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발 없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 (7)
날 마주한 왕후의 눈에는 어리석은 나를 향한 조소가 담겨져 있었다.
확실히 내가 왕후를 만나러 온 것은 정치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기껏 왕후를 몰아세웠는데 무슨 짓이냐며 왕이 역정을 낼 것이 눈에 훤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알 바인가?
나는 왕의 장기말이 아니다.
왕후의 궁녀들이 물러나고 왕후와 둘만 남자 나는 궁중 예법에 맞춰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후마마.”
내 인사에 왕후는 특유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죽이며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자리에 앉으렴.”
나는 왕후의 권유에 왕후의 정면 자리에 앉았다.
내 행동에 왕후의 미간이 움찔했다.
주인의 정면 자리는 주인과 동등하거나 그에 준하는 이에게 내어주는 자리였다.
내가 이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일개 왕자가 왕후와 맞먹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안, 네가 이런 접객실에 처음 와서 모르는 모양인데….”
“이 자리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앉는 거지요.”
내가 왕후의 말을 자르며 뻔뻔하게 말을 하자 왕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지금 그걸 알면서도….”
“네, 앉아 있는 거지요.”
내가 다시 한번 말을 자르자 왕후는 소리쳤다.
“네가! 감히…!”
새빨개진 얼굴로 분노를 표출하려던 왕후는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스스로에게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다.
역시 여우 같은 정치꾼이군.
지금 내 행동은 충분히 화를 내도 좋은 행동이었다.
더욱이 내 행동을 근거로 지금의 정치적 공세를 막을 수도 있었다.
내 행동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네가 감히 전하를 믿고 날 능멸하려는 것이냐?”
유약하기 짝이 없는 왕자 유안이 왕후에게 이도록 무례한 행동을 한다?
이 자리에는 우리 둘만 있는데 어떻게 내 행동을 증명할 거지?
내 유약한 이미지는 뿌리가 깊다.
이제 와서 내 행동을 외부로 알려봤자 되지도 않는 수를 쓴다며 역풍을 맞을 뿐이다.
왕후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저를 믿기에 이리 나서는 거랍니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내 대답에 왕후는 이를 갈며 협박할 뿐, 내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순 없었다.
예산 집행 등의 권한은 일시적이나마 왕에게 빼앗겼고, 폭력은 사용해 봤자 왕후의 직위만 위태로워질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갈아둔 ‘소문’이란 이름의 비수를 꺼냈다.
“예, 물론이지요. 오늘 이곳을 나가면 당신이 저를 학대했다 이야기할 것입니다.”
“…뭐라고?”
내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왕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증거는 있느냐? 그저 말뿐이라면 나도 반박할 말은 충분….”
그녀의 말에 나는 천천히 윗옷을 벗어 보였다.
내 몸에는 정말로 오랜 시간 학대라도 받아온 것처럼 푸르스름한 멍 자국과 일어난 핏줄로 얼룩져 있었다.
지금 내가 왕후에게 학대를 받아왔노라 통곡한다면 누가 왕후의 말을 믿을 것인가?
왕후의 측근들도, 심지어 가족들도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박또박한 말로 왕후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자, 이제 증거는 차고 넘치지요?”
내 몸을 본 왕후는 덜덜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스, 스스로 자해를 한 것이냐? 나, 나를 공격하기 위해…?”
왕후의 물음에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상처들은 모두 왕후마마께옵소서 하신 일이 아니십니까?”
사실은 아퀼라의 마력 회로를 꾸준히 개발한 결과였다.
전신으로 마력회로가 뻗어나가며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온몸을 지지는 듯한 고통에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재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망할 몸뚱이 같으니라고.
“워, 원하는 딸꾹! 원하는 게 뭐냐!”
왕후의 물음에 나는 벗은 옷을 구기고 찢으며 대답했다.
“뭐, 원하는 걸 요구할까 했는데 더 큰 걸 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슬슬 창밖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나는 소파를 발로 차 넘어트리는 동시에 바닥에 누웠다.
“무슨…?”
왕후가 내 행동에 당황하는 중에 갑자기 접객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 갑작스럽게 열고 들어오자 왕후는 화를 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저, 전하…!”
