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소망을 담은 인형 (2)
내가 왕궁을 떠난 지 닷새, 날 노린 암살자들의 습격이 있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아니,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날이 밝았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주변은 어둡지만 일단 시간상으로는 아침이 되었다.
나는 잠결에 내게 들러붙은 길버트를 떼어내며 텐트에서 나왔다.
“아직 이 시간대는 춥네.”
어슴푸레한 하늘은 아직 수많은 별들로 수놓여 있었다.
“나비야.”
-냐오옹~!
프레시아와 길버트를 대신해서 밤새 경계를 선 나비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내 어깨 위에 올라타며 뺨을 비볐다.
리즈벳의 정령서에 따르면 정령은 수면이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잔.”
내 지시에 나비는 내 손에 공기층을 형성하여 술잔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쓸데없는 설거지거리를 만들지 않아서 좋다.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고급 와인을 꺼내 잔에 따르며 향기를 즐겼다.
싸구려 술도 좋지만 역시 비싼 술은 그 값을 한다.
“일어나셨습니까?”
내 텐트 옆에 있는 텐트에서 나온 프레시아는 내게 조르르 붙었다.
나는 부스스한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정리해 주며 말했다.
“나비랑 누니가 경계를 서고 있으니까 조금 더 자도 괜찮아.”
하늘 위에서 경계를 서던 누니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내려와 내 머리 위에 앉았다.
정령이라 그런지 무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프레시아는 급하게 나오느라 몸단장도 안 하고 나온 게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스스로 머리와 구겨진 옷을 정돈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침 단련도 해야 하니까요.”
“그래? 부지런하네.”
일하는 중이니 빼먹을 만도 했지만 프레시아는 이동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까지 줄여가며 단련에 힘을 썼다.
그 때문에 프레시아에게 배우는 길버트도 덩달아 몸을 혹사하는 중이었다.
나도 디벳이 만들어준 구역질 나는 영약을 먹으며 틈틈이 운동하고 있긴 하지만, 두 사람만큼 혹독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밤사이 꺼진 모닥불에 누니의 전격으로 다시 불을 피우고 프레시아와 잡담을 나누던 중, 길버트가 앓는 소리를 내며 텐트에서 기어 나왔다.
프레시아의 가혹한 단련 때문에 전신에 근육통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었다.
“길버트도 일어났으니 아침 운동하고 와. 나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원래라면 제가 만들어야 하는데.”
프레시아의 사과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야. 나도 식사는 맛있는 걸로 먹고 싶어.”
프레시아는 요리를 전혀 하지 못했다.
화력 조절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레시피에 대한 개념 자체가 희박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윽, 너무하십니다.”
프레시아가 울상을 지으며 항의하자 나는 키득거리며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다.
길버트는 어린 동생을 위해 요리를 해온 덕분에 어느 정도 요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난 저렇게 몸을 혹사하는 녀석에게 식사까지 차리라고 할 정도로 악덕하진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만드는 게 더 맛있다.
나는 이 몸에 들어오기 전부터 요리가 특기였다.
“오늘 아침은 토마토 스튜에 소 안심을 구울까.”
다행히 식자재 창고는 그 이름에 걸맞게 식량 보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도구였다.
덕분에 왕궁을 떠나기 전 마련해 둔 식재료는 충분했다.
나는 모닥불 옆에 돌을 괴어 물을 담은 냄비를 올려놓고, 프라이팬을 들어 높이를 바꿔가며 화력을 조절했다.
천천히 재료 손질을 하고 요리를 끝마칠 때쯤 땀범벅이 된 길버트와 땀 한 방울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한 프레시아가 돌아왔다.
나는 프레시아를 보며 물었다.
“마실 물도 제한되어 있으니 땀을 흘리지 않은 건 좋은데,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면서 땀 한 방울 안 흘릴 수 있는 거지?”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체내의 마력을 순환하며 호흡으로 열기를 배출하면 됩니다.”
아하, 메커니즘은 강아지의 체온 조절과 같은 건가.
“그런 기예도 호레이즌 경이 가르쳐준 건가?”
“예? …아! 예! 그, 그렇고말고요!”
내 추측에 프레시아는 당황하며 긍정했다. 내 물음의 어디가 당황스러운 거지?
