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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36화 (36/214)

제36화. 소망을 담은 인형 (1)

며칠이나 밤을 새운 니벨은 책상에 엎드려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아리사, 당신이 부럽군요. 근본이 없으니 이런 일에 동원되질 않으니까요.”

귀한 집안 출신이자 마탑에서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니벨은 지난 3주간 왕후의 폐서인을 막기 위해 모든 연줄을 사용하며 왕후를 옹호할 귀족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냐하하…. 누가 동원되지 않았다는 거야, 니벨.”

소파에 힘없이 늘어진 아리사는 힘겹게 손을 들어 가운뎃손가락을 우뚝 세웠다.

아리사 또한 바쁘게 돌아다니긴 마찬가지였다.

니벨처럼 귀족은 아니었지만, 뒷세계에 커넥션이 있는 아리사는 여러 뒷공작을 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

왕후의 학대 사건은 그녀들이 속한 암중조직, 아르카나가 준비한 정치적 기반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때문에 아르카나는 전력을 다해 상황에 대처했다.

“으으… 이건 악몽이야.”

“냐하하하하, 동감이야. 이번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00, 광대’와 ‘01, 마술사’, ‘09, 은둔자’, 심지어 ‘03, 여제’까지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더라.”

아리사의 말에 니벨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요?! 그 ‘여제’까지 동원되었다고요? 그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잘도 제국을 떠났네요.”

“냐하하하. 나도 놀랐다니까. 제국 정계의 중심에 서 있는 그 괴물을 황제가 순순히 보내줬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만큼 상황이 최악이란 거지.”

니벨은 허탈한 표정으로 힘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긴, 반드시 죽여야 할 주요 타겟 중 하나인 1왕자가 그렇게 허술하게 수도를 떠나는데, 넘버즈 하나 투입될 여력이 없을 정도니까요.”

유안이 왕궁을 벗어난 것은 그들로서는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왕궁에 발을 들일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호레이즌은 물론,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정점, 마도팔현(魔道八賢) 중 하나인 위즐가 가주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야만 했다.

천하십검 중 하나인 호레이즌의 감각도 감각이지만, 왕궁에서 위즐 백작의 눈을 피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현재 왕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왕도 참 독해. 냐하하하하! 명분을 만들겠다고 그 유약한 왕자를 장기간에 걸쳐서 폭행하다니 말이야.”

아르카나는 왕자를 학대한 건 왕후가 아닌 왕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1왕자가 장기간 학대에 가까운 흔적을 만천하에 내보인 만큼, 왕은 왕자가 나중에 이상한 말을 하지 않게 잠시 치워둔 것이리라.

아리사의 말에 니벨은 대꾸할 힘도 없는지 책상에 이마를 박은 뒤 대답이 없었다.

반응이 없자 아리사는 재미없다며 툴툴거리며 말했다.

“호위는 변변치 않았고,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인력을 투입했으니 괜찮겠지. 그러고 보면 슬슬 결과 보고가 올 때가 됐는데.”

아리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부하 중 하나가 다급하게 그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작전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책상에 엎드려 있던 니벨은 다시 한번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요?!”

소파에 누워 있던 아리사도 심각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냐하… 자세히 보고해 봐.”

“예. 보고에 따르면, 저희가 보낸 납치조와 1왕자의 호위들이 동귀어진 했다고 합니다.”

아리사는 인상을 구기며 보고를 하는 부하의 멱살을 붙잡았다.

“뭐? 사전 조사로는 별것 없는 놈들뿐이었잖아! 기껏해야 권력자들에게 빌붙는 쭉정이들뿐이었을 텐데!”

“컥! 컥컥!”

아리사가 멱살을 놓아주자 숨통이 트인 부하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 그게 왕궁 쪽에 심어둔 정보원에 따르면 호위들이 특수한 약물을 사용해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한 듯합니다.”

“약물?”

