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발 없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 (6)
담배 가게를 나온 프레시아는 뒤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이렇게 나와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적어도 대화를 할 준비는 됐으니 우리는 충분히 할 만큼 한 거지.”
디벳이나 아라드리네나, 누가 동문 아니랄까 봐 완고하고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면이 있었다.
그럴 때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오히려 우리가 있으면 영감님한테 안 좋을 거야.”
내가 남아 큐어드 마스터를 구슬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디벳을 위해서였다.
디벳의 상처는 우리같이 오래 알고 지내지 못한 사람이 끼어들 만큼 가볍지 않다.
원래 마음의 상처는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람에게 치유받는 법이다.
“그럼 저희는 왕궁으로 돌아가나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니, 시간도 꽤 남았으니 잠깐 네슬릭 상단 좀 방문하자.”
네슬릭 상단은 5대 상단 중 하나로, 120년 전 어음의 절반은 네슬릭 상단의 것이었다.
“상단이요?”
“그래, 떠나기에 앞서 살 게 있거든.”
슬슬 수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다 얻었다.
* * *
유안과 프레시아가 나가자 아라드리네는 머뭇거리며 디벳에게 물었다.
“정말… 디벳이야?”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에 디벳은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나다.”
고개를 숙이자 마약 후유증으로 덜덜 떨리는 손이 보였다.
자신의 손을 본 디벳은 스스로가 너무 한심스럽고 비참해서 뭐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유안이 장난스럽게 한, 손녀에게 부끄럽지 않게 마약을 끊고 치료를 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무시했던 게 떠올라 부끄러움을 느꼈다.
“디벳이라면 대답할 수 있을 거다. 나와 네가 열여덟 살 여름에 계곡에서 캔 약초의 이름이 뭐지?”
“열여덟 살 때는 약초가 아니라 캔스라는 물고기를 잡으러 갔었다. 비늘이 약재가 되는 물고기였지.”
“맞아, 그랬지. 그럼 스무 살 때….”
수차례 문답을 주고받으며 그들만의 추억을 확인한 아라드리네는 눈앞의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자신의 동문이자, 라이벌이었으며, 첫사랑이었던 디벳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무사했구나, 디벳.”
“너야말로 무사했구나, 리네.”
회한 섞인 눈빛을 교환한 두 노인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던 땅에서 쫓겨나 그들의 가족이라 여겼던 이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삶은 그 누구보다 처절했고, 한스러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던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네드리안 덕분이었다.
디벳은 죽음을 확인하지 못한 손녀를 찾기 위해, 아라드리네는 네드리안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네드리안을 구해줬다고 들었다. 정말… 정말 고맙다.”
디벳이 눈물을 보이며 감사 인사를 하자, 아라드리네의 뒤에 숨어 있던 네드리안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드리안이 디벳과 헤어진 건 불과 여섯 살 때였다. 때문에 네드리안에게 있어서 가족은 아라드리네뿐이었다.
네드리안의 머뭇거림을 본 디벳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렴, 이제 와서 가족 행세를 하진 않을 테니. 그저 네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난 충분하단다.”
디벳의 말에 네드리안은 오히려 당황했고, 아라드리네는 역정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혈연은 끊는다고 끊기는 게 아니야! 그러니 천륜이라 불리는 것이고! 사이가 어색한 거야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되는 거다!”
아라드리네의 호통에 디벳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내가 곁에 있는 것으로 위험하다면 끊는 게 옳다.”
디벳의 말에 아라드리네는 충격을 받으며 소리쳤다.
“무슨 약한 소리냐! 위험한 걸로 따졌으면 네드리안은 나와 함께 있는 것도 위험해! 내가 아는 디벳이라면 당당히 지켜낼 거라 호언장담했을 거다!”
“리네, 나는 늙었어. 이제 자신이 없다. 이 손을 봐라. 이런 형편없는 손으로 누굴 살리고, 또 누굴 지키란 말이냐! 난 얼마 전 환자의 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둘 뻔했다! 지금의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냐!”
좌절에 빠진 그의 모습에 아라드리네는 그 누구보다 충격을 받았다.
왜소해진 노인에게선 젊은 날의 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라드리네는 그가 연기처럼 사라질 것처럼 느껴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너와 함께 온 소년은! 네가 필요하다고 했다! 널 죽이면 날 죽이겠다고까지 말했다고!”
