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34화 (34/214)

제34화. 거래 (2)

“오라, 천공을 비산하는 우레여! 울려 퍼져라, 만세(萬世)에 군림하는 천둥이여! 이곳에 강림하여라, 몰아치어라, 위대한 벼락의 군주여!”

내 소환 주문과 동시에 정령계와 현세가 연결되며 마법진이 찬란한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정령계에서 전신을 때리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사방으로 선명한 스파크가 튀었다.

사전에 나비에게 바람 결계를 쳐두라고 지시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지금쯤 밖에서 난리가 났을 거다.

“얌마! 뭘 소환한 거냐!”

디벳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전기에 기겁하며 책상 아래로 피신했다.

“아하하하! 저도 모릅니다.”

리즈벳의 정령서는 <겨울나무의 현자>속에서는 유실된 물건이었다.

정확히는 왕후의 궁이 불타면서 반쯤 타버린 책이었다.

때문에 이 정령서에 적힌 대로 정령을 소환하는 건 소설 속에서도 없던 일이다.

지금 나는 판타지스러운 광경에 몹시 두근거렸다.

“왕자님! 위험합니다, 제 뒤로!”

스파크가 점차 심해지자 프레시아가 정신을 차리고 내 앞을 막으며 날 보호했다.

“야, 이 미친놈아! 내 공방에서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

디벳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방전 마법 물약을 즉석에서 조제해 마셨다.

강력한 스파크가 점점 한곳으로 모이더니 작은 구체가 만들어졌다.

그러고는 그 속에서 주먹 반만 한 작은 새가 나왔다.

-삐로로로~!

가슴에 노란 반달 문양이 있는 새하얀 오목눈이처럼 생긴 번개의 정령 ‘벼락의 군주’는 앙증맞은 눈을 깜박이며 날 바라봤다.

소환하기 전에 마신 정령 감화 촉진제 덕분인지, 내 손에 들린 정령석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왕자 유안의 피에 흐르는 초대 왕후 리즈벳의 혈통 덕분인지 정령의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프레시아의 어깨를 다독이며 번개의 정령에게 다가갔다.

“왕자님!”

“괜찮아. 위험하지 않아.”

번개의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호기심, 그리고 호감이었다.

적어도 내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다.

“나와 계약하겠어?”

번개의 정령은 내 손에 들린 정령석을 빤히 바라봤다.

“하하, 이게 탐이 나는구나? 좋아, 거래하자. 나와 계약한다면 이걸 줄게.”

내 제안에 번개의 정령은 날아올라 내 어깨에 앉았다.

긍정의 의사 표시였다.

“네 이름은 ‘누니’로 하자.”

오목눈이처럼 생겼으니까 누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성의 없게 느껴졌지만 원래 이름은 외우기 편한 게 최고다.

-삐로로로!

내가 이름을 지어주자 누니와 연결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누니에게 정령석을 건넸고 누니는 한입에 정령석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디벳은 혀를 내둘렀다.

“저 작은 새가 그렇게나 흉폭한 전기를 내뿜어 댔다니. 내가 아는 정령이랑은 다르다만.”

디벳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정령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라서요.”

리즈벳의 정령서가 고어로 적혀 있어 완독하진 못했지만 정령서에 따르면 정령의 힘은 정령의 크기와 상관없는 듯했다.

사실 나비를 얻게 된 뒤로 종종 왕실 서재에 들러서 정령과 정령술에 관한 자료를 찾아봤다.

하지만 정령술사 자체가 극소수라 그런지 정보가 적었다.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왕실 서재보다는 마탑의 도서관이나 전문 연구자를 찾아야 할 듯했다.

“그나저나 이건 어쩔 거냐?”

디벳은 사방이 검게 그을린 자신의 공방과 약초들을 보며 물었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내가 은화를 꺼내자 디벳은 버럭 소리쳤다.

“부숴먹은 기구 값이랑 태워먹은 약초 값이 얼마인데! 금괴로 내놔라, 이놈아!”

쳇, 독원에 있던 시절 비밀리에 꿍쳐놓은 돈도 많으면서 쪼잔하기는.

누니는 자기 때문에 거금이 깨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 위에서 기분 좋게 울었다.

귀여우니 봐줬다.