“예. 자세한 건 왕실이 회수한 시체들로부터 혈액 샘플을 입수해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독원에서 유통하는 약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현장 조사를 간 녀석들이 보낸 보고서를 보면 상당한 난전이 있었던 듯합니다.”

부하의 보고에 아리사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으며 욕지기를 뱉었다.

“독원, 그 돈에 미친 것들이…! 1왕자는? 실패했다는 걸 보면 살아 있을 거 아니야. 왕궁으로 돌아왔어?”

“아! 아닙니다. 1왕자는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뭐?!”

1왕자의 실종은 곤란했다.

정확히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죽어버리는 게 곤란했다.

1왕자의 피 속에는 태조가 자신의 혈통에 심어놓은 봉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 봉인은 숙주가 죽으면 새로 태어나는 태조의 후예 중 하나에게 옮겨진다.

때문에 1왕자의 죽음에 맞춰 봉인을 풀 준비를 해야 했는데, 왕자가 어디서 객사라도 해버리면 새로 태어날 봉인을 다시 찾아 헤매야 했다.

태조는 벌써 몇백 년 전 사람이다.

가뜩이나 후궁을 많이 들였던 태조였다.

그 자손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세상을 뒤에서 움직이는 아르카나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그보다 지금 1왕자의 실종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부하의 말에 아리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봤다.

“저희가 보낸 납치조의 시체에서 왕후의 인장이 박힌 명령서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것도 1왕자를 죽이라는 명령서가!”

그 말에 아리사와 니벨은 동시에 외쳤다.

“뭐라고오?!”

“뭐라고오?!”

그녀들에게 있어서 본격적인 고생의 시간은 지금부터였다.

* * *

“아아, 날씨 좋다.”

나는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보며 말을 달렸다.

날 노린 암살자들의 공격에도 무사한 말들이 꽤 있어서 각자 말을 한 필씩 타고 갈 수 있었다.

원래 가까운 도시에서 말을 구할 계획이었는데, 다행이다.

“왕자, 아니 도련님.”

길버트가 날 부르자 나는 내 왼쪽에서 달리는 길버트를 바라봤다.

말을 처음 타는 길버트는 긴장하기는 했지만 특유의 타고난 운동 신경으로 빠르게 익숙해졌다.

벌써 말을 타며 대화를 하다니.

난 저 정도로 타기까지 일주일은 걸렸던 것 같은데, 저 녀석은 반나절 만에 저렇게 타네.

새삼 몸뚱이 차이가 실감 나자 한숨만 절로 나왔다.

“왜?”

“습격도 있었는데 역시 왕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길버트는 날 걱정하며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고 보니 프레시아에게는 대략적인 이유를 설명해 줬지만 길버트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음… 길버트. 지금 왕궁에는 날 죽이고 싶어 하는 녀석들로 가득하거든?”

비단 아르카나만이 아니다.

내가 왕후를 궁지로 몬 당사자였기에 왕후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날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왕은 이참에 대대적으로 귀족의 이권을 뺏어오려 할 거고, 왕궁은 지금쯤 본격적인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돌아가는 게 더 위험해. 적어도 이렇게 도피를 하는 동안에는 적들이 내 위치를 모를 테니까.”

“아… 그건 그러네요.”

내 설명에 길버트는 살짝 아쉬워했다.

내 여행이 길어질수록 병약한 동생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원래 목적지였던 휴양 도시인 질리빌입니까?”

질리빌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해양 도시로서, 휴양 도시로 유명했지만 무역 도시로도 유명했다.

기회가 되면 한 번쯤 방문할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우리는 북쪽인 바스타유로 갈 거야.”

내 말에 프레시아와 길버트의 표정이 굳었다.

“바스타유라면 제가 아는 그곳입니까?”

“맞아.”

내가 긍정하자 프레시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렸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왜 하필 그런 곳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바스타유 산맥 깊숙한 곳에 <겨울나무의 현자>의 주인공, 제이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야 그곳에 필요한 게 있기도 하고, 너랑 길버트가 단련하기 좋은 환경이잖아.”

내 대답에 길버트는 당황했다.