“…!”
“그리고 도움이 안 된다니,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말라고. 네드리안에게도, 내게도 넌 필요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머뭇거리는 디벳을 보며 네드리안은 각오를 다진 듯 아라드리네의 뒤에서 나왔다.
“…할아버지. 솔직히 할아버지가 어색해요. 어렸을 때 기억은 거의 없거든요.”
네드리안의 말에 디벳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함께 살 때도 그리 친근한 할아버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제 할아버지인 거죠? 할머니께 할아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성격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저를,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셨다고.”
네드리안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디벳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다시 천천히 알아가요. 당장은 바로 가족이 되지 못하더라도 시간을 들여서 잃어버린 걸 되찾으면 되는 거예요.”
“네드리안….”
디벳은 자신의 손녀의 말에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극심한 공포감이 들었다.
그동안 자신의 삶을 지탱해 왔을 정도로 소중했기에, 또다시 자신 때문에 모든 걸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때문에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는 너무나 무섭구나. 널 다시 잃는다면 견딜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천천히… 네 말대로 천천히 하자꾸나.”
하지만 디벳은 공포에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손이 너무나 따스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아리드리네는 디벳에게 물었다.
“너와 함께 왔었던 소년은 누구지? 스스로 왕족이라고 밝히던데.”
그녀의 물음에 디벳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모른다. 가늠할 수 없는 정보력과 무시할 수 없는 재력을 가졌고, 왕실 기사 신분패를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걸로 보았을 때, 스스로 이 나라의 1왕자라고 주장하는 게 신빙성이 없진 않아 보인다.”
디벳의 말에 아라드리네는 오히려 의아해했다.
“1왕자? 1왕자라면 그렇게 상황이 좋은 사람이 아닐 텐데.”
1왕자가 뒷배가 되어줄 세력이 없고, 현 왕후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건 정계에 어느 정도 연줄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날 죽이겠노라 말할 때의 그 눈은 나이에 맞지 않게 소름 끼치도록 감정이 담기지 않았었어. 마치 마음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아라드리네는 유안의 눈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 * *
“읏차!”
나는 환풍 통로를 통해 다시 별궁에 있는 내 방으로 돌아와 기지개를 켰다.
창밖은 아직 하늘이 푸르른 게, 저녁까지는 시간이 꽤 남은 듯했다.
왕궁으로 돌아오기 전 가면을 쓰고 네슬릭 상단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의뢰해 놨다.
왕국을 넘어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상단이라고 해도 일개 지부에 모든 물건을 구비해 두지는 않는다.
당연히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의뢰를 하고 정해진 일시에 받으러 가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부티크에서 빼돌린 물건들도 팔아버려 정리하고 싶었지만, 부티크의 물건들이 풀리면 추적이 들어올 위험이 있었기에 정리만 해두고 다른 곳에서 팔기로 했다.
“뭔가 아쉬워 보이시는데 목표하신 바를 다 이루시지는 못하셨나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하하하, 티 나?”
“에헴! 그래도 제가 왕자님을 몇 년이나 모셨는데요!”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자랑스러워하며 으스댔다.
속 내용물은 바뀌었다만.
“뭐, 그래도 1차적인 목표는 다 끝냈어.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내가 굳이 다른 상단이 아닌 네슬릭 상단에 방문한 이유는 훗날 네슬릭 상단을 집어삼키는 상단주의 사생아가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내용이 못해도 3년 뒤의 이야기라 그런지 지금은 수도 지부에서 일하고 있지 않았다.
야드같이 예기치 못한 인연이 생기는가 하면 네슬릭의 사생아처럼 의도했음에도 연이 닿지 못하기도 했다.
지금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 그때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나.
내가 침실에서 나가자 거실에서 초조한 얼굴을 하던 내 늙은 시종이 날 반겼다.
“왕자님! 돌아오셨습니까.”
“무슨 일 있었어?”
내 물음에 헤리온은 머뭇거리다가 내게 편지 하나를 건넸다.
“오늘 오후 2시 무렵, 갑자기 왕후마마의 심복이 찾아와 막무가내로 왕자님의 알현을 청해 왔었습니다.”
“오, 그래?”
드디어 왕후, 그 여우가 내 미끼를 물었군.
