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거래 (1)
“아르카나. 그 집단의 이름이 그런 이름이었나.”
왕은 차가운 눈으로 날 훑었다.
아마 내가 숨기고 있는 정보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고 있는 중일 거다.
“훌륭하군. 언제부터 발톱을 숨기고 있던 거지?”
대외적으로 왕자 유안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순박한 소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내 행동은 세간에 알려진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딱히 숨긴 적은 없습니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요.”
내 대답에 왕은 흥미로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아무리 모든 이들의 관심 밖의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과인은 물론 왕후의 시선까지 피해 정보망을 구축해 둔 것인가? 대단하구나.”
말로는 칭찬했지만 그의 시선에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나도 왕후가 손을 잡은 것처럼 적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가 왕과 왕후의 눈을 피해 정보망을 구축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오히려 의심하지 않는다면 왕으로서 자격이 없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단 별것 없습니다.”
나와 왕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 정보망을 과인에게 넘길 생각은 있느냐?”
“제 생명줄입니다만?”
나는 딱히 왕의 의심을 풀고자 하지 않았다. 여기서 바로 왕의 의심을 푸는 건 불가능했다.
원래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만 말로 해명하는 것은 수백 가지 증거를 가지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은 지금 확신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한 행동으로 왕후의 파벌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고작 힘없는 왕자에게 왕의 신뢰를 얻게 할 버림패로 사용하기에는 왕후라는 자리는 너무 유용한 자리였다.
나와 신경전을 벌이던 왕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 이곳까지 부른 본론을 말했다.
“널 이렇게 부른 이유는 상을 내리기 위함이다. 소원이 있다면 말해보거라.”
내가 한 일은 대외적으로 공을 치하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비밀리에 부른 것이었다.
그럴 줄 알고 나는 주머니에서 준비해 뒀던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 건넸다.
“여기 적혀 있는 것들 좀 구해 주십시오.”
종이쪽지를 받아든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저번 식사 때처럼 겸양은 안 떠는 게냐?”
“보는 시선도 없지 않습니까. 피차 시간 낭비를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푸핫! 그래, 피차 시간은 중요하지. 그나저나 바라는 것도 많구나.”
내가 쪽지에 적어둔 것들은 비싸기도 비싸지만,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왕실이 아니라면 구하기 힘든 귀한 약재나 마법 재료들이었다.
구할 수 있는 위치를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한 거냐?”
“이 허약한 몸뚱이를 지키는 데 사용할 겁니다. 아, 다른 건 몰라도 정령석은 꼭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리즈벳의 정령술을 익히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정령석이 필요했다.
시조의 유산도, 아퀼라의 마력회로도 당장 써먹지 못하니 내가 당장 익힐 수 있는 수단은 정령술뿐이었다.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꽤나 뻔뻔하구나.”
왕의 말에 나는 소매를 걷어 푸르스름한 멍이 든 팔을 내보였다.
“그 정도 고생은 했다 생각합니다.”
내가 당당히 요구하자 왕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상선이 조금 고생하겠지만 이틀 뒤까지 구해주겠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럼 소원은 이게 다인가?”
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원‘은’ 다입니다.”
“소원은? 그럼 다른 게 남아 있느냐?”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소원이라기보다는 서로 주고받는 ‘거래’에 가까우니까요.”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왕을 바라봤다.
이제 수도에서 볼일은 다 봤다.
여기 있어봤자 제대로 끼어들지도 못할 지루한 정치 싸움을 관전할 뿐이니, 보다 더 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쓸 생각이었다.
* * *
왕자 유안을 보낸 왕은 정원에 서서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봤다.
“녀석이 제안한 거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왕의 물음에 상선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유안 왕자가 너무 무모한 일을 벌였다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정말 녀석의 말대로 된다면 녀석은 내 신뢰를 얻는다. 적어도 적은 아니라는 신뢰를 말이다. 그건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
그것은 신뢰라 말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복마전(伏魔殿)이나 다름없는 왕궁에서 왕과 적이 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재미있게 되었어.”
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말로 즐거운 듯 웃었다.
* * *
왕자 유안을 학대한 혐의로 왕후가 유폐된 지 보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왕궁은 그야말로 정쟁의 폭풍으로 인해 대부분의 이들이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암~! 이제 승마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네.”
그런 와중에 나는 한가롭게 하품을 했다.
지금 난 황금사자 기사단의 승마장에서 호레이즌에게 말 타기를 배우고 있었다.
“왕자님께서는 많이 한가로워 보이시는군요.”
호레이즌의 말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태풍의 눈은 고요한 법입니다.”
사건의 당사자인 나는 명백한 피해자라는 입장을 고수한 끝에 간단한 조사를 끝으로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왕의 파벌은 왕후를 공격하기 바빴고, 왕후의 파벌에게 나는 괜히 건드려봤자 적에게 빌미만 제공하는 성가신 말벌집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왕자님의 호위 기사와 전속 시종은 덕분에 꽤나 바쁜 모양입니다만.”
프레시아가 아니라 호레이즌이 내게 승마를 가르쳐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학대 사건에 대한 조사로 프레시아가 이곳저곳에 불려 다녔기 때문이다.
“뭐, 이제 곧 끝날 겁니다. 전하와의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호레이즌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왕자님의 예상대로 흐른다면 상당히 위험할 겁니다.”
보름 전, 나는 왕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했다.
거래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다시 한번 왕후의 파벌을 끌어내릴 미끼가 되어줄 테니 그 대가로 내게 작은 땅을 하나 하사해 달라는 거래였다.
내가 요구한 땅은 별것 없는 시골 산골짜기였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모르는 미스릴 광맥이 잠들어 있었다.