“음, 길버트? 땀 냄새 나니까 조금 떨어져 줄래?”
여행을 시작하면서 씻는 걸 최소화하다 보니 묵은 냄새가 났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로 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떨어지라고 한 건 길버트였는데 왜인지 프레시아가 더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도시에 들르면 향수라도 구하겠습니다.”
길버트의 사과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씻기는 하니 내게 달라붙지만 않으면 냄새는 잘 나지 않았다.
정 아니면 나비에게 냄새를 차단시켜 달라고 해도 괜찮았다.
“다음 정령 계약은 물의 정령으로 해야겠네.”
바스타유까지 가는 길이 꽤 멀었으니 자체적으로 식수를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다.
마법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아직 마력회로가 온전히 자리 잡지 않아 효율이 나빴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신 것 같아요!”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마친 우리는 야영 장비를 정리하고, 말고삐를 잡아 바로 앞에 보이는 숲으로 향했다.
“방문할 곳이 이 숲입니까?”
길버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겨울이라 할 만한 계절이라 나뭇잎이 제대로 자라지 않았는데도 숲에 들어가자 조금씩 안개가 끼며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이 숲이 마법으로 이루어진 결계라는 증거였다.
소설 부록으로 딸린 세계 지도가 자세했던 덕분에 잘 찾아온 것 같았다.
“맞아. 여기가 인형의 숲이야.”
이 숲의 주인은 과거 마법사들의 정점이라는 마도팔현(魔道八賢) 중 하나인 ‘만병(萬兵)의 현자 게오르 필립’이었다.
물론 지금은 은퇴해 현자의 직함을 내려놓고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처지라 전성기에 비하면 한없이 약해졌을 터였다.
사실 게오르가 지금 시점에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울나무의 현자>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인 3년 뒤에는 이미 죽은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숲에 결계가 쳐져 있다고 게오르가 살아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르카나의 간부인 인형사 니벨이 이미 죽은 게오르를 찾아왔을 때도 이 결계는 굳건했다.
“살아 있으면 좋겠는데.”
소설상의 묘사대로라면 지금 시점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몸 상태일 터였다.
하지만 살아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줄 방법을 알고 있다.
나는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며 니벨이 했던 방법대로 희미한 마력을 더듬으며 숲의 길을 찾았다.
숲 외곽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결계가 쳐져 있지만 게오르도 사람인 만큼 식료품을 구하러 마을에 방문하기 위해 틈새를 만들어놓은 거다.
아퀼라의 마력회로로 단련된 내 감각은 옅은 마력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니벨은 여기서 한 달을 머물며 고생하다가 알아낸 틈새지만 덕분에 나는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숲 중심부에 도착했는지 게오르가 만들어놓은 틈새가 끊겼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프레시아.”
“예, 도련님.”
프레시아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도 내 지시대로 도련님으로 호칭을 고정했다.
“길버트가 바스타유에 가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프레시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도 바스타유 산맥에 가본 적이 없어서 확실한 답변은 드릴 수 없지만, 스승님의 말씀을 토대로 추측하면 성장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습니다.”
프레시아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괜히 바스타유가 인세의 지옥이라 불리는 곳이 아니다.
아직 길버트에게는 일렀다.
“역시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버트와 프레시아는 기대 서린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음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바스타유로 바로 가는 것보다는 중간 단계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말에 길버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프레시아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말에 걸어둔 공간 확장 가방에 식수와 보존식을 담았다.
그러고는 가방을 길버트에게 건넸다.
“왜 갑자기 이런 걸 주십니까? 왕, 아니 도련님.”
“그냥, 만약을 위해 가지고 있으면 좋잖아.”
내가 싱긋 웃자 프레시아는 내게 뭐라 말하려 했다.
“아니, 무슨 생각이신….”
“이야~! 그런데 마침 여기 좋은 연습장이 있네?”
“…예?”
나는 프레시아 말을 자르며 길버트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기 전에 두 사람을 숲 중심부로 밀어 넣었다.
“먼저 숲 중앙에 가 있을 테니 길버트가 죽지 않게 잘 부탁해, 프레시아.”
“왕자니…!”
프레시아는 마지막으로 날 불렀지만 어딘가로 전송된 듯 사라졌다.
숲 외곽이 일반인들을 내쫓는 결계라면 중심부는 침입자를 격퇴하는 결계였다.