* * *

길버트는 마른침을 삼키며 병사들이 지키는 성문을 지나 왕궁으로 들어왔다.

나는 긴장한 길버트를 보며 인사했다.

“기사 제복이 잘 어울리네, 그동안 휴가는 잘 보냈나?”

얼어붙은 듯 경직된 움직임으로 헤리온의 안내를 따라온 길버트는 내게 달려왔다.

“와, 왕자님을 뵙습니다!”

경직되고 어설픈 경례에 나는 피식 웃었다.

마치 막 전입 온 신병 보는 것 같네.

“긴장 풀어. 왕궁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정계에 발을 들인 사람이나 높은 사람을 보필하는 시종 정도가 아니라면 왕궁도 특별 할 게 없었다.

물론 높은 사람에게 크게 실수한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이제 아예 수도를 떠날 테니 실수를 하고 싶어도 실수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길버트를 내 전속 호위 기사로 등록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왕자인 나와 일반 평민인 길버트가 만나게 된 경위를 조작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무래도 내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간 건 비밀이라 공식적으로 외출 기록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정말로 왕자님이셨군요.”

길버트는 화려한 왕궁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고, 길버트와 나란히 서서 걷는 프레시아는 냉정한 시선으로 길버트를 흘겨봤다.

“그럼 왕자님께서 네게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프레시아의 차가운 말에 길버트는 당황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왕자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 왕자님께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행동하신다.”

아니, 날 믿길 바라긴 했지만 그런 광적인 믿음을 원한 건 아닌데.

내가 그렇게까지 믿음을 줄 만한 행동을 했던가?

짚이는 부분이 없는데.

“길버트, 프레시아의 말은 흘려들어. 그나저나 동생은 좀 어때?”

내 물음에 길버트는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왕자님 덕분에 가벼운 산책도 가능할 정도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아이가 산책도 할 정도면 정말로 좋아진 모양이다.

하기야, 디벳과 아라드리네가 붙어서 치료하는 중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거 다행이네. 당분간 동생과 떨어져 지낼 텐데 괜찮겠냐?”

“디비부 할아버지도 계시고, 제가 없는 동안 리네 할머니께서 돌봐 주시기로 했습니다. 네드리안 씨와도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요.”

“그럼 문제없겠군. 이제 출발하러 가자.”

나는 목에 걸은 성녀의 로사리오를 매만지며 웃었다.

어젯밤에 성당에 몰래 침입해서 대지의 여신상에 잠들어 있던 것을 빼내 왔다.

원래라면 빼자마자 석상을 지탱하는 부분이 빠져서 무너져 내렸어야 했지만, 아퀼라의 마도서에서 일시적으로 로사리오를 마정석으로 대체 할 방법을 찾아냈다.

마도서에 따르면 로사리오는 성당 밑에 있는 비밀 피난소를 지키는 마법진의 핵이었고 그 마법진을 설치한 것은 아퀼라였다고 한다.

물론 마정석은 로사리오 같은 힘이 없어서 끽해야 내일이면 힘이 빠지겠지만 그때는 이미 내가 없을 테니 내가 의심받는 일은 없을 터였다.

내가 프레시아와 길버트를 데리고 ‘휴양지’까지 타고 갈 왕실 마차로 향하는데 헤리온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헤리온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괜찮아. 나 혼자만 가는 것도 아니고, 네가 없으면 별궁은 누가 지키라고?”

“그건 그렇지만….”

헤리온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게 정확한 계획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이번 여행이 그리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쯤은 일러두었다.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만 왕궁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헤리온은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겨울나무의 현자> 속에서 짧게 제이드가 수도에서 활동할 때 등장한 조력자 엑스트라였다.

비록 왕궁을 무대로 한 전투에서 프레시아를 구하고 죽게 되지만, 그가 죽으면서 한 독백으로 왕자 유안에 대한, 정확히는 유안의 친모에 대한 충성심을 알 수 있었다.

‘아아… 부디… 파라멜라 님의, 유안 왕자님의 복수를… 부탁….’

그저 문장으로 읽은 대사였으나 순간 피 흘리는 헤리온이 지금의 그와 겹쳐 보였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헤리온의 의아한 표정에 나는 싱긋 웃었다.

“아니, 내가 없는 동안 건강하라고.”

“별말씀을.”