접객실 안으로 들어 온 것은 기사들을 이끌고 온 왕이었기 때문이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왕후.”
“아! 아닙니다!”
왕후는 그렇게 외쳤으나 지금 광경을 본 이들은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기사들 사이사이에 있던 왕후의 심복들조차 불신의 눈으로 왕후를 바라보았다.
“흑… 흑흑…!”
나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애처로이 눈물을 흘렸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내 울음소리만 울리자 왕은 싸늘한 눈으로 왕후를 바라보았다.
“호레이즌 경, 왕후를 포박하여 심궁 귀빈실에 유폐하여라.”
“전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호레이즌은 왕후의 팔을 잡고 형식상 밧줄로 묶었다.
“아, 아니야! 아닙니다! 전하! 저는 억울합니다!”
왕후의 외침에도 왕은 들리지 않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왕후의 죄는 면밀히 조사한 후에 처결하겠다. 그 전까지는 그 누구도 왕후와 접견하지 말라. 이를 어길 시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그 후 왕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내게 덮어주며 끌어안는 정치적 퍼포먼스까지 보여줬다.
“과인이 부족한 탓에 널 이리 힘들게 하였구나. 미안하다.”
귓가에 들리는 심장 박동에는 전혀 동요가 없다.
연기군. 그럼 나도 연기로 응대해야지.
“…아, 아닙니다. 소자가 미약하여…. 흐윽!”
“고생하였다. 편히 쉬거라.”
“예, 아바마마.”
왕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부자지간의 아름다운 정을 나누는 미소였지만 그 아래로 나와 왕 사이에 여러 시선이 오고 갔다.
* * *
별궁으로 돌아온 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누웠다.
“에고고! 힘들었다.”
“왕자님!”
누워서 휴식 좀 취하려는데 프레시아가 울먹이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그동안 학대를 당해 오셨다니…! 저는, 저는…!”
눈물을 흘리며 날 끌어안는 프레시아의 힘에 나는 허리가 뒤로 꺾였다.
“꾸엑!”
“앗! 왕자님!”
아퀼라의 마력회로 탓에 겪은 부상보다 프레시아의 허리 꺾기가 더 치명적이었다. 죽을 뻔했네.
나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프레시아에게 말했다.
“아이고, 허리야. 프레시아, 정신 차려. 네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데 왕후가 언제 날 학대하는데?”
“어…?”
내가 다쳤다는 데 정신이 팔려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지 프레시아는 당황했다.
“이참에 프레시아, 헤리온, 둘 다 주의해 둬. 나는 종종 왕후에게 불려가 학대를 당한 거야. 조사관이 너희 둘을 조사하면 입을 맞춰야 하니까 잘 듣고 외워.”
나는 프레시아와 헤리온을 불러 세워서 정확한 일자와 시간, 장소 등을 설명하며 암기시켰다.
날 따르는 사람이 많다면 모를까, 두 사람만 주의를 시키면 되니 얄팍한 인간관계가 이럴 때 도움이 되네.
계속 머리에 박아 넣듯이 암기를 시키는데 창가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냐옹~!
“아, 나비 왔어?”
나비는 등 뒤에 자기 몸집보다 큰 책 한 권을 끌고 왔다.
‘리즈벳의 정령서’, 왕후궁에 있는 왕궁에 숨겨진 비밀 중 하나였다.
“잘했어! 나비야! 아궁! 귀여운 녀석!”
왕이 들이닥쳐 소란스러운 와중에 나는 나비를 시켜 정령서를 가져오게 시켰다.
이걸로 제대로 정령술을 익힐 수 있겠다.
“이 고양이는 뭡니까?”
헤리온은 나비를 처음 보는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아, 내 친구. 비밀로 해줘.”
내 미소에 헤리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갯짓하자 헤리온이 나가 봤고, 별궁 시종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헤리온은 왕의 직인이 찍힌 편지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방금 상전(尙傳)이 찾아와 전하의 편지를 전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
나는 바로 편지를 뜯어 읽었다.
왕의 편지에는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짧게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오전 1시, 심궁(深宮) 7문에 오거라.’
한마디로 만나자는 말이었다.