지금쯤 만병의 현자라고 불린 게오르의 인형 병대가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을 거다.
홀로 남은 나는 바닥을 더듬으며 숲 중앙부로 갈 수 있는 열쇠를 찾았다.
만약을 대비해 집 열쇠를 화분 밑에 두듯, 게오르도 넓적한 비석 아래 집으로 갈 수 있는 마법이 걸린 집 열쇠를 숨겨두었다.
물론 나 같은 불청객이 방문하라고 둔 것은 아니었고, 게오르의 작은 미련이었다.
나는 열쇠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 * *
갑자기 유안과 떨어진 프레시아와 길버트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마법입니까? 아니, 그보다 왕자님께선 어디로 가신 거죠?!”
길버트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두리번거리며 유안을 찾았다.
프레시아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건 왕자님께서 네게 내린 시험인 것 같다.”
그리고는 검을 뽑았다.
“전투 준비해. 적이다.”
프레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붉은 빛이 반짝거렸다.
-침입자를 배제하라.
-칩입자.
-배제.
-침입자.
사방을 가득 메운 붉은 빛은 적의로 가득한 인형들의 안광이었다.
길버트도 마른 침을 삼키며 난쟁이가 만든 검을 뽑아 들었다.
“왕자님께서 말씀하시길 먼저 숲 중앙에 가 계시겠다고 했다. 최대한 빨리 뚫고 가자.”
당장이라도 살기등등한 인형들을 박살 내고 유안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길버트를 위한 시험이다.
프레시아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 사실을 속으로 되뇌는 동시에 다짐했다.
“왕자님을 다시 뵈면 잔소리를 좀 해야겠어.”
어딘지 모를 곳에서 호위를 떨어트리고 돌아다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 *
열쇠의 인도를 따라 조금 걸으니 금방 게오르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나 큰 저택의 모습에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좋은 곳에서 사네.”
겉으로 봐서는 사람이 사는지 아닌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게오르가 죽고 나서도 게오르의 인형들은 정해진 일과대로 움직이며 집을 유지 보수한다.
게오르 사후, 유일하게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은 게오르의 어린 딸인 실루아뿐이었다.
나는 섣불리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돌며 동태를 살폈다.
지금쯤이면 결계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뒷마당으로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사람 크기의 골렘이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고 있었다.
그 주변엔 백발의 양 갈래 머리를 한 귀여운 꼬마아이가 골렘 주변을 돌며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게오르 집에 있는 하얀 머리 소녀라. 저 아이가 게오르의 딸인 실루아인가.
나는 실루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골램에게 떠들며 웃던 실루아는 날 발견하자 깜짝 놀랐다.
“오빠는 누구세요?”
“나? 나는 유안이라고 해.”
내 자기소개에 실루아는 동그란 눈을 깜박이더니 신이 나서 인사했다.
“와! 아버지 말고 사람은 오랜만에 봐요! 저는 실루아라고 해요! 이 할아버지는 골동품 5호라고 해요!”
장작을 패는 골렘의 이름이 골동품 5호인 듯 했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라. 확실히 오래되었는지 몸 곳곳이 약간 녹슬어 보이기는 했다.
“그렇구나. 만나서 반가워. 실루아, 골동품 5호.”
내 인사에 실루아는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와아! 골동품 5호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봐도 있는 듯 없는 듯 해서 저는 조금 슬퍼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를 이해해요! 아버지께는 이제 할아버지의 말이 들리지 않으니까요!”
“그렇구나.”
골렘의 말을 이해해? 딱히 에고 웨폰처럼 영혼이 심어져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앗! 저는 골동품 5호 할아버지를 도와야 해요!”
실루아는 앙증맞은 손으로 장작을 들고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도와줄까?”
“와! 정말요? 저 말고 할아버지를 도와주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일단 장작을 들고 나르기 시작했다.
몇 분간 열심히 장작을 나르고 있는데 집안에서 노인 하나가 미녀를 대동한 채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날 보자 깜짝 놀라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여기는 어떻게 침입했지?! 당장 실루아에게서 떨어져라!”
“침입자 발견, 배제합니까? 마스터.”
갑자기 거대한 클레이모어가 튀어나오자 나는 장작을 놓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