호레이즌이 내 말대로 입단속을 하지 않아 준 모양이다.
2왕자의 폭행은 그동안 입증되지 않은 뜬소문 수준으로 끝나는 게 아닌 확실한 정치적 명분이 되기 좋았다.
한창 왕과 왕후의 대립이 심화되기 시작한 지금 시점에선 자칫 잘못했다가는 심장을 관통하는 비수가 될 수도 있는 수였다.
“억지로 안에 들이닥치려는 걸 왕자님께서 심신의 충격을 받아 잠들어 계시다고 설득해 내보냈습니다.”
“잘했어.”
나는 편지를 뜯어 확인했다.
거창한 글귀가 가득했는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당장 보자는 초대장이었다.
나는 왕후의 편지를 읽으며 웃었다.
“큭큭큭! 제 자식은 소중하다는 건가.”
사실 왕후는 진작 행동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행동은 명백히 왕후에게 불리했으니 겁박을 하든, 회유를 하든 나섰어야 했다.
아마 지금까지 여러 소문과 자금적으로 동시에 압박했는데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던 이유는 2왕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1왕자인 내가 정치 싸움에 끼게 된다면, 그게 계기가 되어 아직 실권이 주어지지 않은 자식 세대까지 정쟁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남의 자식은 죽어도 상관없지만 제 자식이 다칠 가능성이 생기는 건 끔찍이도 싫은 거다.
그 말은 반대로 능구렁이가 이제 와서 움직이게 된 이유도 2왕자 때문이란 소리였다.
오늘 있었던 일이 정치적인 화제가 된다면 명백히 나와 2왕자가 중심이 되어 사건이 굴러갈 테니 말이다.
“이 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 물음에 프레시아와 헤리온은 같은 의견을 냈다.
“왕자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굳이 적의 소굴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프레시아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제가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그럼 전하께서 왕후마마를 상대하실 겁니다.”
두 사람의 의견에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아. 지금 당장 움직인다.”
기껏 미끼를 문 물고기가 바늘을 빼고 빠져나갈 시간을 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 * *
왕후는 초조하게 눈앞에 놓인 문제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별궁 예산 문제를 트집 잡혀 왕의 전면적인 견제로 인해 일시적으로 운용 자금이 막혔다는 것.
다른 하나는 갑자기 그녀의 거래처인 부티크에게서 알 수 없는 청구서와 항의를 받아 막대한 돈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
마지막으로 왕궁 전체에 왕후와 2왕자가 1왕자를 폭행하고 학대한다는 소문이 은연히 돌며 정치 공세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마지막 정치 공세였다.
“유안은 아직이냐?”
왕후의 초조한 물음에 그녀의 심복은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왕후는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칫!”
제아무리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세를 지닌 왕후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왕의 정실이기에 얻은 권위라 할 수 있었다.
아직 왕세자가 결정되지 않은 지금,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가장 높은 왕위 계승권을 가진 1왕자를 학대한다는 소문은 왕후가 가져야 할 덕목과 자질에 대한 중대한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2왕자가 1왕자를 공공연하게 폭행함으로써 소문에 대한 뒷받침을 할 증거를 만들어 버렸다.
이에 왕후는 인내하며 소문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리기는 것을 멈추고 당장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배후에 왕이 있을 텐데 섣불리 움직일 리가 없겠지.”
소문을 잠식시키려면 왕후인 자신이 강제적인 모양새를 만들면 오히려 역효과였다.
유안이 향후 어떤 움직임을 보이든 왕후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1왕자 유안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들어야 했다.
머리가 복잡해진 왕후가 이마를 짚으며 욕지기를 내뱉으려던 순간,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왕후마마! 유안 왕자가 알현을 청한다 합니다!”
궁녀의 말에 왕후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어디, 어디 있느냐!”
“접객실로 모셨습니다!”
궁녀의 말에 왕후는 지체 없이 곧바로 접객실로 향했다.
왕후는 함부로 움직인 어리석은 1왕자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후마마.”
접객실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유안의 인사에 왕후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래, 와줘서 고맙구나.”
왕후는 자신을 다독이는 탓에 유안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후후후, 오히려 제가 고맙죠.”
지금 눈앞의 소년 안에 어떤 검은 속내가 존재하는지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