* * *
자정이 지난 새벽 1시에 가까워질 무렵.
나는 일이 많은 헤리온은 두고 프레시아와 단둘이 왕이 오라고 한 곳으로 향했다.
주로 짐꾼들이 드나드는 문인 7문은 지금 시간대가 되니 인적이 드물다 못해 경비병조차 없었다.
아니, 아무리 사람이 없는 곳이라지만 경비병까지 없는 건 이상했다.
“일찍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자 저하.”
왕의 최측근인 상선이 문을 열고 내게 인사를 했다.
과연, 비밀리에 만나자는 거군.
굳이 이렇게 몰래 만나자는 건 생각보다 은밀한 이야기를 할 모양인가 보다.
“늦은 시간에 고생이 많습니다, 상선.”
내가 인사를 받자 상선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안내했다.
“전하께옵소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선이 안내한 곳은 심궁 뒤뜰에 있는 작은 정원이었다.
정원에는 왕과 호레이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상선이 왕에게 다가가 내 방문을 알리자 왕은 날 보며 오라고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바마마.”
몇 시간 전 왕후의 궁에서 봤던 따뜻함을 가장했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내 인사에 차갑고 냉철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네가 호레이즌 경을 통해 왕후궁에 가기 전 보내두었던 편지는 잘 받았다. 고생했다. 네게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았는데 큰일을 해줬구나.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지 몰랐는데 꾸준히 자해까지 해왔을 줄이야.”
내 몸의 상처는 그날 바로 꾸며서 될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의학에 정통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실제로도 며칠에 걸쳐 꾸준히 마력회로를 개발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별것 아닙니다. 왕후가 먼저 선을 넘었기에 대처했을 뿐입니다.”
내 말에 왕은 흥미로운 듯 바라봤다.
“선을 넘었다라, 왕후가 무슨 선을 넘었지?”
“근래 들어 선을 넘은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말은 네게 암살자를 보낸 게 왕후란 말이더냐?”
“정확히 말하자면 왕후는 길을 열어줬을 뿐이죠.”
왕이 날 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왕후가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있느냐?”
“물론 없습니다. 증거가 있었다면 굳이 이런 번잡한 방법을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바마마께 증거를 드리면 직접 처리하셨을 테니 말입니다.”
내 대답에 왕은 잠시 침묵했다. 머리 굴리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왕후의 위세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왕후의 자리는 여전히 유지되겠지.”
원래라면 탄핵되어 폐서인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중죄였다.
“알고 있습니다. 왕세자도 아니고, 뒷배도 없는 1왕자를 학대한 것 가지고 왕후의 세력이 폐서인이 되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왕후의 오라비인 후작과 귀족파가, 왕후와 손을 잡은 암중세력이 그렇게 두지 않을 터였다.
비록 왕후의 자리가 유지된다 하여도 이전 같은 권세는 결코 부리지 못하고, 자유도 반쯤 박탈되어 감시당할 테지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커다란 희생을 감수해야겠지만 왕후라는 직위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왕이 암중세력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면 갈아 치웠겠지만 눈치챈 이상 그들의 수작에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너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아무것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왕은 손을 들어 상선과 호레이즌을 멀리 물렸다.
저 인간을 한참 벗어난 괴물이 고작 조금 떨어졌다고 안 들릴 리가 없을 텐데.
왕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이건 양보와 호의의 제스처로 받아들이면 될 듯했다.
나도 프레시아에게 고갯짓하며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바른대로 고하거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아마 전하께서 아시는 것보다는 적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지닌 바가 적은지라 말입니다.”
거짓말이다. 나는 왕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그래도 말해보거라. 왕후와 손잡은 암중세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호레이즌 경을 통해 내게 마시는 물조차 조심하라 경고한 것은 비단 왕후가 소문에 낚여 널 부를 때 내가 언제든 네 말에 귀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터.”
역시 정치에 빠삭한 능구렁이다. 내가 그 말을 한 의도까지 눈치챘나.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왕후와 손잡은 조직의 이름 정도입니다.”
“이름이라.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왕의 물음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르카나(Arcana:비밀).”
세상과 운명을 지배하려는 미치광이들의 집단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