 마법 각인펜으로 리즈벳의 정령서에 적힌 물의 정령 소환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