비밀리에 개발하려면 수고가 많이 들겠지만 나중을 위한 투자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
아마 왕은 내 요구가 명목상에 불과하고 자신의 신뢰를 얻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말이다.
고작 왕의 신뢰 따위보다는 역시 미스릴 광맥이 최고지!
나는 속내를 숨긴 채 자연스럽게 말했다.
“호레이즌 경은 이상한 말을 하는 군요. 이미 제 목숨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궁 안으로 암살자까지 들어온 마당에 고작해야 약간의 모험을 하는 것 정도야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죠.”
내 말에 호레이즌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런 호레이즌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보다 전에 제가 한 말 기억하십니까?”
“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전하께 마시는 물조차 조심하라는 말. 그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왕후가 힘을 쓰지 못하게 막긴 했지만 왕이 독살당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왕후라는 패를 사용하기 힘들어졌으니 다른 수를 사용해 올 게 분명했다.
솔직히 왕이 죽든 말든 감정적으로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내가 없는 사이 왕이 쓰러지면 적을 견제할 수 없어 곤란해진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헤리온을 찾으세요.”
내 속삭임에 호레이즌은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제 말을 기억하세요, 호레이즌 경.”
나는 싱긋 웃으며 고삐를 쥐고 앞서 달렸다.
* * *
“좋아 보입니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솥단지 속 내용물을 휘젓는 디벳을 보며 웃자 디벳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이게 좋아 보이냐?”
디벳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전신은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
오늘따라 수전증이 더욱 심한 듯 팔을 덜덜 떨었다.
“그럼 마약 끊고 치료하는 게 안 좋아 보이겠습니까?”
지금 디벳이 골골거리는 이유는 금단 증세 때문이었다.
전신에 감은 붕대는 가려움증과 환통(幻痛)을 억제하기 위한 진통 연고를 고정시키기 위해서인지 디벳의 전신에서 독한 약 냄새가 풍겼다.
“역시 손녀가 좋아요. 제가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더니, 이렇게 치료를 시작한 걸 보면 말입니다.”
<겨울나무의 현자> 속에서는 치료를 보조해 줄 사람도 없이 홀로 인내하며 치료하던 탓에 종종 다시 마약에 손을 댔다는 묘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녀라는 정신적 버팀목에 아라드리네라는 전속 치료사까지 붙으니 디벳의 치료는 소설 속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이었다.
“시끄럽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넌 할 일도 없냐? 왜 맨날 쳐들어와서 노가리를 까고 있어?”
디벳의 짜증 섞인 푸념에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에이, 이렇게 찾아오면 좋으면서 내숭은.”
나는 왕후가 유폐된 이후로 매일같이 디벳을 찾아왔다.
“좋기는 개뿔이, 맨날 일거리나 던져주는 놈이 오는 게 뭐가 좋다고.”
디벳이 만들어 줘야 할 게 산더미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당장 필요한 것만 해도 몬스터 퇴치약, 상처 치료약, 마력 회복약, 방한 마법 물약 등등 셀 수도 없다.
“시간 있을 때 미리 준비해 둬야죠. 당분간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할 테니까요.”
내일이 되면 수도를 떠난다.
왕후에게 학대당하며 심신이 피폐해진 나를 위하여 왕이 직접 휴양지에서 요양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말이다.
내 말에 디벳은 후련하다고 말하면서도 섭섭해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내가 악동같이 미소 짓자 디벳은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어흠! 오랜만에 온 네 호위는 왜 얼이 빠져 있냐?”
프레시아는 날 호위하겠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연일 고강도의 조사를 받느라 짬이 나질 않았다.
나야 왕의 비호 아래 간단한 조사로 끝났지만 언제나 내게 붙어 있었던 프레시아는 왕후의 학대 혐의를 입증할 중요 참고인이었기에 조사관이 가만히 두질 않았다.
그것도 어제로 마지막이라 오늘부터 자유의 몸이 된 프레시아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왕실파는 최대한 왕후의 학대를 입증하기 위해 물고 늘어지고, 귀족파는 반대로 별것 아닌 일로 몰아가기 위해 물고 늘어지니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쉬면 나아질 겁니다.”
“그러냐. 그런데 아까부터 정신 사납게 뭘 그렇게 만지작거리는 거냐?”
디벳의 물음에 나는 만지던 것들을 흔들며 대답했다.
“상단에 특수 주문 제작한 석궁(石弓)입니다. 오늘 받아 와서 이상이 없는지 확인 중이거든요.”
“그건 보면 안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석궁에 매단 검은 막대기가 뭐냐고?”
디벳이 가리킨 부분은 고무 재질의 속이 뚫려 있는 단단한 관이었다.
“아, 이거요? 굳이 말하자면 총구라고 해야 할까요?”
마법으로 내구성을 높인 고무관을 단 석궁의 모습은 약간이지만 소총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제 역할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그때 디벳의 솥단지에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완성했다. 네가 주문한 정령 감화 촉진제다. 정령을 연구하는 마법사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구하고 싶어 할 약이지.”
“역시 영감님이라니까.”
“헹! 칭찬해 봤자 나올 건 없다!”
디벳은 투덜거리며 마법으로 물약을 식혔다.
“지금 정령 계약을 맺는 게냐?”
디벳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즈벳의 정령서를 펼쳤다. 그리고는 정령서에 적힌 대로 아바스엘의 각인 펜으로 바닥에 정령 소환진을 그렸다.
“어떤 정령과 계약을 맺을 거지?”
“당연히 새로 장만한 석궁을 제대로 쓰기 위한 정령이죠.”
나는 정령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새로 계약하기 위한 정령을 소환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