나는 인사를 하는 헤리온을 두고 프레시아와 길버트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내가 올라탄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기사와 스무 명의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을 출발했다.

나름 왕자가 출궁(出宮)하는 것임에도 날 배웅하는 것은 내 전속 시종 헤리온이 전부라는 게 지금의 내 처지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나는 창가에 팔을 대며 창밖으로 보이는 심궁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프레시아, 저기 인사한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심궁 쪽을 바라봤다.

왕의 집무실과 연결된 테라스에서 호레이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호레이즌은 딸같이 생각하는 프레시아의 마중을 나오고 싶었겠지만, 자칫 날 지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어서 멀리서 배웅을 하는 모양이었다.

입단속이 가능한 연무장에서의 행동과 불특정 다수가 돌아다니는 곳에 오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프레시아는 미소 지으며 자신의 스승에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겠지만 호레이즌이라면 충분히 입모양을 읽을 수 있을 터였다.

나를 태운 마차는 왕궁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 * *

왕은 눈시울을 붉히며 손을 흔드는 호레이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도 유별나군.”

“제가 유별난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냉혈한이신 겁니다.”

호레이즌은 왕과 둘만 있자 툴툴 거리며 편하게 말했다.

왕은 그의 태도가 익숙한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걱정할 녀석이어야 걱정하지.”

최근 들어 만난 것은 딱 두 번 뿐이었지만 왕은 유안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왕이 본 자신의 첫째 아들은 자신을 뛰어넘을 능구렁이였다.

그런 능구렁이가 안전책도 마련하지 않고 모험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동질감이 들었기에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왕은 호레이즌을 따라 창밖을 보며 웃었다.

“다시 만날 때가 기대되는군.”

다시 돌아온 유안은 무엇을 이루었을까?

충직한 시종과 호위 기사 하나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던 처지로 왕후를 유폐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떠났으니 빈손으로 돌아올 리는 없었다.

왕은 그때가 되면 비워둔 왕세자 자리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성문을 나서는 마차를 바라봤다.

* * *

수도를 벗어난 지 하루 하고도 한나절 정도 지났다.

지난밤에는 수도와 가까운 도시의 영주성에서 머물렀다.

수도 근방에 위치한 영지라 자작인 영주는 중앙 정계와 연줄이 닿아 있어 꽤나 위세가 높았다.

덕분에 꽤나 융성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별 볼 일 없는 처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의 권유로 떠난 사람이다.

날 푸대접했다가는 왕의 눈 밖에 날 위험이 있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늦은 아침 자작의 영주성을 떠난 지금은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서고 병사들은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인가.”

내 혼잣말에 길버트는 순진한 눈으로 날 보며 물었다.

“뭐가 슬슬인가요?”

나는 길버트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길버트, 아무리 내가 뒷배가 없다지만 왕자인데 내 호위의 숫자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호위는 기사가 다섯, 병사가 스물이다.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모를까 왕자의 호위치고는 너무 적은 숫자였다.

아마 왕후 소생의 2왕자였다면 못해도 기사는 스물, 병사는 쉰 정도가 따라왔을 거다.

시종들은 한눈에 숫자를 셀 수도 없을 거고.

다른 후궁 소생의 왕자나 공주의 경우에도 최소한 지금 내 호위의 배는 많았을 터다.

“어… 이 숫자가 적은 건가요?”

세상 물정 모르는 길버트는 이게 적은 건지 아닌 건지도 구분을 못 했다.

“적은 거야. 내 암살 미수 사건이 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왜 적다고 생각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길버트의 대답에 나는 싱긋 웃었다. 일단 생각하는 법은 천천히 가르치기로 하고 정답을 알려줬다.

“정답은 저들이 죽어도 괜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야.”

지금 내 호위와 시종들은 왕후에게 연줄을 댄 사람들이었다.

특히 기사들은 꽤나 정치적으로 깊게 엮여 있었다.

그때 프레시아가 검을 뽑으며 경고했다.

“적입니다. 숫자는 스물, 그중 마법사는 셋으로 보입니다.”

경고가 있은 후 몇 분 뒤 화살 비가 쏟아지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적습이다! 모두 전투 준비!”

그 비명 소리에 나는 싱긋 웃었다.

“봐, 슬슬이라고 했잖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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