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소망을 담은 인형 (4)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프레시아와 길버트의 싸움은 꽤나 흥미진진했다.
-다음.
프레시아는 1대 1이 되자 인형들을 양학 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허억! 다, 다음!
반면 길버트는 인형을 상대로 힘겹게 싸워나가고 있었다.
서로 상반된 전투였지만 한쪽은 시원시원한 맛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처절한 맛이 있었다.
역시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찾기 힘들다.
“저 붉은 머리 여자아이가 호레이즌 녀석의 제자인가?”
게오르의 물음에 나는 홍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레이즌 경이 말하길 딸과 같다고 하더군요. 프레시아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고요.”
프레시아는 벌써 20개의 인형을 베어냈다.
실력을 보기 위해 약한 인형부터 순차적으로 보낸다고 했으니 프레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나온 인형의 레벨도 슬슬 만만치 않았다.
“음, 저 정도 실력이면 스승을 진작 뛰어넘은 모양이군.”
그의 추측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물론 동일한 나이 기준으로 보면 호레이즌 경보다 강할 테지만 그래도 아직 천하십검에는 못 미치죠.”
천하십검이라는 명성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프레시아라도 바스타유에서 몇 년은 굴러야 엇비슷해질 터다.
내 냉정한 평가에 게오르는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천하십검? 누가?”
“어… 모르고 계셨습니까? 호레이즌 경은 천하십검 중 한 명입니다. 검호(劍豪) 모르세요?”
내 대답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맨날 술 처먹고 난동이나 부리던 그 풋내 나는 망나니가? 천하십검? 검호?”
망나니? 호레이즌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기야, 내가 아는 호레이즌은 대부분 여주인공인 프레시아의 시선에서 묘사되던 호레이즌이었으니.
내가 붉은 이빨 호레이즌의 젊은 시절 따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게오르는 믿을 수 없다며 자신의 세상이 부정당한 것처럼 혼란스러워했다.
“말도 안 돼. 그 망할 새끼가 천하십검이라니, 세상이 망할 징조가 분명해.”
“영감님께선 예상 이상으로 지나치게 세상과 단절되신 모양입니다. 이 나라의 모든 기사들이 동경하고 흠모하는 기사 중의 기사인데요.”
외부와의 교류 없이 은둔하며 살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 나라에 살면서 호레이즌이 천하십검 중 하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내 말에 게오르는 말도 안 된다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호레이즌, 그 망나니가 무슨 기사 중의 기사야! 망종 중의 망종이지! 그 놈이 부숴먹은 내 인형들이 몇 개인 줄 아느냐? 무려 16759개다! 그중 절반 이상은 녀석이 술 처먹고 난동 부리다가 내 팩토리 라인의 핵을 파괴해 공방채로 날아가 버린 숫자라고!”
현자의 공방을 날려 버리다니, 그 아저씨가 어려서부터 비범하긴 했나 보다.
잠깐, 절반이라는 건 나머지 절반은 직접 부숴 먹었다는 건가?
“그 새끼는 말이야!”
게오르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레이즌이 어렸을 적 저지른 망나니짓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일화들을 들으니 내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술병으로 꼰대들 대가리 많이 깨고 다녔는데. 참 그리운 추억이다.
그 결과 유교 브레이커, 불광천의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딱히 후회는 하지 않았다.
내게 대가리 깨진 놈들은 전부 깨질 만한 놈들뿐이었다.
다음에 호레이즌을 보게 되면 왠지 동질감이 들 것 같았다.
나는 추억에서 벗어나 게오르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영감님, 실루아가 무서워합니다.”
놀란 눈을 한 실루아를 본 게오르는 가까스로 진정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전하와 위즐가의 가주 녀석, 그리고 내 아내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직접 그레인 백작과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 모가지를 따버렸을 거다.”
그가 말하는 위즐가의 가주와 그레인 백작은 둘 다 전대 백작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바스엘의 친구인 현 위즐 백작은 당시엔 딱히 힘이 없었고, 호레이즌은 셋째라 백작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다만 전공이 높아서 따로 작위를 받고 분가(分家)한 것으로 알고 있다.
“너무 흥분하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던 게오르는 잠시 멈칫했다.
날 노려보듯 보던 그는 말을 돌렸다.
“자네는 아바스엘의 지팡이를 받았다고 했지?”
“그랬죠.”
“그 경위를 들을 수 있겠나? 내가 그 녀석에 대해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10년 전쯤 실종 소식이라 말이야.”
게오르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괜찮을지 가늠했다.
그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소설 속 단편적인 정보로는 정확한 수명을 알지 못했지만, 그의 안색을 보아하니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진작 죽었어야 할 몸이 그가 품고 있는 미련 때문에 억지로 삶을 붙들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 * *
“자네는 서커스단을 두고 혼자 이렇게 와도 괜찮은가?”
아바스엘의 물음에 야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하루 거리인데요, 뭐. 다들 뛰어난 곡예사들이라 저 하나쯤 없어도 공연에 지장은 없습니다.”
야드는 아바스엘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잠시 슬라반 서커스와 떨어졌다.
이곳은 산세가 험해 서커스의 짐들을 가지고 다닐 수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아바스엘의 호위를 자처한 이유는 유안에게 받은 금액도 금액이지만, 아직 유안에게 궁금한 게 많은 터라 호의를 베풀어 두기 위해서였다.
“자네가 괜찮다면 난 상관없네만.”
아바스엘은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바라봤다.
“저곳입니까? 당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보물이 잠들어 있다는 곳이.”
야드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터호른. 주군의 말에 따르면 저 산에 거꾸로 자라는 겨우살이 풀, ‘미스텔’이 있다.”