“바스타유는 세상의 끝, 인세의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인데요?”

나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단련하기 좋은 곳이잖아. 아, 그래도 먼저 방문할 곳이 있어서 들렀다 갈 거야. 바스타유에 가는 게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까.”

우리가 지금부터 갈 곳은 적의 손에 넘어가면 안 되는 최악의 병기가 있는 곳이었다.

아마 지금 시간대라면 아르카나의 손에 넘어가기 전일 것이다.

어떻게든 적에게 넘어가기 전에 파괴해야 한다.

* * *

늦은 아침, 노령의 사내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노인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오늘도 일어났군. 그냥 일어나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매일 아침마다 하는 말을 중얼거린 노인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힘없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인이 몸을 일으키자 백옥 같은 피부의 미녀가 쟁반에 물이 든 잔과 약을 받쳐 들고 노인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 지난밤은 평안하셨는지요?”

여성의 물음에도 노인은 대답 없이 물 잔을 들어 마시고는 약은 창밖으로 던졌다.

노인의 행동에도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을 잘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으십니다.”

마치 기계적으로 정해진 듯한 말과 행동을 하며 쟁반을 노인에게 살짝 내밀자 노인은 물 잔을 쟁반에 올려놓았다.

물 잔을 받은 여성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으며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 했다.

노인은 그녀의 손을 보고는 물었다.

“장갑은 왜 끼지 않았지? 질리안 79호.”

질리안 79호라 불린 그녀의 손가락 관절은 마치 인형처럼 마디마디가 구분되어 있었다.

“마스터의 질문, ‘장갑은 왜 끼지 않았지?’의 답변을 기록실에 검색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질리안 79호의 눈에 푸른빛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검색 완료. 현 시각 기준 5시간 53분 23초 전, 아가씨께서 장갑을 요구하셔서 드렸습니다.”

“실루아가… 그런가.”

질리안 79호의 대답에 노인은 서글픈 눈을 했다.

“실루아는 지금 어디 있지?”

“마스터의 질문, ‘실루아는 지금 어디 있지?’에 대한 답변을 검색합니다. 현재 아가씨의 거실 기준 위치 좌표는 0.05, 0.13, 0.00. 등록명 ‘뒷마당’에 있습니다.”

“뒷마당? 또 골동품과 있는 건가?”

노인의 추측에 질리안 79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 골동품 5호의 장작 나르기를 돕고 있습니다.”

“쯧! 쓸데없는 짓을.”

혀를 찬 노인은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입고 외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외투에 새겨진 마법이 발동하며 차갑게 식은 외투를 따뜻하게 덥혔다.

슬슬 봄이 오는 시기였으나 북방의 날씨는 아직 노인에게 쌀쌀했다.

“내 지팡이를.”

노인의 지시에 질리안 79호는 자신의 팔에 내장되어 있는 아공간 마법진을 가동시키며 그리 길지 않은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마스터.”

지팡이를 받아든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마스터, 부축이 필요하십니까?”

“필요 없다.”

“예, 알겠습니다.”

질리안 79호는 쟁반과 물 잔을 아공간에 넣고 기본 값인 미소를 띤 얼굴로 말없이 노인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침실을 벗어나 뒷마당으로 향했다.

뒷마당에는 장작을 패고 있는 철로 만들어진 소형 골렘 ‘골동품 5호’와 그 옆에서 장작을 나르는 하얀 머리의 작은 소녀 ‘실루아’, 그리고 처음 보는 금발의 청년이 있었다.

처음 보는 청년을 보자 노인은 놀라서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여기는 어떻게 침입했지?! 당장 실루아에게서 떨어져라!”

노인의 외침에 뒤따르던 질리안 79호는 아공간에서 도저히 사람이 휘두르지 못할 크기의 클레이모어를 꺼내 들었다.

“침입자 발견, 배제합니까? 마스터.”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은 들고 있던 장작을 내려놓고 양손을 들었다.

“항복입니다.”

청년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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