아바스엘의 말에 야드는 섣불리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을 죽이는 풀이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겁니까? 물론 저도 어느 정도 마법을 익혀서 엘 씨의 마법식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술식인 것은 인정합니다만….”
아바스엘의 마법진에는 가장 중요한 촉매에 해당하는 위치가 허무맹랑했다.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미스텔’, 혹은 그에 준하는 촉매가 있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야드의 걱정에 아바스엘은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저 산을 보기 전까지는.”
아바스엘도 야드처럼 유안의 지시가 허황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갈고닦아 온 마법적 지식과 관찰안은 마터호른과 그 주변의 산세가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아봤다.
형태를 분석하던 아바스엘은 산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야드, 이 근방에 유명한 온천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사전 조사한 바로는 그랬죠.”
“그 온천의 위치가 혹시 저곳인가?”
야드는 아바스엘이 가리킨 곳을 보고는 지도와 비교해봤다.
“어… 어? 예, 저곳이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야드의 긍정에 아바스엘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경악하며 감동했다.
“용맥, 저곳이 불의 용맥이 지나가는 자리다! 맙소사, 선생님. 저는 기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현자에 가장 가까운 마법사라 불렸던 그도 관심 있게 바라보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풍경에 눈물을 흘렸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경치에 불과했지만 마법사의 관점으로는 장엄하고 엄숙한 신화적인 마법진이 있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적을 본 아바스엘은 자신의 주군을 찬양했다.
“주군이 옳았다. 저곳에는 미스텔이 잠들어 있다.”
잠시라도 유안을 믿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며 아바스엘은 산 아래 마을로 향했다.
유안의 지시가 맞는다면 마터호른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세르파 ‘클리오’가 있을 터였다.
“같이 가요!”
야드는 앞서 나가는 아바스엘의 뒤를 따라 산 아래 마을로 향했다.
* * *
질리안 79호가 내온 식사를 하고 아바스엘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창가를 보니 거대한 곰 모양의 인형에 초주검이 된 길버트가 업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프레시아는 길버트와 달리 제 발로 걸어오고 있었지만 꽤나 고생한 모양인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프레시아가 땀을 흘리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도련님! 저희를 두고 혼자 가시면 어떡합니까!”
프레시아는 날 보자마자 달려오며 잔소리를 했다.
“아하하하, 미안. 마침 좋은 기회길래 말이야.”
길버트에게도 그렇지만 프레시아에게도 좋은 연습이 되었을 거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적을 두고 무언가를 지키는 경험은 바스타유 산맥에 가기 전에 해둘 필요가 있었다.
지키는 무언가가 나일 수도 있지만, 내가 아닐 수도 있었다.
“도련님!”
“자자, 진정하고. 소개할게, 이분은 게오르 필립 씨. 이 집과 방금 전까지 너희가 싸운 인형의 주인이시고 여기 꼬마 아가씨는 실루아 필립. 게오르 씨의 딸.”
내 소개에 프레시아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프레시아 자밀레이온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게오르는 손을 내저으며 인사를 받았다.
“덕분에 나도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으니 되었다. 피곤할 테니 씻고 오거라. 식사는 욕실에서 나오면 먹을 수 있게 준비시켜 둘 테니.”
욕실이란 말에 프레시아는 눈을 반짝였다가 내 눈치를 봤다.
“편하게 씻고 와. 이분은 아바스엘의 지인이기도 하니까 믿어도 괜찮아.”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프레시아는 들뜬 표정으로 질리안 79호의 안내를 따라 욕실로 향했다.
“저렇게 예의 바른 아이가 정말 그 망나니의 제자라고?”
“저도 조금 신기합니다.”
내 대답에 게오르는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저 프레시아란 아이는 대단하더구나. 한 시간 만에 양산기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 스물을 동시에 쓰러트리다니 말이야.”
무려 현자라 불렸던 마법사의 인형이다.
네임드가 아니라 해도 어지간한 기사 분대는 가볍게 쓰러뜨릴 병기였다.
게오르의 칭찬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제 호위 기사니까요.”
“기절한 길버트란 녀석은 그 정도 실력은 아니다만?”
“지금부터 실력을 끌어 올릴 겁니다. 그래서 도움 좀 받고자 찾아온 거기도 하니까요.”
내 대답에 게오르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랜만에 맞이한 손님이니 그 정도 접대는 해주마. 프레시아란 아이에게는 양산기론 부족해 보이니 내일은 특별히 네임드를 꺼내주지.”
“정말입니까?”
“그래, 마침 얼마 전에 만든 녀석들이 정말로 이름을 붙일 만한 녀석들인가 확인해 보고 싶던 차기도 하니까.”
일반적으로 인형술사들은 양산하듯 만든 인형에 특별히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반면 인형술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형에는 개체마다 이름을 붙여주곤 했다.
이름이 붙은 인형의 성능은 곧 인형술사의 실력을 증명하는 지표이기에 인형술사는 아무 인형에게나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물론 인형술사가 성장함에 따라 이름을 붙였던 수준의 인형이 양산형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되면 네임드의 이름은 그 양산기의 시리즈 명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 내게 차를 따라주는 질리안 79호도 아마 처음에는 네임드 개체였을 거다.
“최신기라면 당연히 네임드겠죠. 저야 제 기사가 강해지면 좋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인형이 망가져도 괜찮겠습니까?”
내 물음에 게오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핫, 내 인형보다는 네 기사를 걱정해야 할 거다.”
“그건 두고 볼 일이죠. 저희 누가 이기나 내기나 해볼까요?”
“그거 좋지.”
나와 게오르는 서로를 보며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